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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종교·사상>

[신라의 불교]

[밤나무골에서 태어난 원효]

[원효대사 해골물]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파계승]

[나무아비타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대성]

[재상 집에서 태어난 김대성]

[곰 귀신과 장수사]

[불국사와 석굴암]

[아사달과 아사녀]

[인도에 간 혜초스님]

[군자의 나라]

[머리에 뿔이 있던 강수]

[조강지처]

[신라 문장가 강수]

[부창부수]

[설총과 이두]

[화왕계]

[신라의 도교]

[풍수지리설]

[풍류 문화]

<라봉봉>

 

[신라의 불교]

신라에 불교를 받아들이게 한 이차돈의 순교 이야기는 이전 이야기에 썼고

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은 신라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공인했고

이후부터 신라에는 왕실 , 귀족들의 큰 후원을 받는

화려하고 웅장한 불교문화가 발달합니다

 

신라 거대사찰 황룡사와 황룡사 구층목탑 복원도

 

사실 신라 왕족과 귀족들 역시 불교의 뜻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맨날 한국 토속무당들이랑 춤추면서 제사지내다가

일단 당시 선진국 중국에서 도입된

불교는 줜내 근엄하고 , 세련되 보이고 , 있어보이는 스웩이 강해가지고

일단 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자신들의 세력과 부를 어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원을 짓고 향을 피우고 불교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불교가 들어오며 유행한 향피우기 문화 , 향은 고가였음에도 당시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했고 살균과 악취제거에 효과가 있다합니다

 

그러나 글도 잘 모르는 일반백성들에게는 왕족들과 귀족들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 불교와 불교 경전이었고

단지 불교와 부처님이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점 등만

가물가물 알고있던 시기였습니다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밤나무골에서 태어난 원효]

이러한 시기 한국 , 신라 일반백성 , 대중들에게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큰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한국사의 위인 원효대사였습니다

 

원효대사

 

원효의 성은 원래 설씨였는데

그는 압량군(경상북도 경산시) 남쪽 율곡의 밤나무(부처님이 사망하실때

사방에 있었던 나무)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원효대사의 탄생모습 불화 , 경산 제석사 원효성사전

 

원효가 태어난 밤나무에 대해서도 재밌는 전설이 있는데

옛날부터 이곳 절의 주지스님은 절의 종 한사람에게

하루 저녁의 끼니로 밤 두개씩을 주었고

이에 종은 관가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밤쨩

 

당연히 밤 두개씩으로 허기진 저녁배를 채울 수는 없었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는 그 밤을 가져다 조사해보니

밤이 엄청나게 커서

한개의 밤이 바리(스님 밥그릇) 에 가득 찼기에

관리는 도리어 밤을 한개씩만 주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진평왕시기 원효가 태어날때 원효의 어머니는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고

원효를 낳으려할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습니다

 

원효는 태어날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스승을 따라배우지 않았습니다

 

[원효대사 해골물]

승려가 되어 출가한 원효는

승려가 됬음에도 일반적인 스님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똑똑해서 촉망받는 유능한 스님이었던 원효는

젊은 시절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했습니다

 

유학가려 서라벌에서 한강유역의 당항성으로 향하던 두 스님은

어느날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원효는 잠결에 목말라 주변을 뒤척이다 물에 담긴 바가지가 있어서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원효>아. 그 물 참 달고 시원하다

 

하고 좋아하며 다시 잠에 들었고

다음날 일어나서 주변을 보니

동굴은 파헤쳐진 무덤이었고

그가 마셨던 것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습니다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

 

사실을 알게되자 원효는

구토를 했는데

모르고 마실때는 썩은 물도 달게 마셨다는 것을 알고

결국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라는 깨달음을 얻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펼치려 합니다

 

이에 원효와 뜻이 달랐던 의상은

홀라 당나라로 유학가게 됬고

의상 역시 자신만의 방법으로 당나라에서 선진 불교를 배워

신라에 불교의 가르침을 정해

의상과 원효 두 스님은 신라의 스승이자 큰 승려가 되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두 노인' 의 역사버전으로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나려는 두 노인 중

