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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고려 최전성기왕 문종]

[문종대의 태평성대]

[고려에 귀부한 여진족]

[송과의 통교]

[문종의 개혁]

[요절한 순종]

[황금기를 유지한 선종]

[의천대사]

[어린왕 헌종]

<라봉봉>

 

[고려 최전성기왕 문종]

한국사 최전성기왕하면 여러분은 어떤 왕이 떠오르십니까 ?

고조선 단군왕검 ,

고구려 광개토대왕 , 백제 근초고왕 , 신라 진흥왕 ,

조선 세종대왕

 

한국인들은

보통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조선 세종대왕을 뽑고있고

이 인물들은 한국사에서 유이하게 대중들에게 '대왕' 이라 불리는 인물들입니다

 

한국사의 두 위인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그렇다면 고려는 ??

고려는 고려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고려 11대왕 문종입니다

 

(나 왜이렇게 아나운서 같이 말하지 교양 굿ㅋ)

 

<고려사 문종>문종 시절에는 백성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다

 

[문종대의 태평성대]

이전 현종대 거란의 침입을 귀주대첩으로 방어해낸 고려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고

이후부터 동아시아는 힘의 균형이 맞혀지고

서로 교역하는 평화기가 도래합니다

 

현종 역시 광개토대왕 , 세종대왕과 엮이는 왕이고

현종의 세 아들들도 각각 명군이 되는데

덕종과 정종 역시 열일하다 사망했고

이어 현종의 셋째아들 왕휘가 왕위를 이어

고려 11대왕 문종이 되어

문종 역시 열일을 하는

당시 고려왕실은 열일 집안이었습니다

 

(자식농사 굿굿)

 

귀주대첩이라는 큰 대전을 겪고난 후

당시 고려와 거란 , 송 , 여진 , 일본 등 동아시아 세계는

전쟁을 멈추고 공존의 길을 택했고

서로를 인정하며 교류하는 시대 , 평화기가 도래합니다

 

이로인해 문종대 고려에는 국제 상인들이 활발히 고려로 와서 교역했고

곳간은 곡식과 보물로 가득차게 됩니다

이에 사람들은 고려 문종시대를 '태평성대' 라 불렀습니다

 

고려왕실을 재현한 강진 청자축제

 

단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나 조선 세종대왕은

개인의 능력으로 하드캐리하며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지만

고려 문종은 개인의 능력도 훌륭했지만

당시 시대상이 좋은 시대를 타고난 것도 있었고

당시 사회가 낳은 명군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대외교류

 

[고려에 귀부한 여진족]

일단 국경을 맞댄 고려와 요의 경우

귀주대첩 이후는 서로 화의를 맺고 지냈지만

중간에 낀 여진족들을 서로 자기편으로 만들려 끌어들이려 있었고

여진족들은 어느 라인에 타야 이득일지 눈치를 오지게 보다가

 

고려가 귀주대첩으로 요나라를 두드려패자

고려가 잘나감을 알고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고려에 투항했고

이로인해 문종대 고려는 고려중심의 해동천하를 구축하게 되었고

또한 받아들인 여진족들은 북방민이나 백정등으로 편입됩니다

 

여진족

 

백정은 사실 조선시대대부터 사용된 용어인데

고려에 귀부한 유목민족인 여진족들이

일반적인 고려인들처럼 농경민족으로 한곳에 매여살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부여-고구려시대까지 북방에서

유목민족 성향도 강했지만

불교를 받아들이고 통일신라 시대로 넘어오며

유목적 기풍이 쇠하고 점차 농경에 올인하게 되었고

거친 유목민족적 , 상무적 문화는

통일신라 ,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잊혀지고 외면받게 됩니다

 

이에 고려에 귀화한 여진족 , 북방 유목민족들은 이국적인 서양인같은 외모로서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며

일반적인 고려 농민들이 하지 않는

사냥 , 축산 , 도축  , 가죽제품제작 , 문고리제작 , 배우(사당패) , 망나니 일 등을 하며

고려 사회를 떠돌아 다닙니다

 

