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야합으로 태어난 효공왕]

[허수아비와 허수]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견훤의 후백제 건국]

[728년만의 박씨왕 신덕왕]

[왕건의 고려 건국]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은 경명왕]

[견훤에게 죽은 경애왕]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마의태자]

[신라의 멸망]

<라봉봉>

 

[야합으로 태어난 효공왕]

진성여왕시기

전국 각지에서 도적들이 일어나고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자

여왕은 결국..

 

<진성여왕>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그 숨어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되었노라

 

라고 말하고

왕위를 오빠 헌강왕의 서자 요에게 선양(왕위를 양보) 했습니다

 

처음 헌강왕은 사냥구경하다가

길 옆에서 자태가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았는데

헌강왕은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랑해서

뒷수레에 태우고

별궁에서 야합(정식혼인하지 않은 남녀가 정을 통함) 했는데

바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고

이 인물이 김요입니다

 

들판에서 정을 통한다는 뜻의 야합을 묘사한 그림 , 중국 사천성

 

김요는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했기에

진성여왕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러들여서

 

<진성여왕>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는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다

 

라고 말하고

곧 관리에게 명해서

예를 갖추어 높이 봉했습니다

 

그렇게 진성여왕 말기 혼란이 일어나자

헌강왕의 태자 요가 왕위를 이어

신라 52대왕 효공왕이 되었습니다

 

[허수아비와 허수]

신라 말기 어려운 백성들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효녀 지은 이외에도

허수아비 설화가 있습니다

 

신라 말기 왕은 여러번 바뀌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됬고

이에 신라 귀족들은 사치를 부르며 농민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자

농민들의 삶은 궁핍해져서

도적 , 산적 , 해적이 되거나 농민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 가난한 한 부녀가 있었는데

허수라는 딸과 허수의 아버지였고

호수는 혼자남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효녀였으나

허수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새를 너무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허수의 아버지

 

허수는 귀족들의 수탈로 식량을 빼앗기자

쥐굴을 파서 쥐를 죽이고 쥐굴 속에 있는

쥐가 모아둔 곡식을 식량으로 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도 딸이 쥐굴에서 얻어온 식량들을

허수의 아버지는 새의 먹이를 주는데 써버렸고

결국 허수는 세금을 못내고 빚을 지게 됩니다

 

이에 신라병졸들은 세금을 안낸 허수를 끌고갔고

허수의 아버지는 술먹고 집에 돌아오는 도중

세금때문에 딸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토하며

새장을 바라보다가

새장을 열어 호미로 새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새는 도망치고

허수의 아버지는 새를 쫓으며

 

<허수의 아버지>허수야... 허수야...

 

하고는 울음섞인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후 허수의 아버지는 논에서 계속 허수의 이름을 외치며

새를 쫓았고 논둑에 쓰러져 굶어 죽었고

새들은 죽은 허수의 아버지를 보고

불쌍하고 끔찍스러워 벼이삭이 영글고 있는

허수 아버지가 죽은 들녘에 차마 날아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 뒤 밭에 허수아비의 모형을 세워 새를 쫓았습니다

 

허수아비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효공왕대 북방에서 북방의 도적 궁예가 한창 세력을 넓혀갑니다

궁예는 신라 47대왕 헌안왕(혹은 48대왕 경문왕) 이 후궁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신라 왕족이었는데

 

치아가 있는채로 태어났고

태어날때 지붕에 흰 빛이 긴 무지개같아

위로는 하늘과 닿았기에

일관(기상 관측관) 이 헌안왕에게 말하기를

 

<일관>이 아이가 오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 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

 

라고 했고

헌안왕은 결국 내시에게

궁예를 죽이게 했습니다

 

내시는 아이를 포대기속에서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1층에서 젖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았는데

잘못해서 손으로 눈을 찔러

이때부터 궁예는 한쪽 눈이 멀어 애꾸로 살게 되었습니다

 

사극 태조왕건의 애꾸눈 궁예

 

젖먹이 유모는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궁예를 키웠고

점차 성장한 궁예는

세달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칠장사 명부전의 궁예벽화

 

그러나 궁예는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으려 했고

어느때는 까마귀가 막대 하나를 궁예의 바릿대(스님 밥그릇) 에 떨어트렸고

그 막대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써있었습니다

 

이에 궁예는 자신이 왕이 될것이라 생각하고

자만심을 가지게 됩니다

 

점차 신라 말기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지자

전국에서는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던가

개미처럼 모여들고 있었고

(+신라 해적인 신라구들이 일본 서부를 탈탈 털어먹었음)

 

궁예는 이렇게 혼란한 틈을 이용해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삼국시대 도적과 농민 , 호족들의 봉기

 

궁예는 처음엔 도적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지만

기훤은 궁예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고

결국 궁예는

도적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늗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동쪽으로 신라 영토를 공격하게 합니다

 

여러 고을들을 함락시키며

공을 세우는 궁예는

사졸들과 동고동락하고

전리품을 주거나 빼앗은 일까지 공평무사해

많은 사람들이 궁예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해서

장군으로 추대했습니다

 

