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사회·문화>
[황금의 나라 신라]
[신라의 황금 문화]
[골품제]
[골품제의 한계]
[신라의 귀족문화]
[화백회의]
[백결선생]
[가야금을 만든 가실왕]
[악성 우륵]
[가야금과 신라금]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한국인들]
[신라 사기꾼 김태렴]
<라봉봉>
[황금의 나라 신라]
힘과 상무적인 기풍이 강했던 고구려 ,
아름다움과 예술적 기풍이 강했던 백제 ,
그렇다면 신라의 사회와 문화는 어땠을까요 ?
일단 이전 이야기에서 쓴 것과 같이
신라는 철학 , 사상 , 종교가 발달한 나라였고
지식인들의 나라로서
동남쪽 변두리에서 가장 늦게 성장하고
고구려나 백제처럼 강성한 힘이나 부는 없었지만
여러 외교나 정치로서 위기를 극복하고 삼국을 통일해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라의 고유문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먼저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남부지방이라는 것과
같은 남한국가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유사한 점이 많았고
아옹다옹 엎치락 뒷치락하며 발전했습니다
백제가 자리잡은 경기 , 충청 , 전라도 지역인 마한은
농 , 수산물이 많이났고
가야가 자리잡은 경남지방인 변한은
철이 많이났고
신라가 자리잡은 경북지방인 진한은
금이 많이났습니다
금은 금속과 원소들의 왕으로 불리는 귀금속중의 귀금속으로서
옛날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금을 산업현장 , 첨단기술에 사용하지는 않았음에도
희소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고 , 오래 보존이 되는 금에 매료되었고
초기 역사에서 금은 나름 오늘날보다는 채광이 더 쉽고 흔했습니다
초기 신라지역에서는 강과 산에 금이 쉽게 나왔고
강가에서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릇을 돌리면 쉽게 사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있는데
먼 옛날 , 신라 초기는 오늘날처럼 황금이 많이 채굴되지 않은 시기라
가끔은 강 , 산 등에서 황금덩어리가 발견되기도 해서
한국 전래동화속 호랑이 이야기 , 황금덩어리 이야기는
옛날에는 실제 존재했던 것이었습니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나는 풍부한 황금을 가지고
금관을 만들고 수많은 황금문화를 남겼고
이에 신라 왕족의 성씨는 금 金 (금 금 , 성 김)을 뜻하는 김씨가 되었고
사람들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 했습니다
[신라의 황금 문화]
금이 워낙흔해
지붕에 금칠을 하기도 했고
이에 이를 '금입택' 이라 불렀으며
김유신 장군의 집인 재매정택 역시
금입택이었는데
고려와 원나라(몽골)의 전쟁기간동안 경주가 몽골군에 털리며 모조리 파괴됩니다
신라인들은 이러한 황금유물들을 보전하기 위해
왕의 무덤을 도굴이 어렵게 무덤위에 돌 무더기를 쌓고 그위를 한번더 흙으로 덮었기에
오늘날까지 신라 황금유물들은 온전히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도굴이 쉬운 석굴형식의 무덤이었기에
무덤안에 벽화도 남기고 무덤 출입 , 퇴장이 쉬워
유물들이 온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골품제]
신라는 골품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오늘날 한국 고딩들이 1등급~9등급까지 성적등급을 매기듯이
신라는 사람의 신분을 1등급~17등급까지 나누었고
보통 성골 , 진골 , 6두품 , 그이하 하위품
이런식으로 나뉘는데
일단 성골이나 진골은 누가 더높고 낮은게 아니고
태종 무열왕 기준으로 그이전왕족은 성골 , 이후 왕족은 진골인데
아무래도 이름이 가지는 성스러운 뼈다귀라는 이름때문에
오늘날까지 한국에서는 순혈주의 , 정통엘리트 코스를 탄 인물을
성골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식으로 골품제를 비유하면
성골은 1~2급 공무원 , 사관학교 출신이라 하고
이 자리는 오직 왕족만이 임명되었고
낮은 피가 섞이면 제약이 있어
성골 , 신라왕족들은 근친상간을 했습니다
진골의 경우
3~5급 공무원이라 하고 육군3사관학교로서
성골과 진골까지는 모든 관직을 다해먹을 수 있는
왕실피로서 박씨 , 석씨 , 김씨들이 성골과 진골이었습니다
6두품의 경우
왕족이 아닌 귀족들이 오를 수 있는 최상위 계층으로
중급 공무원 혹은 주임원사(부사관 최종 계급)같이 아무리 나이가 들고
오랜 경력이 있어도 결코 장군으로 진급 할수는 없는
그런 계급으로 비유되고 있고
수많은 신라 지식인 , 유명인들이
왕족이 아니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6두품에서 머물렀고
(비유하자면 6두품 이었던 최치원도
멍청한 장군들 아래있는 똑똑한 주임원사였음)
가끔씩 신라왕들은 왕권을 강화하고
다른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을 견제하려