도축하는 백정들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당패 , 유랑 예인 집단

 

망나니(사형 집행인)

 

고려시대 백정들은 '척' 이라 불렸으며 (양수척 , 화척 등)

척들은 일반 농민과 같은 형태로의 조세부담을 지지 않았고

양민중에서도 최하층 계급으로서 농경 제외 고된 일들을 하며

차별받았고

여진족 , 거란족 , 유목민 출신인 이들은 고려로 귀화했음에도

고려 북방에서

고려 농경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 생활방식을 지키며

남녀 구분없는 모습 , 남녀구분없이 말을 타고다니며

강력범죄를 저질러 악명도 높았습니다

 

(단 고구려대와 달리

이들을 포용하지 않고 차별한 고려 , 조선은

문치주의로 문약해져 병폐를 낳았음)

 

[송과의 통교]

하여튼

문종대에 이렇게 여진족이 대거 고려로 넘어왔고

 

거란과 전쟁때 화의조건으로 송과 단교한 고려는

이전까지는 암암리에 송과 교류했지만

다시 평화기를 맞아 송과 공식적으로 통교를 하고

상인 , 사신들을 교환합니다

 

당시 송은 거란을 견제하겠다는 판단아래

고려와 교류하기로 했고

문종이 송 사신을 적극 환영하며 밀월관계가 형성되었고

송 역시 고려를 대환영하며 고려 사신들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문종의 개혁]

대외적 상황도 좋았고

이런 상황에서 문종은 법률정비(사형수 판결할때마다

반드시 3번 심사하게하고

그럼에도 문종은 억울한 죄수가 생길까 경계하며 최대한 벌을 자제함) ,

관료 녹봉인 전시과 정비 , 세금 정비 , 관료관리 등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고려로는 외국에서는 여러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내부적으로는 풍요로 가득해

신하들과 백성들이 살기 편한 태평성대가 도래합니다

 

고려 왕궁 복원도

 

<이제현의 문종 평가>현종·덕종·정종·문종은 

아버지가 일으키고 아들들이 계승하며 ,

형이 죽으면 아우가 뒤를 이어서 시작에서 끝이 거의 80년이고 ,

가히 전성기라 이를 만하다.

...

대창(관청 쌀창고)의 곡식이 계속해서 쌓이고 쌓였으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세라 불렀다

송은 매양 왕을 포상하는 글월을 보냈으며

요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예식을 행하였다

동쪽 일본은 바다를 건너와 진기한 보물을 바쳤고

북쪽 맥인(여진족) 은 관문을 두드려서 토지를 얻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임완(사람 이름) 은 (문종을) 우리나라의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라고 하였다

 

[요절한 순종]

문종이 사망하자

문종의 태자 왕훈이 왕위를 이어

고려 12대왕 순종이 됩니다

 

순종은 문종 2년에 태어났고

문종은 37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을 재위했기에

그가 왕위를 이을때는 어느새 경륜있는 나이가 되었고

이전부터 문종은 태자 왕훈을 아꼈고

순종은 그렇게 훌륭한 부왕의 태자로 활동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조선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이

적자중의 적자로서 왕실 엘리트 코스 , 국왕수업을 받으며

여러 기대를 받은 세자로 활동했지만

왕위에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약해 죽었듯이

 

고려 문종의 아들 순종 역시

젊은 시절부터 건강이 약했고

부친상을 치르며 더욱 심해져

즉위한지 4개월만에 동생 왕운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37세의 나이로 사망해

고려는 졸지에 두 왕의 장례를 치루게 됩니다

 

<순종의 유언>...

