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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 성종 , 목종>

[착한 성품의 경종]

[복수법]

[전시과]

[경종의 선양]

[최승로의 시무 28조]

[성종의 중앙집권체제 정비]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활약]

[해동공자 최충]

[목종과 천추태후]

[여걸 천추태후 VS 악녀 천추태후]

[강조의 정변]

<라봉봉>

 

[착한 성품의 경종]

광종이 사망하자

광종의 아들 왕주가 왕위를 이어

고려 5대왕 경종이 되었습니다

 

풍악을 울려라 짤방으로 유명한 경종 , 사극 천추태후

 

경종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 광종이 왕권강화정책을 펼치며

호족들을 대숙청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고

 

(사실 광종 이전 왕건이 너무 부인을 많이두고

왕자를 너무 많이 낳아서

화를 많이 남긴 부작용때문도 있었)

 

서슬퍼런 광종의 철퇴와 의심은

자기 자식까지 향해있을때라

광종은 아들인 경종까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경종은 평소 착한 성품과 어머니 대목왕후의 극진한 보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최승로>경종은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부인의 손에 자랐던 까닭에

문 밖의 일을 보아서 안 적이 없습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기 때문에

광종 말년을 당하여 능히 후회할 만한 과오를 면해

천자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경종은

아버지 광종의 공포정치와 숙청에 진절머리가 났기에

호족 억압정책을 완화시키고

처음부터

아버지 광종에 의해 귀양가거나 감옥에 갔던 사람들을 복귀시키거나

풀어주는 일을 했고

 

이는 아버지의 정책과 정반대의 것이었으며

이로인해 경종대에는 광종대에 피해를 입은 자들이 대거 실세로 등장합니다

 

[복수법]

경종은 한국 역사상 유래없는 복수법을 시행시켜

광종대에 참소를 입은 사람들에게

복수할 것을 허락했는데 (;;)

 

'눈에는 눈 , 이에는 이'

 

라는 함무라비 법이 고대 복수법으로 유명하지만

 

복수법의 원조 함무라비 법

 

고려 경종대의 복수법은 국가가 행한 함무라비 복수법보다 더 미개하게

개인의 사적제재까지 허용했고

 

고려의 복수법

 

이로인해 고려에서는 현실 리니지 시대 , 무법시대가 잠깐 열려버렸고

호족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원한가진 상대에게

사적제재를 할 수 있게 허용되버려서

여러곳에서 이유없이 사람이 살해당하고

또다시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태조 왕건의 아들인 천안부원군까지 복수를 핑계로 살해당하자

결국 경중은 충격을 받고

복수로 살인한 자들을 모조리 처벌하고

복수하는 것을 금지하게 됩니다

 

[전시과]

경종은 전시과를 시행했는데

이전까지는 역분전이라고

후삼국 통일전쟁때의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듯 한 성향이 강했으나

점차 관직이 체계화되며 적절한 토지 지급기준이 필요했고

경종대에 이르러 전시과가 시행되는 것입니다

 

고려 전시과의 변천 (경종은 시정전시과)

 

전시과는 관료와 군인들에게 월급으로

농사지을 전지와 땔감을 공급하는 시지를 나눠 지급해

전시과라 했습니다

 

<고려 후기 정치가 이제현>

착한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정전이 공평하게 나눠지지 못하고

관리들의 녹봉도 불공평하게 된다

 

[경종의 선양]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 광종의 성향과 정반대의 임금이었던 경종은

어질고 온화했으나 우유부단한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고

상과 벌이 한결같지 않고 점차 정사를 게을리 하며

여색에 빠지고 바둑과 장기로 시간을 보내니

경종 주변 사람들에는 제대로 된 신하가 가까이 하지 못하고

내시들로만 가득차게 됩니다

 

괜히 이짤이 나온게 아님.jpg

 

결국 경종은 26세의 한창의 나이로

병에 걸려 사망하는데

우유부단했지만

혼란의 왕실에서

2살배기 아들이 왕위에 올라서 잘될거 같지도 않고

사람보는 눈도 있었기에

매우 똑똑하다는 평을 들었던

처남이자 사촌동생이자 고려의 명군인 성종에게 선양(왕위를 양보) 했습니다

 

<최승로>경종에게도 또한 족히 아름답다고 칭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대저 처음 병환에 걸렸을 때

아직 위독하지 않았는데

침실에서 성상(성종) 의 손을 잡고 군국의 큰 임무를 부탁하였으니

이는 사직의 복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민의 행복이었습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경종이 사망하자

경종은 2살의 어린 아들이 있었음에도

성품이 올바랐던 사촌동생에게 왕위를 잇게하였고

 

결국 경종의 사촌동생이자

태조왕건의 손자 왕치가 왕위를 이어

고려 6대왕 성종이 됩니다

 

그전까지 고려 왕실과 신하들의 관계는

개판 오분전이었는데

광종때는 왕이 신하들을 두드려 패고

경종때는 신하들이 나서는 시기가 되었는데

 

