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건국 , 태조 왕건 , 혜종 , 정종 , 광종>
[왕건의 고려 건국]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훈요십조]
[돗자리 임금 혜종]
[왕규의 난]
[정종의 숙청]
[광군과 서경천도]
[광종의 개혁]
[광종의 호족숙청]
<라봉봉>
[왕건의 고려 건국]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
그의 이야기는 이전 어린이 개인이야기에서 쓴 바가 있는데
원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북방 고구려 유민으로서
송악(개성) 의 신라 호족으로서
통일신라 말기 전국의 호족들이 일어나며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자
왕륭은 아들 왕건과 함께 북방에서 가장 강성했던
궁예의 밑으로 들어갑니다
당시 왕륭은 궁예에게
<왕륭>대왕께서 만약 조선 , 숙신 , 변한 (고구려와 신라)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자(왕건) 를 성주를 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했고
이에 왕건은 궁예의 조정에 들어가고
송악은 궁예의 근거지가 됩니다
뛰어나고 덕망있어 포용력이 강했던 왕건은
궁예 휘하에서 장군이 되어 전장을 누비며 여러 공을 세웠고
점차 궁예가 왕이 되어 폭정을 일으키자
여러 무장과 호족들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 왕으로 세우고
왕건은 918년 고려를 건국합니다
한국의 중세시대 고려 ,
고려는 불같이 역동적이면서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에 가려진 신비의 나라이기도 했고
중세시대 특유의 야성적 분위기속에
상식적이거나 한국적이지 않고 이국적인 느낌도 강한나라라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대의 야성과 근대의 지성이 공존하는 기괴하고 특이한 나라이자
한민족이 본격적으로 하나로서 통합되며
한국을 세계에 KOREA , 코리아라 알린 민족국가이기도 했습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삼국 백성들은 혼란을 피해 덕망있는 왕건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고
이에 신라 경순왕은 1000년 사직을 왕건에 넘기고 항복했고
연이어 후백제 역시 왕건에 항복함으로서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북방에서 멸망한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신라 문무왕의 삼국통일에 이어
또다시 민족국가를 건설합니다
왕건이 해냈던 후삼국통일은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을 받고 해낸 삼국통일과 달리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삼국통일을 했다는 큰 의의가 있으며
이에 고려대부터 한국 최초의 민족국가가 시작됬다고도 합니다
포용력이 뛰어났던 왕건은
통일 이후 세금을 10분의 1만 내도록 줄이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고
호족들이 백성들을 침탈하지 못하게 경고합니다
또 유학자들을 등용하고
승려들에게 극진한 예우를 다해
고려에 유교와 불교가 조화를 이루게 했고
포용력이 뛰어났던 왕건은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호족들의 딸과 결혼해서
부인만 29명을 두었습니다
[훈요십조]
태조 왕건은 사망하면서
후대 왕에게 지키라고
유언인 훈요 10조를 남겼습니다
<훈요 10조>
1. 국가의 대업이 제불의 호위와 지덕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2. 모든 사원은 다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가려서 개창한 것이니, 함부로 사원을 지어 지덕을 손상시키지 말라.
3. 왕위 계승은 적자 적손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할때에는 차자,
그도 불초하면 형제 중 중인이 추대하는 자로 할 것.
4.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 것.
5. 서경(평양)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100일간 그 곳에서 머물라.
6. 연등회, 팔관회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7. 소인을 멀리하고, 현인과 친하며, 조세를 가볍게 하고, 상벌을 공평히 할 것.
8. 차현 이남 금강 이외의 산형 지세는 배역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9. 관리의 녹봉은 그 직무에 따라 제정할 것.
10. 널리 경사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이중 평양을 중시하고 거란을 적대시하라는 것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 , 북진정책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8번의 호남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것은
지역차별이라기보다
왕건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격렬히 저항한 후백제 지역이었기에
경계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근데 전라도나 황해도 지역이 원래부터 풍요롭고 고유 특색 문화[옛 백제나 고구려 기풍] 가 강해
이후에도 한국사에서 꾸준히 곡창지대로 착취받으면서 차별받았습니다)
[돗자리 임금 혜종]
왕건 이야기는 이전 여러번 이야기 한 바가 있기에
이쯤에서 해두고
태조 왕건이 사망하자
왕건의 첫째아들 왕무가 뒤를 이어
고려 2대왕 혜종이 되었습니다
이전 왕건이 한창 후백제와 싸우며 나주원정을 했을 당시
나주에서 빨래하던 오씨여인과 동침하게 됬는데
왕건은 미천한 가문인 오씨여인을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고 (;;)
왕건의 됨됨이를 본 오씨여인은
즉시 왕건이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을 손으로 쓸어모아