이 6두품 세력들을 중용하기도 했기에
6두품 세력이 활약할때는 신라 왕권이 강했고
6두품 세력이 징징댈때는 신라 왕권이 약했다 보면 됩니다
뭐 그 이하 2두품들은 병장
1두품은 이등병
0두품은 노예
라는 말도 있고
일단 신라에서는 지방민들에게는
골품을 부여하지 않았기에
품계가 있는 정도만해도 마을 촌장 , 이장급은 되거나
어느정도 사는 계층이라 합니다
[골품제의 한계]
참 쓰면서도 좋지는 않은데
이런 골품제는 일단 신라초기에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신라왕들도 동네 촌장들의 대빵급이어서
누구나 왕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기라
신라 초기 골품제는 그리 큰 문제는 안됬습니다
그러나 점차 신라가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정복지의 농산물 , 노예들이 서라벌로 들어오며
이권이나 계급은 더욱 체계화됬고
고위층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려는 의도로
근친상간을 하며 낮은 계급의 피가 섞이지 않으려했고
이로 인해 고려시대까지 근친혼이 이어져
대가 끊기거나 기형아 , 장애아들이 태어나는 등
여러 폐단이 심각했습니다
또한 신라가 백제 ,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던 삼국시대에는
왕족 , 귀족들까지 전장에 나서 갈려나갔고
이러한 것이 신라인들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이자 미덕으로 여겨졌기에
신라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골품제로 인한 갈등은 그리 크지 않았고
피지배층 , 일반 백성들 역시
전쟁에서 공을세우면 신분상승 , 귀족이 될 수 있었고
다른 귀족이나 방계 왕족들 역시
계속해서 전쟁으로 귀족이나 왕족들이 죽어갔던 시대라
조금만 공을 세워도 승진이나 신분이동이 원활했던 시대였습니다
신라는 삼국통일전쟁 이전시기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등
강도높은 내정개혁을 통해
사회와 국가의 안정을 이루었고
한창 고구려나 백제 왕족과 귀족들이
피비린내나는 정권다툼을 하고 있었을 당시
신라는 왕권도 매우강하고 안정적이었으며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관계 역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는' 안정적이었기에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영토도 , 인구도 적었음에도
왕족 , 귀족 , 백성 , 노비들까지 소수정예급으로 전계층이 모두 합심해
삼국통일전쟁에 나서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영토가 급속도로 팽창하고 수많은 인구들이 서라벌로 밀려들어오자
신라안에서만 통했던 골품제는 점차 한계가 오기 시작했고
골품제등으로 인해 통일신라인으로 편입되기 어려웠던
고구려 , 백제 유민들의 불만도 불만이었지만
신라 내부 귀족 , 백성들 역시
삼국이 통일되고 평화기가 도래하자
더이상 왕족이나 귀족들이 일찍 죽는 그런것도 없었기에
신분제는 더욱 고착화되고
출세나 승진은 더욱 어려운 사회가 됩니다
(조선 초기나 한국 건군 초기인 한국전쟁시기 젊은 장군들이 있었지만
점차 이후로 가면서부터는 그런게 나오는게 불가능한 이치
혹은 신생기업 , 중소기업은 승진이 빠르나
안정화되는 대기업부터는 승진이 어려운 이치)
결국 통일신라 왕들은
신문왕대부터 시작해
더이상 필요없어진 군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귀족들의 이권인 녹읍 폐지 등 귀족들의 권한들을 축소시킵니다
이에 신라 귀족들 역시 초기에는 왕권의 강성함에
숨죽이고 있다가
점차 어린 임금들이 즉위하고
신라 왕권에 균열이 생기자
녹읍을 부활시킨다거나 귀족들의 권리를 부활시키려 했고
하나 둘 자신들이 왕이되기 위한 피비린내나는 왕위쟁탈전이 펼쳐져
신라 후기는 로마의 군인황제시대처럼
왕들의 평균재위기간이 엄청나게 짧습니다
이후 잠시동안 다시 왕위쟁탈전이 사라졌지만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고 혼란이 시작되자
신라 역시 골품제에 한계를 느낀 귀족 , 호족 , 지방영주들이 모두 일어났고
신라 지식인 계층인 6두품들 역시 신라 골품제에 회의를 느끼고
이런 지방 호족들에게 붙어버려
신라는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고
끝내 멸망합니다
외세에 멸망한 고구려 , 백제와 달리
신라는 통일 이후 삼국 민족 유화정책 , 골품제 극복이라는 과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내부적 문제 , 내세에 의해 멸망했으며
신분제는 이후 고려 , 조선대에도 이어졌지만
신라대처럼 고위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극단적인 근친상간 및
철저한 계급 이동막기는 점차 사라졌고
고려나 조선의 경우 과거제를 통해 일단 일반 양민 , 백성들도