성종은 이러한 군신관계를 대거 정리하려 했고

이 정리를 위해 유교 , 유학을 사용합니다

 

성종은 관리들에게 정치 현안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 올리게 했고

이때 신하 최승로는

 

'시무 28조'

 

를 올려서

방대한 글속에 자신의 견해를 썼고

방대한 글속에 최승로는 국왕과 신하가 권력을 남용하지 말고

조화롭게 정치를 하며 유학적 정치원리를 따를 것을 강조합니다

 

최승로

 

<시무 28조 요약>

●관리의 의복과 백성의 의복은 달리해야 한다

●임금과 신하 , 부모와 자식간의 도리는 중국의 것을 따른다

●국가의 큰 행사(연등회와 팔관회) 는 백성의 부담이 크므로 삼간다

●불교보다는 유교에 따라 통치한다

●왕은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공손히 대한다

●관리를 공정히 선발한다

●양인과 천인의 구별을 또렷이 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모욕하지 못하게 한다

 

유교 사상에 입각한 최승로의 시무 28조 , 고려사

 

[성종의 중앙집권체제 정비]

성종은 관리들의 의례와 법규를 제정하고

중국 제도를 참고해

2성 6부제를 실시했으며

 

법을 담당하는 식목도감과

군사를 담당하는 도병마사라는 독자적인 귀족회의 기구도 만듭니다

 

고려의 2성 6부제

 

성종은 지방 행정조직도 개편해

지방에 12목과 10도를 두었고

고려 행정력의 한계로

중앙에서는 지방관을 널리 파견하지는 못했기에

주요 지방에만 관리를 파견하고

나머지 지방에서는 지역 향리(유지)들이 대체로 담당관의 일을 했는데

이로인해 성종은 12목을 설치 ,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들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단 그럼에도 대충 중앙에서 보내놓은거고

고려는 왕권이 참 약해서 지방민들이

통제가 안됨 통제가..)

 

12목과 고려의 지방행정조직

 

유교를 중시한 성종은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과거제를 정비했고

 

북송의 과거제도

 

개경에 경치 좋은 곳에

국립학교 국자감을 크게 짓도록해서

지방 향리 자제들을 모아 교육시켰고

지방 12목에도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해 지방민들을 교육시킵니다

 

국자감(고려 성균관)

 

성종은 과거제를 정비해

거의 매년 과거를 시행했고

직접 답안을 검토하는 등의 관리양성에 열의를 보였고

문신들에게도 제자를 두도록 권장합니다

 

이외에도 성종은 백성들에게는 의창 , 상평창 제도를 시행해

가난한 백성들에 곡식을 구휼하고 대여해 주게 됩니다

 

구휼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활약]

성종은 중국식 제도 , 유교를 적극 받아들이고

태조대부터 시행한 개경과 서경에서 개최되던

불교행사인 팔관회를 중지시키는등으로

기존 관리들의 불만도 있었고

 

성종은 재위 초부터

중국 송나라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으며

북방 여진족 , 거란족과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발해가 멸망하고 압록강 일대는 무주공산지역이 되었고

여진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성종은 압록강 하류일대의 여진족 통제를 시도했지만

여진족의 반발이 일어났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 전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려에게 송과 관계를 끊으려 했고

결국 993년 , 성종 12년 거란은 고려를 침공해

여요전쟁이 발생합니다

 

전쟁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았던 고려는

초기 전투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서희의 외교적 노력에 힘입어

거란과 화친을 맺었고

 

고려 외교관 서희 , 한국의 위인

 

고려 서희와 거란 장군 소손녕의 담판

 

고려는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거란에 사대했지만

압록강 하류지역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서희는 이 압록강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해

영역화 작업 및 이후 전쟁을 대비하는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서희의 강동 6주 수복

 

성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았고

외세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고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 , 수복했으며

고려 초의 중앙정비를 했던 인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해동공자 최충]

성종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경종이 죽었을당시 경종의 어린 맏아들은 어느덧 장성해졌기에

경종의 맏아들 왕송이 왕위를 이어

고려 7대왕 목종이 되었습니다

 

당시 목종은 18세의 나이로서

당대기준으로 이미 성년의 나이였지만

어머니 천추태후가 섭정을 했습니다

 

목종은 교육과 과거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이때 유학자 최충이 과거에 장원급제(1등합격) 합니다

 

최충은 해동공자라 불렸으며

여러 요직을 거치고 문하시중(고려 최고벼슬 , 국무총리)을 지냈으며

과거시험을 출제하는 지공거를 여러번 역임합니다

 

해동공자 최충

 

최충은 관료 은퇴 이후 9곳의 학당이라는 뜻의

사립학교 '9재학당(구재학당)' 을 세워

관리들을 배출합니다

 

최충의 문헌공도가 있었던 개성 자하동

 