가르침을 얻기 위해 돈을 모아

계획한대로 직진해 성지순례를 가는 노인[체험을 중시 , 의상]과

 

순례를 가는 도중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성지 순례를 포기하고 성지순례비를 사용해 그들을

돕는 노인[마음을 중시 , 원효] 하는 노인 중

우리 앞의 이웃 ,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노인이 사실 진정한 성지순례를 한 것이라는

교훈을 남긴 것이 생각납니다)

 

원효는 해골물 이야기처럼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백성들과 어울리며 백성들에게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으며

참 다른 스님들과 다른 방식으로 스님으로 활동했고

여러 설법을 남겼습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어느날 원효는 거리에서 노래부르기를

 

<원효>누가 자루빠진 도끼(도끼자국=여성의 생식기를 상징) 를 내게 다오

큰 나무(남성 생식기를 상징)를 찍어 하늘을 받치겠네 !

 

하고 노래부르자

이상야릇한 뜻의 노래에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는 모르나

노래를 부를 수록 흥이나서

서라벌 아이들은 앞다투어

목청을 높여 이 노래를 부르며 서라벌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서라벌 복원도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자

야릇한 그 뜻을 눈치챈 서라벌 어른들은 빙그레 웃거나

배꼽을 잡고 웃어 넘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원효가 지은 노래의 뜻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는데

태종 무열왕은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태종 무열왕>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고

 

원효대사의 장인어른 태종 무열왕

 

태종 무열왕은 평소 원효가 워낙 박식하고 뛰어났기에

자주 불러 조언을 구하는 까닭에 인연도 깊었고

결혼한지 3일만에 전쟁터에서 전사한 남편으로

요석궁에서 과부가 되어 홀로사는 자신의 딸 , 요석공주를

원효에게 시집보내려 합니다

 

태종 무열왕은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게했고

마침 원효스님이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는데

원효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있었기에

일부로 발을 헛디딘척 문천교 아래 냇물에 풍덩 빠졌고

관리는 원효를 궁에 인도해서 옷을 벗어 말리게 했습니다

 

경주 월정교(문천교)

 

이로인해 원효는 궁에 묵게 되었고

태종 무열왕은 온몸이 물에 젖은 원효를 보고 크게 놀라며

요석공주를 불러 원효대사를 모시고가서

물에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저녁상을 잘 차려 뫼시라 명했습니다

 

원효대사를 안은 요석공주

 

원효 역시 요석공주의 아리따움에 현혹되어

불심도 저버리고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되었고

3일동안의 짧은 신혼생활이었지만

과연 요석공주가 태기가 있어

원효스님의 아들 , 설총을 낳았습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파계승]

원효는 임신한 요석공주를 뒤로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요석궁을 떠나게 되었고

 

이전까지 기행을 일삼던 원효대사였지만

설총을 낳고부터는 완전히

실계 失戒 (경계를 잃음 , 요즘말로 선을 넘는게 아니라 선이 없음)

해버려 파계승(계법을 어겨 지키지 아니한 스님) 이 되어

아예 스님의 옷을 던지고 일반사람들의 옷으로 바꾸어 입었고

머리도 길르고 술도 마셨고

 

우연히 광대들이 괴상한 호리병 박을 들고다니며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노래를 짓고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닙니다

 

원효 무애춤을 시연하는 도각스님 , 한국불교

 

원효는 백성들에게 어려운 불경을 쉽게 알려주기 위해

직접 무애가라는 노래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백성들을 교화하고 불법을 세상에 퍼트렸고

이로인해 신라는 불교가 퍼지게 됩니다

 

일반적인 스님들은 절에 있고

사람들은 스님들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절에 찾아갔던 것과 달리

원효는 민중속에 함께 있었고

원효대사의 불교를 가르치기 위한 노래와 춤 , 그리고

쉬운설명에

누구나 쉽게 불교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길위의 스님

 

원효대사는 호리병박을 어루만지면서

저잣거리에서 무애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밭가는 늙은이들까지 이 노래를 본받아 부르며 놀았습니다

