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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 덕종 , 정종>

[생존왕 대량원군]

[강조의 정변]

[거란의 2차 침입]

[고려 강조 30만 VS 요 성종 40만]

[현종의 피난]

[거란의 3차 침입]

[아아 , 귀주대첩]

[귀주대첩 이후 국제질서]

[민심을 위로한 현종]

[황제국 고려]

[천리장성]

[덕종의 강경외교]

[정종대의 평화]

<라봉봉>

 

[생존왕 대량원군]

(이전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하고 새롭게 새운 왕 현종 ,

 

현종의 재위과정은 파란만장했습니다

 

현종의 어머니는 경종의 왕비 헌정왕후였는데

경종 사후 사저에 살다 태조 왕건의 8째 아들 왕욱에게 재가해서

다시 왕씨 현종이 되는 왕순을 낳았고

왕순은 대량원군에 책봉됩니다

 

(고려 왕실은 태조 왕건의 무절제한 결혼으로 시작해서인지

근친의 신라 왕실도 한수 접어줄 만큼

출생이 참 개족보인 그런게 있고

현종 왕순은 근친+간통에 한국사 처음이자 마지막 사생아 왕임)

 

목종이 즉위하고 그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정권을 잡자

비록 사생아 출신이지만

엄연히 왕족이자

태조 왕건의 손자인 왕순은 정치적 견제를 당했고

영특하다는 왕순을 꺼린 천추태후는 왕순을

12세의 나이에 강제로 머리로 깎게 한 뒤

승교사라는 절에 출가시켜 버립니다

 

천추태후

 

이후 왕순은 다시 신혈사로 옮겨졌는데

이때 천추태후는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 왕순을 죽이려 했습니다

 

북한산 진관사(신혈사)

 

천추태후가 대량원군에게 계속 자객을 보냈지만

신혈사 스님들은 총명했고 새로운 고려의 남은 희망이었던

대량원군을 계속해서 보호했고

 

작정한 천추태후는 궁녀를 시켜

독약이 든 술과 떡을 보냈는데

 

한국 전통음식 '떡'

 

신혈사 스님은 대량원군을 땅굴속에 숨겨놓고는

 

<신혈사 스님>소군(대량원군)이 산에 놀러 나갔으니

간 곳을 알 수 없다

 

라고 구라를 칩니다

이에 궁녀가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주워먹고는 그대로 죽어버렸습니다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승려가 되고

자객의 위협을 받던

대량원군은 점차 세상의 무서움과 권력의 비정함을 알아가며

생존왕 스킬을 연마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대량원군이 목종에게 보낸 편지>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신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하니 ,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

 

(당신 엄마가 나 죽이려해 나좀 살려줘 ㅠㅠ)

 

[강조의 정변]

이후 목종이 병이 들자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해 낳은 자신의 아들을

목종 후계로 하려했고

 

계속 선 넘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지친 목종은

유일하게 남은 태조 왕건의 손자인 왕순을 후계로 삼으려 했고

서북면을 지키던 장군 강조를 불러들여

자신을 지키게 합니다

 

강조는 개경으로 오던 중

목종이 사망하고 김치양이 정권을 잡았다는 잘못된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개경으로 진격했는데

알고보니 목종은 살아있었고

 

고려군사들

 

입장이 애매해진 강조는 아예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면서

목종을 폐위하고 시해해버리고 (강조의 정변)

대량원군 왕순을 데려와 왕위에 올렸고

 

오랫동안 천추태후의 살해위협에 숨죽여 살던 왕순은

고려 8대왕 현종이 됩니다

 

[거란의 2차 침입]

한창 목종시기 거란은 송나라를 호구로 만드는

'전연의 맹' 이라는 조약을 맺게 됬고

이로인해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마다 엄청난 돈을 보내고

형제의 관계가 된다는 것이었고

송나라는 요나라에 돈으로 평화를 사는 비굴한 조약으로서

강성한 거란의 세력을 보여주는 중국사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거란이 강성한 시기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고

현종은 강조가 세운 허수아비 왕이었지만

총명했던 인물이었기에

이전부터 갈고닦은 생존왕 처세스킬을 발휘하며

강조 아래에서 열심히 생존생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강조 부하들이 북방에서 근무하다

