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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헌강왕대의 태평성대]

[신라 최후의 지식인 최치원]

[처용가]

[정강왕대의 효녀 지은]

[진성여왕의 음란함]

[후삼국시대]

<라봉봉>

 

[헌강왕대의 태평성대]

경문왕이 사망하자

경문왕의 첫째아들 김정이 왕위를 이어

신라 49대왕 헌강왕이 되었습니다

 

헌강왕 시기 고려 태조 왕건이 송악(개성)에서 태어납니다

 

고려 태조 왕건 , 한국의 위인

 

헌강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수도) 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랫소리가 연이어 들렸습니다

 

헌강왕이 시중 민공에게

 

<헌강왕>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

 

기왓집으로 가득한 서라벌의 모습 , 신라말기의 태평성대

 

 

인공은

 

<민공>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민공>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거리)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에 헌강왕은 즐거워하면서

 

<헌강왕>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

 

하였습니다

 

이후 헌강왕은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고

술기운이 오르자 헌강왕이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며

마음껏 즐기다 헤어졌습니다

 

동궁과 월지(임해전)

 

신라 귀족들이 술게임때 사용한 14면체 주사위 , 무반주 댄스하기나 술원샷하고 크게 웃기 등 여러 벌칙들이 있습니다

 

[신라 최후의 지식인 최치원]

헌강왕대에 당나라에 유학간 최치원이 돌아왔습니다

신라 마지막 지식인 최치원 ,

 

최치원

 

그는 12살때 바다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했고

 

신라의 배 복원도

 

당나라로 떠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는

 

<최치원의 아버지>십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힘써 공부하라 !

 

했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좇아 학문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한번 시험보아 바로 합격해

당나라에서 벼슬을 받았습니다

 

당나라의 외국인 전용과거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한 최치원 , 빈공과에 1등으로 합격하기 위한 발해와 신라인들의 자존심 경쟁이 치열했다 합니다

 

그때 당나라에서 황소(사람 이름)가 반란을 일으키자

최치원은 종사관이 되어 서기의 임무를 맏았습니다

 

겨우 당나라에 진압되긴 했지만 당나라가 망하는 계기가 된 황소의 난

 

문장가였던 22세의 최치원은

황소에게 반란일으킨 것을 꾸짖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토황소격문' 이라 불리고 있고

황소는 이 격문을 읽다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벌떡 주저앉았을 정도로

명문장이었습니다

 

<토황소격문> ... 너(황소)는 자세히 듣거라.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

덕이 깊고 결점을 따지지 않는 은혜가 지중하여 너에게 병권을 주고 또 지방을 맡곁거늘 ,

오히려 짐새와 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와 같은 흉악한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이 개가 주인을 짖는 격으로 ,

필경에는 천자의 덕화를 배반하고 궁궐을 침햑하여 공후들은 험한 길로 달아나게 되고

어가는 먼 지방으로 행차하시게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일찌감치 덕의에 돌아올줄 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가니 ,

이야말로 천자께서는 너에게 죄를 용서해 준 은혜가 있고 ,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리니 죄가 있을 뿐이니 ,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그렇게 황소의 난은 진압됩니다

 

28세의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하게 됬고

헌강왕대에 이르러 신라에 돌아옵니다

 

당나라에서 유학하며 배운게 많았던 최치원은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했으나

신라 왕조 말기였기에

의심과 시기기 많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6두품이었던 최치원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성골이나 진골아 아니었기에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당 유학파이자 뛰어난 문필가였던 최치원은

당과의 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하나

계속 뜻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치원은 서쪽에서 당나라를 섬기다가

동쪽의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하여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 아파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관직에 나갈 뜻을 잃은 최치원은

전국을 방랑하며 스스로 위로했고

산 아래와 강 ,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책을 베개로 삼아 읽고

시를 읊조렸습니다

 

최후에

최치원은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살며

친형인 스님 최현준 및 정현사와 도우관계(도로 친구가 됨)를 맺고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었습니다

 

신라 골품제에서

최치원은 6두품이었기에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한계가 있었고

신라 왕실 , 진성여왕 역시 그를 중용하는 척은 했지만

이미 지방호족들이 일어나 신라에서는 세금도 안걷히고 있었고

망해가던 신라에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뜻을 잃고 방황하다 사망한 신라 마지막 지식인이었으며

최치원은 신라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이런 골품제에 염증을 느낀 신라지식인 및 지방영주들은

점차 적극적으로 신라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신라는 골품제로 인해 멸망하게 됩니다

 

이전 태조 왕건이 일어나고 있을때

최치원은 왕건이 비상한 사람으로서

반드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 것을 알고서

편지를 보내서 문안올렸는데

그 글중에서는

 

<최치원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송악산 , 개성 , 고려)은 푸른 소나무라

 

(신라는 퇴물이고

앞으로 고려가 파릇파릇 잘나갈것임)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중국 양주시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 (장보고처럼 중국에도 명성이 있는 인물이었음)

 

[처용가]

헌강왕은 개운포(울주) 에 나가 놀다

돌아가려 햇습니다

 

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되었고

헌강왕이 괴이하게 여겨서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기상 관측관)이 아뢰기를

 

<일관>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시어

이를 풀어야 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에 헌강왕은 칙명을 내려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했고

이에 동해의 용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헌강왕앞에 나타나

헌강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며(드래곤 댄스) 풍악을 연주합니다

 

그중 용의 한 아들이 헌강왕의 수레를 따라

서라벌로 돌아와 정사를 도왔는데

이 인물이 처용이었습니다

 