오호라 ! 생에는 굴곡이 있으니

아무리 험난해도 대의를 좇아야 한다

사람 중 누가 사라지지 않는가 ,

다만 슬픈 것은 내 삶이 짧다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고려 문종-순종이나

조선 세종-문종 ,

근성의 기업가 1세대-막장 재벌2세

 

같은

이런 케이스들이 있기는 있는데

부왕 , 선임이 너무 뛰어난 인물일 경우

아무리 좋은 세력을 물려받았어도

물려받은 그 엄청나고 거대한 좋은 인프라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그 후계자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미치지 못할 경우

다음 시대를 이어가야할 부담이 엄청나게 커지게 되어

스트레스가 쌓일 수 있고

 

(갑자기 아버지가 이끌던 고능력자 신하들을 감당하기도 어렵고

너네 아버지는 슈퍼맨이었는데 왜 너는 이렇게 못함 ? 이런 평때문)

 

평소 뛰어난 아버지가 방패막이가 되어주며

자식을 든든히 밀어주다가 사망해버리면

자식 역시 아버지 생전에는 아버지 버프도 받으며

주변에서 뛰어난 평가를 듣다가도

역시 2인자와 1인자의 책임감의 무게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에

1인자가 된 이후 왕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온갖 책임 , 부담감 , 스트레스를 직면하게 되며

멘탈이 충분히 깨지고 이에 건강이 급속히 악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황금기를 유지한 선종]

그렇게 형인 순종이 갑자기 즉위 4개월만에 사망해버리자

얼떨껼에 문종의 둘째아들 왕운은 왕위를 이어

고려 13대왕 선종이 되었습니다

 

선종은 그나마 건강해

부왕 문종이 만들어놓은 인프라를 잘 유지하려 했고

이미 기틀이 잘 다져져있어서

선종은 국정에 큰 변화를 주지는 않고

무난무난하게 생존하며 고려 황금기를 유지시키게 됩니다

 

(역사에서는 후계에서

너무 뛰어난 1세대때문에 2세대가 부담감에 급사해버리고

이에 교훈을 얻은 3세대부터는

큰 변화보다 무난무난한 유지로 가는 형태가 있습니다)

 

이때에도 국제적으로 잘나갔던 고려인들은

국제 호구였던 송나라인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고

 

짜장녀석들아 ! 고려의 매운맛을 보거라 !!

 

송나라 기록에서는

 

<송서 고려전>

맥적(貊狄 , 고려 비하어)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송나라에)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첫째 돈이 너무 많이 들며 ,

둘째 백성이 힘들며 ,

셋째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 넘기고 ,

넷째 고려가 예의는 고사하고 실리만 챙겨가는데다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

다섯째 고려와의 관계가 거란이 트집잡을 거리가 된다.

 

<송사 고려전>고려의 사신이 거란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포학스러워 

관반이나 공경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함부로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채찍으로 쳤다.

 

저도 한국인이지만 한국인들 끼리도

미국인들이랑 있으면 재밌게 논거 같고

일본인들이랑 있으면 편하게 쉰거 같은데

한국인들은 같이 있으면 ㅈㄴ 피곤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ㄹㅇ 비글미 넘치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성격 , 국제관계와도 비슷한 고려 조상님들이었고

패기의 고려인들은 당시 국제 사회에서 깡패외교를 시전했습니다

 

하지만 문약했던 송나라는

요나라의 압박에 요나라가 유일하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고려와 손을 잡아야할 필요성이 있었고

결국 울며겨자먹기로 고려의 비위를 맞춰주게 됩니다

 

3강구도였던 당시 동아시아

 

[의천대사]

선종의 형제이자 문종의 아들이었던 의천대사는

고려 왕자에서 승려로 출가한 인물이었고

 

의천대사

 

그는 불법을 구하기 위해 송나라로 유학갔는데

문종대부터 송나라 유학을 가려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다

선종 2년대에 이르러

송나라 상인을 따라 몰래 밀항해

송나라에 도착했고

 

송나라 상인들

 

송황제의 큰 환대와 지원을 받으며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만나고

귀중한 불교서적들을 모아 고려로 돌아옵니다

 

의천대사는 거란 , 송 , 일본의 불교서적을 모아

고려 불교서적들과 함께 정리해

동아시아 불교문화를 집대성했고

고려는 화려한 왕실 , 귀족적인 불교문화가 발달합니다

 