조정 명도 없이 여진 추장과 수행원 95명을 모조리 살해했고

분노한 여진족들은 거란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고려에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합니다

 

여진족

 

여진의 협력을 얻어 자신감이 생긴

거란 성종은 이를 빌미로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해서

2차 여요전쟁이 일어납니다 (1차는 서희의 외교로 막음)

 

고려-거란 전쟁 (여요전쟁)

 

[고려 강조 30만 VS 요 성종 40만]

이에 고려 실권자인 강조는

고려 전국에서 30만 대군을 긁어모아 대군을 이끌고 맞섰는데

막 쿠데타를 성공했던 강조가 아니면

3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휘할 사람이 없었고

 

요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을 이끌고 온것이었고

강조 역시 빼도박도 못한 상황이라

 

결국

 

요 성종 40만 VS 고려 강조 30만

 

이 맞서게 됩니다

 

강조는 거란 기병을 저지하려

검을 꽂은 수레 , 검차를 배치해 검차로 공격했고

 

검차

 

강조는 거란 군의 돌파를 막아내는데 성공하고

거란군이 여러차례 물러나자

강조는 거란군을 얕잡아 보는 마음이 생겨

군영에서 한가롭게 탄기라는 놀이를 하게 됩니다

 

당시 고려에는 바둑판에 흰색과 검은색의 6개 바둑알이

6 VS 6 으로 있고

6개의 바둑알을 먼저 맞히는 쪽이 이기는 게임

쉽게 말해서 알까기가 유행했는데

 

알까기

 

거란이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 생각한 강조는

군영에서 한가롭게 이 탄기 , 알까기를 했고

 

강조가 알까기를 하는 동안

거란군이 고려 본진을 기습했고

그럼에도 강조는 한가롭게

 

<강조>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하라.

 

하며 허세를 부렸습니다

이때 다시 보고하기를

 

<고려군>거란군이 이미 대거 침입했습니다

 

하고 말하기를

강조가 놀라 일어나며

 

<강조>정말인가 ?

 

하고 당황했는데

강조 뒤에서는 갑자기

이전 자신이 시해한 목종의 혼령이 뒤에서 질책하며

 

<목종>네 놈은 끝났다

천벌이 강조를 멀리하겠는가 ?

 

했고

놀란 강조는 목종의 혼령앞에

투구를 벗고 꿇어 엎드린 채 거듭 말하기를

 

<강조>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강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을 돌파한 거란군은 강조에게 와서 강조를 묶고

담요에 싸서 요성종에게 끌고갔습니다

 

요성종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며 묻기를

 

<요성종>너는 내 신하가 되겠느냐 ?

 

하니 강조는

 

<강조>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 의 신하가 되겠느냐 ?

 

하고 대답했고

임금인 자신에게 '너' 라 표현하는 강조에게

요성종이 재차 물었지만

강조는 처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이에 요성종은 칼로 강조의 살을 발라내며 물었고

그럼에도 강조의 대답은 처음과 같았습니다

 

성종은 강조 옆에 있던 강조의 부하였던

이현운에게도 부하가 되겠냐 말했는데

이현운은

 

<이현운>두 눈은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습니다

한 마음으로 섬길 뿐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

 

대답합니다

이에 강조는 화를 내며 이현운을 발로 차며 말하기를

 

<강조>너는 고려 사람으로 어찌 이와 같이 말하는가 ?

 

합니다

요성종은 마침내 강조를 처형했습니다

 

(반역자이기도 하지만 고려인임을 있지 않았던 강조였음)

 

[현종의 피난]

그렇게 대장 강조가 허무하게 잡혀버리자

30만 고려군은 전부 무너지게 됬고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파천(임금 피난)합니다

현종은 후비 , 몇몇 신하들 , 겨우겨우 호위병 50여명만 거느린채

개경을 빠져나와 초라한 피난을 시작했고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진 고려왕권에

지방의 군사들은 현종 일행에 활을 쏘며 습격하거나

지방 향리(고려 향리는 조선 향리와 급이 다름 , 지방 호족들)가 위협하는 등

국왕으로서 큰 굴욕을 맞보게 됩니다

 