망해사 법당 뒷면 벽화 , 헌강왕과 처용의 만남장면

 

조선성종 악학궤범에 묘사된 처용의 모습

 

헌강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처용에게 아내로 주어

그를 잡아두려 했고

처용에게 벼슬을 내렸습니다

 

처용의 부인은 매우 아름다워

역신(역병을 옮기는 귀신) 이 그녀를 흠모해

사람으로 변해서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함께 잤습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애써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습니다

 

<처용의 노래 처용가>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 늦게 노니다가

집에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아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

본래 내 것이었는데

빼앗아 간 것을 어찌 하리오

 

조선시대 처용무 그림

 

오늘날 처용무

 

이때 역신은 형체를 드러내며

처용 앞에 무릎꿇고 말하기를

 

<역신>제가 공의 아내를 탐내어 지금 그녀를 범했습니다

공이 이를 보고도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로 공의 그림자를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사악한 귀신들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이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정강왕대의 효녀 지은]

헌강왕이 사망하자

경문왕 둘째아들 김황이 왕위를 이어

신라 50대왕 정강왕이 됩니다

 

신라 말기 , 수도의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과 다르게

점차 신라는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

효녀였던 백성 지은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운 여인이었고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에게 문안드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효녀 지은 , 효녀 심청의 모태가 된 인물

 

봉양할 것이 없으면

때로는 품팔이도 하고

또는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다가 봉양했습니다

 

그러한 날이 오래되어 고달픔을 이기지 못한 지은은

결국 부잣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섬을 마련했습니다

 

온종일 그 주인 집에가서 일을 해주고

저녁에는 밥을 지어가지고 와서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3~4일이 되자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말하기를

 

<지은의 어머니>지난 날의 식사는 거칠었으나 밥 맛이 좋았는데

지금 식사는 좋으나 맛이 옛 같지 않으며

간장을 칼날로 찌르는 것 같으니

이 어쩐 일이냐 ?

 

했습니다

이에 지은이 사실대로 말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지은의 어머니>나때문에 너를 남의 종으로 만들었구나

차라리 내가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소리내어 크게 우니

딸도 울어

그 슬픔이 길가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때 효종랑(김효종이라는 화랑)이

놀러나갔다가 이를 보고서는

집에 돌아가 부모에게 청해서

집의 곡식 100섬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고

종으로 산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인으로 만들어 주니

 

효종랑을 따르는 낭도 수천명이

각각 곡식 한 섬씩을 내어 도와주었습니다

 

의로움을 중요시했던 신라 화랑들

 

정강왕은 이를 듣고

지은에게 조 500섬 , 집 한채를 내려주고

잡역을 면제시켜줍니다

 

또한 지은의 집에 곡식이 많았으므로

빼앗거나 훔쳐가는 자가 있을 것을 염려해

관청에 명해 군대를 보내 교대로 지키게 했고

지은의 마을을

 

'효양방(어버이를 효행으로 봉양하는 동네)'

 

이라 바꾸었습니다

 

이에서 표를 올려

지은의 아름다움을

당나라 황실에 올려 아뢰었습니다

 

또한 정강왕은

 

<정강왕>효종랑은 비록 어린나이라고는 하지만

문득 인격이 완성된 어른처럼 보인다

 

하고 곧 자기의 형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했습니다

 

신라의 미소 , 천년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 미소가 새겨진 신라 기와

 

[진성여왕의 음란함]

즉위 2년만에 정강왕이 병들자

정강왕은 말했습니다

 

<정강왕의 유언>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 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헌강왕의 여동생

김만이 왕위를 이어

신라 51대왕 진성여왕이 즉위합니다

 

모처럼만에 나온 신라 3대여왕이었고

한국 역사상 마지막 여왕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진성여왕은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고

스러져가는 신라를 일으킬 힘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은 원래부터 각간 위홍과 간통하다가

왕이 되자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개했고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미남자 두 세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랏일을 맡겼는데

이로 인해

아첨하고 총애받는 자들이 방자해지고

뇌물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습니다

 

이때 누군가 이름을 감치고

시정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관청거리에 방을 붙였는데

진성여왕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습니다

 

[후삼국시대]

결국 진성여왕때

나라의 여러 주와 군에서 세금을 보내오지 않아

나라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고

진성여왕은 사신을 보내 납세를 독촉합니다

 

이로 인해

전국 곳곳에서 도적들이 봉기했습니다

 

이 시기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켰고

진성여왕이 그들을 체포하게 했지만

어느새 약체화된 신라 정부군은

역으로 원종 , 애노 농민 반란군에게 털려버렸습니다

 

통일신라 말기 전국적인 반란

 

북방에서는

북원 도적 양길과 그의 부하 궁예도 일어났고

 

사극 태조왕건의 궁예 (두한이 형님 겸 궁예ㅋ)

 

완산 도적 견훤도 전라도에 웅거해

후백제라 자칭했습니다

 

사극 태조왕건의 후백제왕 견훤

 

(진성여왕대부터 후삼국 시대 시작)

 

<라봉봉>이전까지의 피튀기는 왕위쟁탈전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결국 신라 귀족 , 농민들은 모두 썩어버린 신라에 한계를 느껴

진성여왕대부터 결국 급격히 무너지게 된 신라였고

후삼국시대가 시작됩니다

 

한국의 삼국지 시대급인 후삼국시대는

여러 인물 , 이야기를 남겼지만

실제 역사에서 후삼국시대는 백성들이 매일같은 전쟁 , 굶주림에 시달리던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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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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