형식적으로나마 지배계급에 편입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신라 골품제는 한국 카스트제도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사실상 사회의 암적 존재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골품제라는 용어는
사회의 등급 , 계급나누기에 비유되거나
성골 , 진골 표현들이 암암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라의 귀족문화]
신라의 귀족문화의 경우
원래 신라는 고조선유민들이
경북지방에 옹기종기 여섯마을을 모여 이루며 해피해피하게 살다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왕으로 모신 후부터
신라가 건국되고
6부 촌장들은 신라 귀족 , 지배계층으로 발전된 것이었으며
초기에 신라귀족들은
머리에 새깃털 꽂고 왕족들이랑 우가우가 몰려다니며
전쟁에 나서기도 하고 같이 무당들과 춤추며 제사도 지내는
서민적이고 소박한 모습이 강했는데
신라는 점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와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법) 체계가 들어서고
중국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면서 부터는
중앙의 국왕과 여러 귀족들이 일정한 타협과 조화속에서
같이 발전하며 강성하고 다채로운 화려한 신라 귀족 문화가 발달하게 됩니다
신라 문화는 일단 초기 신라인들은 문화에 신경을 쓴 케이스가 아니라
정열적이거나 화려한 고구려 , 백제와 달리
흙이나 조물락거리는 등
소박하거나 미적감각이 상실된듯한 똥같은 예술들이 많았는데
점차 고구려 , 백제 영향도 받고 삼국을 통일하며
고구려 , 백제 장인들을 흡수한 신라는
웅장하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귀족문화를 발달시킵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민들은 원래
말은 통했기에 막연하게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당전쟁을 치루며 이전보다 동족의식이 보다 강화되었고
통일신라는 고구려 , 백제 문화를 받아들여
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했고
당나라와 교류해
국제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고
통일신라는 귀족 중심의 예술 , 불교예술 등이 발전합니다
단 불교를 대중화 시킨 원효대사의 경우
직접 민중 , 백성속으로 뛰어든 인물이어서
귀족 종교에 머물러있던 불교는
통일신라대에 이르러서부터는
민중에까지 깊게 침투되
민중 문화 수준도 한층 높아졌습니다
[화백회의]
신라는 건국초부터
서라벌의 6개 마을 촌장들이 모여 씨족 , 족장 회의를 열었는데
이를 화백회의라 했습니다
화백회의는 국가의 중대사건이 있을때 개최됬고
서라벌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신령스러운 장소로 여겨지는
청송산 , 피전 , 오지산 , 금강산에서 돌아가며 열렸고
화백회의는 오늘날 국회같은 것으로서
만장일치제로 이루어졌으며
화백회의에서는 왕을 탄핵시키거나 인정하는 결정도 했기에
화백회의를 주도하는 귀족 수장직인 상대등은 신라에서 가장 권위있는 관직이었고
강력한 신라 신권을 상징하는 회의였습니다
<삼국유사 진지왕>
(진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4년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화백회의에서) 그를 폐위시켰다
신라왕권이 강화될때는
신라 왕이 임명하는 이벌찬(각간) 혹은 시중의 힘이 강하고
상대등의 힘이 약했고
신라왕권이 약화된 시기는 반대로
이벌찬과 시중의 힘이 약하고
귀족 수장직인 상대등의 힘이 강했습니다
단 만장일치제도였던 화백회의는
단 한번의 예외를 남겼고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때였습니다
자존심 강했던 경순왕의 아들이자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는 끝까지 고려에 항복하지 않겠다 하며
신라의 항복을 끝까지 반대했고
금강산에 가서 상복인 마의를 입고 풀뿌리를 캐먹다 사망했습니다
[백결선생]
신라에 백결선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출신이 미약한 인물이었고
집안이 대단히 가난해
옷을 백번이나 기워입어
마치 비둘기를 거꾸로 매단것 같았고
이에 사람들은 그를 백번 옷을 기워입은 선생님이라는 뜻의
백결선생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백결선생은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며
기쁨과 성냄 , 슬픔과 즐거움 , 마음에 편치 않은 일들을
모두 거문고로 표현했습니다
어느해 연말에는
이웃동네에서 곡식을 방아찧었는데
백결선생의 아내는 절구공이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백결선생 아내>다른 사람들은 모두 곡식이 있어 방아질을 하는데
우리만이 곡식이 없으니
어떻게 해를 넘길까 ?