현종의 피난길

 

북쪽에서는 거란군이 , 남쪽에서는 지방 호족들이 위협했지만

이미 대량원군 시절부터 생존왕 스킬을 연마한

현종은 남쪽으로 피하며

거란에 직접 입조하겠다하고 화친을 청했고

북방에서는 양규가 요성종의 거란 본군과

처절한 혈투를 벌이다 장렬하게 전원 전사하자

 

처절하게 맞서다 전사한 고려 충신 양규

 

<강조의 편지를 위조한 요 성종의 회유에 양규의 대답>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양규 등의 반격에 피해가 만만치 않았던 거란군은 직접 입조하겠다는

현종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이고 철군했고

2차 여요전쟁은 종결되고 현종은 다시 개경에 돌아옵니다

 

막상 똥누기 전 마인드와

똥 다싼 마인드가 다르듯이

겨우 개경에 환궁한 생존왕 현종은

병을 핑계로 거란에 입조하기 어렵다 했고

이에 거란은 크게 분노하며

이전 고려 영역으로 인정하던 압록강 유역의 강동 6주를 내놓으라 요구합니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양국간에 국지전이 발생하나

고려는 근성있게 잘 방어해냅니다

 

[거란의 3차 침입]

이에 다시 거란은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출정시켜 고려를 침공했고

3차 여요전쟁이 발생합니다

 

이미 2차 여요전쟁때 굴욕을 맞본 현종은

3차는 나름 철저히 준비했고

요나라 소배압 10만대군에 맞서

고려 강감찬 20만대군으로 맞서게 됩니다

 

한국의 위인 강감찬 장군

 

(왠만해선 한국이

물량이 딸리는데 3차 여요전쟁때는 패기 지렸)

 

[아아 , 귀주대첩]

당시 세계 최선진국 송나라도 굽실댈만큼

동아시아 최고무력국가였던 요나라 VS

막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민족국가로서

막 기지개를 펴고있었던 뜨는 해 고려의

동아시아 패권대결이었고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지속적으로 거란을 두드려 팼고

결국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은 몰살당하며

동아시아의 운명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귀주대첩

 

현종은 승전해 돌아오는 강감찬 장군을 직접 맞이하러 나갔고

강감찬 장군이 걸어오는 길에 비단을 깔게 했습니다

 

관악구의 귀주대첩 승전 재현 퍼레이드

 

평생을 나라를 생각하며 외침을 대비했던 강감찬 ,

어느새 백발의 노장이 되어버린 구국영웅 강감찬 장군의 머리에

현종은 직접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꽂아주었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국제질서]

매년 요나라 오랑캐들한테 대규모로 삥을 뜯기고 있었던

송나라는

 

<송나라>오오미 고려쨔응 줜내 강하다해 ;;

 

하고 요나라를 견제해주는 새로운 세력

고려에 굽신대기 시작했고

요나라 역시 이후부터는 더이상 고려를 침공하지 않고

친하게 지내기로 했으며

 

귀주대첩 이후

고려는 명실상부 동아시아 최강 군사대국으로서

국제적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져

송 , 요 , 여진 , 일본 , 기타 세력 등등이

고려를 왕래하며 고려 중심의 국제 교류시대를 열어갑니다

 

번영했던 고려와 동아시아 무역

 

보통 한국사에서 가장 강력할때를

고구려 광개토대왕때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귀주대첩 이후 고려 ,

현종시기가 한국사에서 가장 강한때라 할 수 있고

강감찬 장군은 고려의 이순신으로서

고려를 구한 영웅이자

한국의 위인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였던

송나라가 요나라 견제때문에

고려에게 굽신대던 시기였으며

 

(좀 국뽕빨면 세계에서 한국이

군사력 NO.1 찍었던 캐사기 시기)

 

송나라에 온 고려 사신들은 항상 콧대가 높고

송나라인들을 무시하며 대놓고 송나라인들의

삥을 뜯는 거만한 태도였고

귀주대첩 이후 고려는 동아시아에서 '깡패외교' 를 했기에

당시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고려인들을 극혐하기도 했습니다

 

<소동파>일전에 황제께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고려에 진귀한 금은보화로 세공된 황알보석 여러개를 보냈건만 ,

이 무지한 오랑캐 고려놈들은 감히 은혜도 모르고 진짜일리 없다며

저희의 사신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깨부셨습니다.