점차 세력이 커진 궁예에

양길은 궁예까 자기를 배반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싫어해

궁예를 공격했으나

패해서 도망쳤고

궁예는 어느새 북방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서며 군사의 세력이 대단했기에

북방 호족 , 세력들이 하나 둘 궁예에 항복했습니다

 

궁예는 무리들이 늘어나자

내심 스스로 나라를 창건하고 임금이라 일컬을 만하다 생각해

관직을 설치하고 왕이됬는데

북방 송악(개성)의 고구려계 출신의 해상호족이었던 왕건 역시

강성한 궁예의 휘하로 들어갑니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점차 인정받게 되었고

궁예 역시 산세가 좋고 자리가 좋은 왕건의 송악을 수도로 삼게 되고

나라이름을 남쪽의 후백제를 세운 견훤에 대비되는

후고구려라 해서

 

신라는 또다시 삼국이 부활해

후고구려 , 후백제 , 신라의 세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고

후삼국시대가 시작됩니다

 

후삼국 시대

 

[견훤의 후백제 건국]

옛 백제땅 ,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견훤은

원래는 경상도 상주사람으로 신라장군 아자개의 아들이었고

아버지가 잠시 일하러 나갔을때

어린 견훤은 숲속에 있었는데

이때 호랑이가 와서 견훤에게 젖을 먹여

사람들은 견훤을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장성한 견훤은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했는데

신라 군대에 들어가 서남쪽 해변을 지키는 임무를 하게 되었는데

잘때에도 창을 베고 자며 적을 기다리고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보다 앞장섰기에

비장이 되었습니다

 

진성여왕이 총신들과 음란하게 지내며

정권을 농락하자

나라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고

백성들이 흩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견훤 역시 서남지방 , 전라도 지역을 돌아다니며

무리를 모았고

 

견훤이 완산주(전라북도 전주시)에 이르렀을때

백성들이 견훤을 맞이하며 위로하니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에 기뻐하며

 

<견훤>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하여 보건대

마한(백제) 이 먼저 일어나고

뒤에 혁거세(신라) 가 일어났으며

진한(신라) 과 변한(가야) 이 뒤따라 일어났다

 

이때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년이 지났는데

당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도 땅을 휩쓸고 와서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백제를 격멸하였으니

 

이제 내가 어찌 서울을 완산에 정하여

의자왕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

 

하고는

자신을 후백제왕이라 자칭하고

후백제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극 태조왕건의 견훤

 

그렇게 효공왕시기

신라정부는 지방통제는 커녕

세금도 제대로 거두지 못할 만큼

힘이 쇠약해져있었고

북방의 궁예의 후고구려 ,

서방의 견훤의 후백제의 위협에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자포자기한 효공왕은 첩에게 미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대신 은영이 충간했으나 효공왕은 이를 듣지않았습니다

 

이에 은영은

효공왕의 첩을 죽여버립니다 (이는 왕의 권위가 무너졌음을 보여줌)

 

[728년만의 박씨왕 신덕왕]

효공왕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위기의 신라는 위기를 타파해보려

김씨왕이 아닌 이전 아달라왕 박아달라의 먼 후손이었던

박경휘를 왕위에 올렸고

박경휘는 신라 53대왕 신덕왕이 되었습니다

 

728년만에 신라에는 박씨왕이 다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지는 나라를 다시 살리기는 어려웠고

신덕왕은 견훤의 대야성 침공을 겨우 막아내고

아슬아슬 신라를 유지하다 곧 사망합니다

 

[왕건의 고려 건국]

신덕왕이 사망하자

신덕왕의 태자

박승영이 왕위를 이어

신라 54대왕 경명왕이 됩니다

 

처음 후고구려의 궁예는

왕건이 자리잡은 송악(개성)땅을 수도로 하고

왕건을 2인자로 중용했는데

점차 왕건이 공을 세우며 힘을 길러가자

왕건을 견제하며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철원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허허벌판이자 엄청나게 추운지역인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자

군인들 , 백성들이 추위에 빡쳐가기 시작했고

궁예의 지지기반이었던 옛 고구려계 유민들도 궁예의 철원행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에 궁예는 나라이름을 태봉으로 바꾸고

연호를 수덕만세로 했는데

점차 자신을 미륵이라 자칭하고

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주장하며

신하들을 때려 죽이는등 폭군이 되어갔고

 

궁예가 진짜 미친놈인 이유.jpg

 

왕건 역시 죽이려하자

이에 참다못한 왕건은 부하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에 궁예는 평복을 입고 도망쳐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훔쳐먹던 중

궁예의 폭정에 분노한 백성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하고

 

왕건은 다시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고려로 바꿔

고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후삼국 시대 이야기를 다룬 한국 대하사극 태조 왕건 , KBS 1TV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2000) 太祖 王建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은 경명왕]

경명왕은 서쪽에서 공세해오는 후백제 견훤과 달리

고려 왕건은 덕이 있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해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습니다

 

이후 후백제왕 견훤은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진례로 진군했고

 

경명왕은 태조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왕건은 장수에게 명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했고

견훤은 이 말을 듣고 물러갑니다

 