당시 국립학교 국자감이 쇠퇴하자

전직 시험관이었던 최충은 직접 구재학당을 만들어

사립학교로서 관리들을 양성해냈고

이로인해 최충 학당 아래에서 공부한 문하생들이

크게 출세가도를 달리며 밀어주고 끌어주는 현상이 발생하자

너도나도 사학을 열어 사학 12도(십이공도)가 완성되고

고려 사학은 입시위주 교육학교가 되었고

시험관들은 자기 후배들을 뽑아주는 등

학벌 , 문벌이 만들어지게 되는 폐단이 일어나게 됩니다

 

문벌귀족화되는 고려 문신들 , 고려 문벌귀족을 묘사한 '아집도 대련'

 

[목종과 천추태후]

목종은 성종대부터 이어진 국가정비를 계승했는데

그럼에도 어머니 천추태후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천추태후 역시 목종이 성장한 뒤에도

섭정을 맡으며 권력을 장악하고 김치양과 불륜을 일으킵니다

 

사극 천추태후의 천추태후 , 이름이 캐간지라 여걸로 미화됬지만 현실은 ;;

 

경종의 부인이자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는 성종시기부터 자신의 외가 친척인 김치양과 친밀해지며

불륜을 일으켰고

이에 성종은 김치양을 멀리 유배보냈지만

목종이 즉위한 이후 천추태후는 다시 김치양을 불러 관직을 주었고

김치양의 권세는 극도로 높아졌습니다

 

이어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났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이 아이를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합니다

 

[여걸 천추태후 VS 악녀 천추태후]

자 여기서 천추태후는

 

과연 여걸인가 ?

아니면 악녀인가 ?

 

라는 논쟁이 여럿 있는데

 

일단 여걸론측 주장으로는

고려시대의 남녀연애는 자유로운 편이었고

천추태후 역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은

충분히 남편을 잃고 재가할 수 있으며

 

그녀는 신라계 관료 , 유학자들에 맞서

고려 왕실 , 태조 왕건 가문 중심의 정책을 편

조선으로 치면 유교적 성향의 사림파에 맞선

실리적 성향의 훈구파같은 포지션이었고

 

그녀가 있었을 당시 고려는 안정을 이루었으며

배후에서 정권을 조종했다하나

딱히 백성들의 고난 기록도 없었기에

유학자들에게 악녀라 까인 인물이라는 옹호론이 있습니다

 

(까빠가 공존하는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후나 당나라 측천무후에도 비유됨)

 

이번엔 악녀론측 의견으로

문제는 당시 고려가 아무리 남녀가 평등하고

연애가 자유로웠던 시대라도

이전 삼국 , 신라시대 역시 신분간의 차이가 나는 결혼은 자유롭기 어려웠고

왕실의 경우는 더더욱 그랬기에

당시 기준으로 보기에 상당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외가쪽 친척이니

근친이었고

결국 천추태후는 뒤에서 목종을 조종하려다

목종 역시 점차 반기를 들어갔으며

강조의 정변을 초래하는 등

악녀였을 뿐이라는 의견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천추태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저는 so-so

 

천추태후의 일대기를 다룬 사극 천추태후 , KBS 2TV 대하드라마 천추태후 (2009) 千秋太后

 

[강조의 정변]

목종이 갑자기 병이 들자

목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 대량원군 왕순에게 왕위를 이으려 했고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견제하고 있었기에

목종은 몰래 대량원군에게 밀지를 전하는 한편

서북면을 지키던 장군 강조를 불렀습니다

 

그런 혼란의 상황속에서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목종을 살해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믿고

이를 진압하려 개경으로 진격했는데

군사를 이끌고 개경 근처에 도착하자

목종이 살아있음을 알았고

 

고려 군사들

 

입장이 애매해진 강조는

일을 돌이킬 수 없어 개경을 장악하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폐위시킨 후 대량원군을 새 왕으로 옹립합니다

 

폐위된 목종은 천추태후와 함께 유배되었고

강조가 보낸 독약을 마시지 않으려 버텼습니다

 

이에 강조가 보낸 김광보는

목종을 호위하는 안패에게

 

<김광보>강조가 (목종이) 약을 거부하면

군사들을 시켜 죽이라고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멸족을 당하게 된다

 

하고 결국 안패는 강조의 명령대로

그날 밤 목종을 시해하고

목종이 자결했다 거짓으로 보고합니다

 

또 천추태후는 황주로 돌아가

21년간 살다 현종 20년 66살로 사망합니다

 

<라봉봉>고려사 , 오랜만에 읽으니 참 특이합니다

왕권이 유독 약했으며

신하 , 장군들은 각자 개인세력 , 사병을 보유한

현실 리니지 , 중세시대 느낌이 강한 나라였으며

 

그럼에도 이상하게 신하들은

고려를 무너트리지는 않는

기묘한 군신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던 고려였고

이러한 모습은 멸망때까지 이어집니다

 

아직 유교가 자리잡지 못하던 시기고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질서는 들어오기 전이라

남녀관계가 비교적 평등했고

이로인해 천추태후 같은 인물도 나오게 됩니다

 

단 고려 왕실의 음란함은 유명한 편이며

고려는 초기부터 멸망때까지 내내

이런 왕실의 음란함때문에 여러 병폐가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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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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