 

중국 사극속 송나라의 고려 표현

 

좀 더 이후 국제정세로는

거란이 귀주대첩으로 뚜까맞고나서부터는 고려에 더이상 시비걸지 않고

 

<거란>고려야 시발 미안했다 그땐

그래도 니들이 송나라 짜장새끼들보단 낫다

 

이러고 있고

 

대국으로 모시던 송나라 역시

 

<송나라>고려쨩 친하게 지내자해

우리가 돈 퍼줄테니깐

거란 금수녀석들 좀 계속 견제해달라해 ~

 

이러며 고려에 굽신거리기 시작하자

현종대부터 고려는 민족의식이 엄청나게 커지고

신라의 나당동맹 이후부터

오랫동안 중국에 울분을 참고 쭈구려 지내다가

몸안에 흑염룡이 잠들어 있었던

고려인들은 알고보니 줜내 강했던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며

 

중2병과 몸안의 흑염룡이 올라온다..

 

<고려>크큭... ㅅㅂ 요나라나 송나라 새끼들도 별거 아닌데 ?

알고보니 우리가 선진국이었어 ~

K-국방 ㅅㅂ 개쩐다 이거야 ~

 

하고는 점차 국뽕에 취하기 시작했고

 

일본인들이 묘사한 고려군인들 , 손쉬운 사냥감을 잡듯이 웃으면서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화살을 날리고 있고 용맹한 고려군은 동아시아에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한국 전통 , 민족문화가 발달하게 됩니다

 

(이런 ㅆㅅㅌㅊ 국뽕경험때문에 더이상 이전 백제나 신라땅에서는

이전같이 독자적인 민족의식을 내세우지 못했고

삼한이 뭉치니 줜내 강하다는

고려뽕을 맞게 되며 점차 하나의 고려인으로 편입됨)

 

[민심을 위로한 현종]

이후 현종은 오랜 거란과의 전쟁으로 타격을 입는 나라를 정비했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종교에도 관여해

 

신라시대때 유교 지식인 설총과 최치원에 봉작을 내리고

유교를 높여 고려가 유교국가임을 지향하려 했으며

 

또한 거란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기 위해

대장경을 제작했고

초조대장경을 제작합니다

 

초조대장경

 

또한 현종은 무신(무관 , 군인)에 대한 예우를 격상시켜

군공자들은 큰 포상을 주었고

여요전쟁 전사자들에 대해

망종에 제사를 지내던 전통을 이어

오늘날 현충일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호국영령을 기리는 현충일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예우지만

현종보다 생각이 짧았던 이후 고려왕들은

무신들을 차별대우하다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해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황제국 고려]

일단 현종이 사망하자

현종의 장남왕흥이 왕위를 이어

고려 9대왕 덕종이 되었습니다

 

덕종대에는 개경 위봉문에

봉황이 날아댕겼는데

봉황은

 

<봉황>끼룩끼룩 아따 요즘 고려가 잘나가는 맛집이라매 ?

 

하고는 고려가 잘나감을 축하해주며

봉황이 한창 봉황댄스를 열심히 추고있었는데

 

백제 금동대향로의 봉황 조각

 

까마귀떼 들이 봉황을 따라오며 봉황을 향해 울어대는 바람에

봉황은 귀찮아서 날아가버렸고

이후부터 고려인들은 상서로운 봉황을 쫓아냈다고 까마귀를 극혐하며

아이 어른할 것 없이 까마귀들이 보일때마다 활로 쏘아대니

덕종 치세기간동안 개성엔 까마귀가 없었다 합니다

 

까마귀

 

이는 봉황이 나타날정도로 잘나가던 고려시대를 의미하고 있고

이렇게 한창 국뽕에 취해가던 시기 왕위를 이은 덕종은

즉위 시작부터

자신의 명령을 황제의 명령이라 하며

황제국을 표방했고 (ㅋㅋㅋ , 웃어 넘길일만한게 아닌게

조선 고종이 나라가 망해가던 중 자존심 세우려 대한제국 연거랑

귀주대첩 이후 송나라 , 요나라가 고려에 쫄아있었을때

황제국을 표방한 고려는 클래스 차이가 달랐습니다)