경명왕은 이후에도 어찌저찌 신라를 유지하려 했지만

호족 , 백성들은 하나둘 왕건에게 항복해갔고

신라 영토는 계속해서 풍선처럼 쪼그라 들게 됩니다

 

경상도 일대로 쪼그라들은 후삼국시대 신라영토

 

[견훤에게 죽은 경애왕]

경명왕이 사망하자

경명왕의 동생 박위응이 왕위를 이어

신라 55대왕 경애왕이 되었습니다

 

견훤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급습했는데

당시 경애왕은 후백제군이 오는 것을 모르고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습니다

 

신라 국왕의 놀이터 포석정 , 저 곳에 물이 흘렀고 술잔이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유상곡수' 가 유명합니다

 

물위에 떠다니는 술잔 , 오늘날 유상곡수를 재현하는 모습

 

갑자기 후백제군이 들이닥치자

경애왕과 왕비는 뛰어 도망치고

친척과 신하 , 귀족 여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습니다

 

후백제군은 이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강간하거나 죽였고

견훤은 대궐에 들어앉아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왕과 왕비를 잡아오게 합니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견훤은 경애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고

경애왕의 아우뻘되는 효종의 아들 김부를 왕위에 올리고 돌아갑니다

 

효종은 이전 효녀 지은을 도운 효종랑 , 의로운 화랑이었고

경애왕이 견훤에 죽자

효종랑의 아들 김부가 급하게 왕위를 이어

신라 56대왕이자 천년왕조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이 되었습니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경순왕은 경애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습니다

이후에도 견훤은 신라에 침입해 약탈 , 위협했습니다

 

태조 왕건은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신라 수도 서라벌을 방문해

경순왕을 만나기를 요청했고

 

경순왕은 관리들과 함께

왕건을 영접해

극진한 예우를 보였습니다

 

임해전에서 고려 첫번째 왕과

신라의 마지막왕은 연회를 베풀었고

 

임해전(동궁과 월지)

 

경순왕은 술에 취하자 왕건에게 말했습니다

 

<경순왕>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

 

경순왕이 이 말을 마치고 눈물흘리자

좌위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왕건 또한 눈물 흘리며 위로했습니다

 

왕건이 수십일 체류하다 돌아가자

경순왕이 직접 나가 송별했는데

왕건의 군사들은 견훤의 군사들과 달리

규율이 엄정해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지 않고

깔끔하게 돌아갑니다

 

이에 서라벌의 귀부인들은 서로 기뻐하면서

 

<서라벌 귀부인들>이전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승냥이 떼를 만난 것과 같았는데

오늘 왕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마의태자]

결국 더이상 견훤의 침략에 견디다 못한

경순왕과 신라 신하들은

왕건에 항복할 것을 의논합니다

 

멸망전 신라는 경상도 일대로 쪼그라들고

군사들은 아무런 힘이 없던 나라였지만

그럼에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최초의 한민족 통일국가였고

천년 역사를 가진 의미가 큰 나라였습니다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넘기냐에 대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에 경순왕의 태자는

 

<태자>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고옥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

 

라고 말했습니다

 

경순왕은

 

<경순왕>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 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고는

곧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습니다

 

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개골산(겨울의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마의)을 잎고 풀을 뜯어먹으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개골산(겨울 금강산)

 

한국 제사복인 마의(삼베옷) , 신라 마지막 태자의 마의는 신라의 죽음을 표현

 

이에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라 불렀고

비록 대세는 고려에게 기울어졌던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의태자를 천년왕국 신라 마지막 자존심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의태자

 

마의태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마지막 왕자 , 강숙인 지음

 

[신라의 멸망]

고려 태조 왕건은 결국 신라 경순왕의 편지를 받고

경순왕을 영접하게 했고

경순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신라수도 서라벌을 출발해 고려수도 개경으로 가는데

천년왕조 신라왕의 항복대열에는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졌고

길마다 구경꾼들은 울타리를 두른것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왕건은 교외로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고 위로했으며

자신의 맏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했습니다

 

<왕건>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왕건은 항복한 신라의 이름을 바꾸어 경주라 하고

경주를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았습니다

 

<삼국사기 김부식의 경순왕 평가>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만약 목숨을 걸고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위와 같은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

 

(고려 현종대부터 고려 왕실은 마지막왕 공양왕까지

신라 피가 섞임)

 

왕건은 신라 항복 다음해인

936년 후백제마저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고

북방에서 온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통일민족국가 고려를 열었고

이후부터는 고려시대가 시작됩니다

 

통일신라대보다 확장된 고려의 영토

 

<라봉봉>동남쪽 변두리에서 삼국 최약소국으로 시작해

온갖 뒤통수 , 정치질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였고

통일신라라는 첫 민족통일국가 , 황금시대를 열었던 신라였지만

결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내부모순과 부패 , 밑천이 드러나며 망해갔습니다

 

말기에 여러 혼란도 있었지만

그나마 왕건이라는 인물에 의탁해 신라는 평온하게 고려의 일원이 되었고

이후 신라계 후손들은 고려의 세력가 , 귀족이 되어 오늘날까지 한국의 주요 성씨로 살아남았으며

오늘날 한국문화는 신라문화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