하고 말했습니다
백결선생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백결선생>대저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명이 있는 것이요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이라
오는 것은 거절할 수 없고
가는 것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마음을 상해하시오
내 그대를 위하여
절구공이 소리를 지어서 위로해주리다
이에 백결선생은 거문고를 뜯어
절구공이 소리를 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방아타령이라 불렀습니다
백결선생은 가난과 어려움속에서도
선비의 고결함을 지킨 인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중에서>
백~ 결선생 떡방아 ~
삼~ 천궁녀 의자왕 ~
황산벌의 계백 , 맞서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
[가야금을 만든 가실왕]
이전 가야가 멸망하기 직전에
가야의 가실왕은 12줄 현금인 가야금을 만들었습니다
가실왕은
<가실왕>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하며 가야 음악가 우륵에게 명해서
12곡을 만들게 했습니다
[악성 우륵]
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 귀의했고
그 악기가 바로 가야금이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했던 진흥왕은
우륵을 예우하고 우륵에게 편안히 지내게 하며 제자를 가르치게 했고
우륵이 가르친 신라인 3명의 제자는
우륵에게 각각 가야금과 춤과 노래를 배웠고
신라인 세 제자는 우륵의 12곡을 전수받고서는
<우륵의 세 제자>이것은 번다하고(번거롭게 많고) 또 음란해서
우아하고 바르다고 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5곡으로 요약했고
힙합 정신이 풍부했던
신라제자들이 자신의 음악을 디스해버리자
우륵은 처음엔 화를 냈지만 (ㅋㅋㅋ)
그 다섯곡을 듣고나서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륵>즐거움이 넘치지 않고
애절하면서 슬프지 않으니
가히 바르다고 할 수 있다
너희는 왕의 앞에서 그것을 연주하라
했습니다
이에 진흥왕은 우륵의 세 제자의 음악을 듣고서는 크게 즐거워 햇습니다
그때 직간하는 신하가 진흥왕에게
<신하>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진흥왕은
<진흥왕>가야왕이 음란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는가
대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하는 것은 인정에 연유하여
법도를 따르도록 하게 한것이니
나라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음악의 곡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고 진흥왕은 마침내
그 곡을 연주하게하고
대악으로 삼았습니다
[가야금과 신라금]
진흥왕은 음악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다 생각한 임금이었고
또한 새로 정복한 가야지역을 강압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우륵과 가야금으로 대표되는 가야문화를 계승케 해서
유화정책을 펴며 가야 백성들의 반발을 최소화합니다
이로인해
가야 가실왕과 우륵이 만든 가야금과 가야금곡은
신라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일본에도 전해져서
신라금(시라기고토) 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한국인들]
비록 백제가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하나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신라였기에
신라는 건국초부터 일본해적 왜구들에게 시달렸고
일본으로 많이 건너가기도 하고 일본인들은 이들을
도래인(토라이진) 이라 불렀으며
토라이진들은 마치 도라에몽처럼
맨날 질질짜는 노진구같은 일본인들에게
막 주머니에서 좋은 것을 마구 꺼내주며
여러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의 문명국이자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하기전까지
일본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는 선진지역이었기에
백제가 신라에 멸망한 이후에도
신라는 일본에 대한 선진적 위치에서의 외교관계를 맺었고
일본 역시 한국 , 신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 노력했습니다
먼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가 모두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실상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 4국인들이 건너가 세운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삼국시대 왜국 담당일진 순서는
1.가야 2.백제 3.고구려 4.신라
순이었습니다
먼저 철과 흙이 풍부했던 가야는
최초로 일본에 철기나 토기기술을 전해주었고
백제 한창 근초고왕대부터 가야를 부하로 만들어버리자
다음 일본 담당일진이 되어
왜에 유교 , 불교 , 한자(글자) , 옷만드는법 , 문화 등을 전수해주었는데