원래 신라말부터 지방호족들에게 인기를 끌던

실천중심 , 지방자치에 영향을 준 선종 불교가 전국적으로 유행했지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고려 왕실은

교리 , 중앙 귀족 , 왕실 중심의 교종을 밀어주었고

이에 문종의 왕자 의천대사 역시 서적 중심의 교종 연구에 몰두합니다

 

당시 고려 교종은 왕실중심의 화엄종과

귀족 중심의 법상종으로 나뉘었는데

둘다 교종으로서 점차 선종과 맞서고 있었고

교종(중앙)과 선종(지방)의 대립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의천대사는

 

'교관겸수 , 이론(교종) 과 실천(선종) 을 아울러 강조'

 

라는 이론을 내세우며

교단 통합운동을 하며 천태종을 중심으로

고려 불교계를 통합하려했습니다

 

(옛날 학교에서는 그저 의천-교관검수 , 천태종 이렇게

외우라 주입시켰는데

나름 의미있는 배경이 있습니다)

 

[어린왕 헌종]

선종이 사망하자

선종의 어린 11살의 맏아들

왕욱이 왕위를 이어

고려 14대왕 헌종이 되었습니다

 

당시 선종에게는 동생이 5명이나 있었지만

어린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 좀 무리를 했습니다

 

당시가 황금시대의 고려였지만

11살의 왕은 너무도 어린 나이였고

유약해서 모후가 섭정했습니다

 

<고려사절요 헌종>

왕은 유약하고 병이 있어서 정치를 직접 듣고 처리할 수 없었다. 

모후가 나랏일을 오로지하니 ,

좌우가 그 사이에서 우물쭈물하였다

 

어린 고려 임금 , 사극 대풍수

 

어린 헌종은

이런 상황에서 여러 왕족들의 지위를 높이고

중신들을 승진시켰는데

이들을 우대해서 국정을 잘 운영해보려는 심산이었지만

오히려 이들은 이로 얻은 힘으로

권력다툼을 했고

 

이런 상황에서

헌종의 외삼촌 이자의와

왕씨 종친 대표인 헌종의 숙부 계림공 왕희가

맞서게 되었고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켜 이자의의 난이 일어나자

계림공은 이자의를 죽이고 이자의 일파를 제거하며

계림공 일파가 조정을 장악했고

 

이러한 와중에 아무것도 못하던

헌종과 섭정하던 사숙왕후는

두려움에 떨다가 3개월 후

헌종은 자신이 앓는 병을 명분으로

계림공에게 왕위를 양위합니다

 

<헌종의 양위 조서>

...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다.

아 ! 너희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짐은 뒷궁궐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헌종은 상왕으로 물러난지 2년후 14세에 합병증으로 사망합니다

헌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뺏고 시해당한 단종과 일생이 비슷하기는 했지만

명분과 유교적 논리에 입각해 수많은 조선 충신들이 단종의 편에 선것과 달리

실리와 이해타산이 빨랐던 고려 신하들은

아무도 , 정말 아무도 헌종의 편에 서지 않았고 (ㅋ ;;)

 

대신 헌종은 단종과 달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왕위에 욕심없이 깨끗히

숙부에게 양위해 화를 면할 수 있었고

또 숙부의 입장에서는 병든 헌종이 알아서 빨리 죽어줬기에 (;;)

조선 세조같이 직접 조카의 목숨을 거두는 행위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라봉봉>삼국 ,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는 대체적으로 왕권이 약하고

신하 , 호족들의 힘이 강한 나라였기에

왕들의 능력이 두각을 나타내기 보다는

사회 , 인프라에서의 태평성대가 있었고

그 시대가 바로 문종부터의 고려 황금시대입니다

 

이시기는 뚜렷이 이야기 되는 이야기는 없어도

국제교류가 매우활발해서

여러 고려의 문화들이 발달 , 수출되었고

막대한 부가 고려로 흘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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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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