자신의 질에 넣고 그렇게 혜종을 낳았습니다
(한국사에서 가장 기괴한 출생)
혜종은 태어났을때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에 사람들은
혜종을 주름살 임금 , 돗자리 임금이라 불렀습니다
[왕규의 난]
혜종은 아버지를 도와
후삼국 통일전쟁에 참전해 후백제를 점령한 무장이기도 했고
왕이 되고나서는 자신을 암살하러온 자객을 맨주먹으로 직접 때려잡기도 했습니다
혜종의 장인인 왕규는 혜종을 암살하고 자신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옹립하려
혜종의 침실로 자객을 보냈는데
혜종은 이를 깨닫고 한주먹에 그들을 때려죽인후
주위에 명해서 끌어내개 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혜종이 병이 들어
신덕전에 머물고 있었는데
신하 최지몽이 아뢰기를
<최지몽>가까운 시일 내에 장차 변고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기회를 보아 이어(임금의 거처를 옮김) 하셔야 하옵니다
라고 했고
이에 혜종은 몰래 중광전으로 옮겨갑니다
이때 왕규는 밤에 또다시 자객을 보내
벽에 구멍을 뚫고 혜종의 침상에 들어가게 했는데
침상은 비어있었고
혜종은 장인 왕규가 자신을 죽이려 한 짓인줄을 알았지만
왕규에게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왕규는 최지몽을 만나자
검을 빼어들고 욕을 하며
<왕규>왕이 침전을 옮긴 것은 분명히 너의 계략일 것이다
라고 했고
최지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혜종은 이번에도 이런 왕규의 일을 책잡지 않았습니다
혜종은 왕규가 반역을 한 이후로
의심이 많아져
항상 무장한 병사들로 호위하고
기쁨과 성냄이 일정치 않았으며 (조울증)
소인배들을 등용하니
안팎이 탄식하고 혜종을 원망했습니다
(암살 스트레스로 인해 멘탈 놓음)
[정종의 숙청]
혜종이 암살 스트레스로 인해
재위 2년만에 사망하자
태조 왕건의 둘째아들 왕요가 왕위를 이어
고려 3대왕 정종이 되었습니다
정종이 왕이 되자
하늘에서는 말소리가 들렸는데
<하늘>요(정종 이름)야 , 가여운 백성들을 보살피고 구휼하는 것이
임금의 중요한 임무이다
라고 했습니다
정종은 왕이 된후
곧바로 왕규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전부터 왕규의 동태를 알고있던 정종은
서경 수비대장 왕식렴을 불러 호위하게 했고
왕식렴은 왕규를 붙잡아 귀양보내고 처형했고
당시 왕규의 일당 300여 명이 처형되었습니다
[광군과 서경천도]
정종은 앞으로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 여기고
30만 군사를 선발해
광군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정종은
수도를 서경(평양) 으로 천도하려 하고
서경에 왕성을 쌓도록 했는데
당시 강제로 사람들을 징발하니 원성이 컸으며
정종이 일찍 사망하며 서경천도는 중단됩니다
[광종의 개혁]
정종이 사망하자
태조왕건의 아들이자 정종의 동생인
왕소가 왕위를 이어
고려 4대왕 광종이 되었습니다
광종이 즉위할 당시는
혜종과 정종이 너무 일찍 사망했기에
아직도 후삼국 시대가 끝난지 10년째 지난 해였을 뿐이었고
광종에게는 고려 왕실을 안정시키고 민족통합을 해야할 과제가 주어집니다
광종은 적극적으로 중국 후주 및 송나라와 활발히 교류하였고
다수의 중국인들을 초빙해서
고려 조정에 참여시킵니다
광종은 후주인 쌍기의 재주를 알아보고서는
쌍기를 등용했고
쌍기는 과거제 시험을 건의하여
고려에서는 시험선발제도인 과거제도가 시행됩니다
또한 관료들이 입는 공복들을 정비해서
중국의 제도와 같게 했는데
그전까지 고려는 건국초라
신하들이 조정에 왕보다 화려하게 입고오거나
신라계는 신라 관복을 입고 오거나
궁예의 후고구려 관복을 입고오거나
승려복을 입고오는 대환장 파티가 벌어져서 (ㅋㅋㅋ)
광종은 관복을 지정해
위계질서를 확립합니다
선대왕대부터 이어진 북진정책을 계승해
북방 개척을 추진해 영토를 확장합니다
또한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시행하는데
노비안검이란
'노비를 살펴 검사한다'
라는 의미로서
원래 양민이었지만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법을 제정해
노비들을 양인으로 만들고
세금 확보 및 귀족들의 세력 , 사병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광종은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면서도
고려가 황제국임을 내세웠고
여러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기며
고려 초기의 기틀을 다진 명군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광종의 호족숙청]
그러나 광종은
잔혹한 호족 숙청정책으로 피를 많이 흘린 인물이기도 해서
후삼국통일 이후 고려에 수백개에 달하던 고려 호족가문들을
50개로 남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숙청합니다
이에 광종은 고려의 태종 이방원이라고도 불리고 있고
그의 시호인 빛날 광 光 자의 광을 미칠광 狂 이라 비유해
'빛나거나 , 미치거나 (光하거나 狂하거나)'
라는 광종의 일대기를 다룬 사극도 나오기도 했습니다
<라봉봉>제가 어렸을때 가장 먼저 본 역사책이
집에있던 고려역사였습니다
고려는 상당히 상무적이면서도 기묘한 느낌이 강한 나라였고
인기가 많은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중간에 낀 나라이기도 해서
어찌보면 한국사에서 가장 이야기 안되고 미스터리한 나라가
고려이기도 합니다
고려 , 이성과 상식보다는 힘의 논리로 움직였던
한국의 중세 , 야성의 시대로서
이러한 힘의 논리는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의 그것보다 더욱 강했던 시대가
바로 고려였고
고려는 ㄹㅇ 동양 중세 로망 끝판왕 나라이자
별 말도안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면도 강한 나라였습니다
마치 중학교다닐때가 생각날 정도로
힘과 무력의 시대였고
그런 힘의 논리 속에서도 선조들의 외세나 위기에 대한 굳센 의지 및
고려 학자들은 꾸준히 연구를 남겨
빛나는 500년 고려문화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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