해상국가였던 백제와 섬나라였던 왜의 궁합이 참 잘맞기도 했고
왜인들 역시 미개하게 훈도시쪼가리 한장걸치면서
우가우가하고 지내다가
갑자기 백제인들이 와서 글도 알려주고 옷입는법도 알려주고
하나하나 떠먹여주자
백제를 은혜와 센세(스승)의 나라라 여기기 시작합니다
넓고 비옥한 왜땅으로
백제인들은 계속해서 탈조선러쉬를 하게 되었고
왜의 지배층이 되어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백제인들은 일본을 건국합니다
백제와 비슷한 부여문화권인 고구려 역시
멸망전까지 동해바다를 통해 일본에 꾸준히 영향을 주게 되었고
일본에
불교 , 그림그리는 법 , 종이 , 붓등을 알려주었고
열심히 일본을 참교육 시켜주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에 백제와 고구려를 참 좋아하고
두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한편 동해바다 지역의 신라 역시 수산업과 농업을 둘다 하는나라였기에
해양업이 급속도록 발전하게 되었고
당시 신라 조선술은 점차 백제를 뛰어넘어 동아시아 최고수준이 됩니다
일본과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웠음에도
군사적 대립때문에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문화교류는 활발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선량한 헤븐신라인들은 미개한 일본에 여러 기술들을 전해주었고
일본에 배만드는 기술인 조선술과 축제술(저수지 만들기) ,
국가 통치 시스템 , 가야금 음악을 알려주었습니다
여러 문화교류 가운데
축제술전파는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쳐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됩니다
<오진 7년>
고구려인, 백제인 , 임나인(가야인) , 신라인이 같이 내조하였다.
무내숙이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이 연못을 한인지(韓人地 , 한인의 연못)라 부른다.
또 일본 도다이지(동대사)에서
신라의 촌락문서(민정문서)가 발견됬다는 것은
일본에서 신라의 통치체제를 수입해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여튼 백제 ,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버리자
일본인들은 신라인들을 극혐하게 되었고
신라가 일본까지 침공하는게 아닐까 두려워하며 눈치를 보다가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을 알고 다시 신라와 교류를 시작하게 됩니다
통일신라시기 일본은 미개하고 산지가 많은 나라였지만
그럼에도 거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 , 비옥한 땅 , 뜨끈한 온천을 가지고 있는
포텐셜이 강했던 나라였고
당시까지는 통일신라의 국력에 비해 어린아이 수준이었기 때문에
신라에서 나는 품목 , 사치품들은 엄청나게 고가에 거래됩니다
[신라 사기꾼 김태렴]
752년 3월
일본 큐슈의 다자이후에 신라왕자라 주장하는
김태렴이 이끄는 신라 사절단이 왔는데
700명에 달하는 대규모였고
그들은 당시 일본 수도 나라에 가서
자신을 천황의 신하라 자처하고 천황을 알현하며
천황을 당나라 황제와 동급으로 떠받들며 아부했고
기분이 좋아진 천황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합니다
김태렴 일행은 동대사도 방문하고
한가롭게 일본을 돌아다니다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보호아래
가져온 물건들을 다 팔아치우고 귀국했는데
사실 당시 신라 경덕왕에겐 왕자가 없었고
김태렴이라는 인물은 신라 왕자를 사칭한 사기꾼이었습니다
일본 정부 전체가
일개 신라 장사꾼일행에 휘둘릴 정도로
일본의 국력 , 문화력이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한국과 일본의 문화 , 경제 , 군사적 격차는 엄청나게 컸고
통일신라 말기 신라에서 흉년이 들고 왕과 귀족들이 백성들에게
조세를 쥐어짜내며 혼란의 시기 , 후삼국 시대가 되며
신라백성들이 도적과 산적 , 해적이 되자
신라 해적들은 바로 옆동네인 일본을 마구 약탈하기 시작했고
일본 서부가 신라 해적들에게 탈탈 털리게 됩니다
한국 기록에는 없지만 피해 당사자인 일본측 기록에서만 존재하는 내용이며
일본인들은 이들을 '신라구(왜구 원조)' 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합니다
<라봉봉>아무래도 문화는 백제인데
백제는 수많은 유물들이 파괴 , 사라졌음에도
나오는 것마다 최고수준의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데
백제인들은 이런 문화만들기에만 열중하다가
정치가 어지러워진게 아닐까싶고
신라인들은 정치는 잘했지만
문화에는 정교한 황금문화를 제외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싶을 정도로 안습해서
그나마 삼국통일 이후부터는 양호해집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사회문화는 고려 , 조선으로 계승되고
오늘날 한국문화의 모태가 되었으며
삼국을 통일한 나라답게
오늘날 우리들에겐 너무 당연하다싶고 익숙한게 많기도 합니다
한편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향도 강한 신라사회였으며
이런 점은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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