 

[천리장성]

일단 귀주대첩으로 3차 여요전쟁이 끝났지만

덕종은 그럼에도 거란이 언제 또 침공해올지 몰라

거란을 계속 예의주시했고

고려 북방에 천리장성을 쌓게 됩니다

 

고구려와 고려의 천리장성

 

[덕종의 강경외교]

고려는 계속 거란에 툭툭 쨉쨉 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생각보다 거란이 저자세로 나오자

고려는

 

<고려>ㅅㅂ 이새끼들 쫄았네 ㅋㅋ

 

하고는 거란에 북방 영토를 돌려달라 하다가

거란이 거부하자 거란에 외교를 단절하는 등

점차 거란에 강경대응 , 고자세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빡돈 거란은

고려 정주를 소규모로 침공했고

귀주대첩의 악몽때문에 고려의 군사력을 겁내

이전같이 총력을 기울여

대규모로 침공하지는 못했던 거란이었고

고려가 두렵고 좆같아진 거란은 아예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려좀 같이치자 원병을 빌리기까지 요구합니다

 

<송명신언행록>거란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고려를 정벌하는데 병사를 빌리려 하였다

 

그러나 거란이 좆같았던 송은 당연 거란의 요청을 거부했고

이는 그만큼 고려에 크게 쫄아있었던 거란의 실추된 위상과

고려가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을 잡고있으며

캐 잘나갔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덕종은 거란에 강경대응하며

 

<덕종>야 너두 국뽕 할 수 있어 !

 

하며 고려인들의 자신감을 업업해주고 국뽕충을 만족시켜주었고

병에 걸리자

동생 왕형에게 왕위를 이으라 유언하고 사망합니다

 

[정종대의 평화]

국뽕왕 덕종이 사망하자

덕종의 친동생

왕형이 왕위를 이어

고려 10대왕 정종(고려 3대왕 정종과 한자가 다르니 유의 !) 이 되었습니다

 

역시 잘나가던 고려 왕위를 이어받은 정종은

서경과 개경에서 팔관회를 열고

호국의 뜻을 새기고 복을 빌었고

 

고려 불교 행사 팔관회

 

정종은 강경자세로 나간 형 덕종이 사망하자

긴장된 여요관계를 온건한 대응으로 바꾸었고

 

거란 역시 다시 국력을 회복해가고

국제 정세 역시 거란 중심으로 흘러갈 정도로 강해졌지만

오랜 전쟁에도 끈질긴 고려인들을 굴복시키는데 실패한 거란은

한대 쥐어박고 싶지만 송나라 짜장들보다는

그래도 고려가 훨씬 낫다는 판단아래

적당한 선에서 잘 지내기로 합니다

 

거란과 우호관계를 회복한 정종이었지만

그럼에도

 

<정종>비록 사방이 무사하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며 각 지방에 날래고 용맹한자를 선발해

훈련시켰고

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합니다

 

<라봉봉>강조는 반역자이지만 최후에는

고려인으로서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사망한 인물이기에

여러 이야기가 되고 있고

또 위기의 어린시절을 보내다 강조에 의해 허수아비로 왕이 된 현종은

이후 여요전쟁을 잘 방어해내고

고려가 태평성대로 가는 기반을 연 현군이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초기엔 고려군이 고전했지만

그럼에도 고려는 강성한 요나라 유목기병들을 방어해낼 군사력이 있었던 나라였고

이후 중국에 원나라나 명나라등 워낙 막강한 통일제국들이 등장해 묻혔을 뿐이지

멸망때까지 꾸준히 동아시아의 군사강국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귀주대첩 이후부터는

나당전쟁 이후 중국에 굽신댔던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관계가

정반대로 흘러가게 되었고

한국은 무너진 자존심이 회복하고

중국은 한창 북방 유목민족의 위협속에 떨며 고려에 적극적으로 구애하던 시기였습니다

 

귀주대첩 이후부터 동아시아에는 평화기가 찾아오고

고려는 풍요와 번영 , 태평성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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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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