 

<원효대사의 무애가>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만이 一切無碍人(일체무애인)

한길로 생사의 번뇌를 벗어날 수 있으리 一道出生死(일도출생사)

 

조선 왕실 궁중무악으로 발전한 원효의 무애가와 무애무

 

[나무아비타불]

원효대사는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리며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고

원효대사는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이라는

염불(부처의 모습을 생각하며 아미타불을 부르는 일)을 창시합니다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누구나 원효대사를 따라

말끝마다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쳤고

그 뜻은 '아미타 부처께 귀의합니다' 라는 뜻이었는데

오랜 삼국의 전쟁에 지친 신라백성들은 그 뜻마저 정확히 몰랐음에도

그 말이 평화와 안식을 가져온다 여기고

따라 염불했습니다

 

이로인해 신라에서는

움막속의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불법을 알게 됩니다

 

그는 항상 알기쉽게 불교를 풀이하며 대중화에 힘썼지만

당대 신라에서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는

신라의 명승 중의 명승이자

그의 논문은 당대 최고의 불교 논문으로서

그의 이름은 중국 ,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고

원효대사는 성사 , 성스러운 스승이라 불린

신라 최고 지식인이자 한국사의 천재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일본 교토 고잔지의 원효대사 초상화

 

그의 아들 설총 역시 그런 아버지를 가까히 하지는 못하면서도 크게 존경했고

아버지를 따라 신라의 큰 성현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대성]

통일신라 시대에도

신라 불교는 더욱 화려하고 거대하게 이어졌고

 

모량리에서는 가난한 여인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남자아이가 태어나자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편해 마치 성과 같아

이름을 김대성이라 지었습니다

 

김대성 표준 영정

 

김대성의 집에서는 가난하여 대성을 키우는 것이 불가능해서

부자인 복안의 집에서 밭 약간을 밭고 품팔이를 했습니다

 

그때 고승이 나타나

 

<고승>하나를 보시하여 만배를 얻을 것이고

안락하며 수명이 장수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대성은 그것을 듣고

어머니에게 돌아가서

 

<김대성>제가 문에서 스님이 외우고 노래하는 것을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지난 세상에서 닦은 착한 행실이 없어

지금 이로 인하여 모자란 것인데

지금 또 보시하지 않으면 내세에 어려움을 얻을 것입니다

제 품팔이 밭을 법회에 보시하여

뒷날의 응보를 도모함이 어떻습니까 ?

 

이에 어머니는

 

<김대성의 어머니>좋다

 

하여 밭을 고승에게 보시했습니다

 

[재상 집에서 태어난 김대성]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성은 살해당했는데

이날 밤 신라 재상 김문량의 집의 하늘에서 소리침이 있어 이르기를

 

<하늘>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있어

지금 너의 집에 의탁한다

 

했고

김문량 집 사람들은 놀라서 모량리를 조사해보니

과연 대성이 죽어있었는데 그날 하늘이 소리친날과 같았습니다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이가 태어났는데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일주일만에 펼쳤고

금으로 만든 간자(점대) 있어

대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를 이름으로 했고

살해당한 대성의 어머니를 맞이해서 집에서 함께 봉양했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집 아들 대성은

보시한 이후

죽어 재상의 집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곰 귀신과 장수사]

대성은 장성해서 사냥을 좋아했는데

토함산에 올라 곰한마리를 잡고

 

 

산밑에 길에서 잤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말하기를

 

<곰 귀신>너는 어찌 나를 살해하였는가 ?

내가 도리어 너를 먹겠다

 

했고 대성은 부끄럽고 두려워 용서하기 청했고

곰 귀신은

 

<곰 귀신>네가 나를 위해 절을 창건할 수 있겠느냐 ?

 

했고 대성은 맹세하며

 

<김대성>그렇게 하겠다

 

했습니다

이윽고 대성이 꿈에서 깨니 땀이 이불을 적셨고

그뒤로 대성은 사냥을 금하고

금을 위해 곰을 잡은땅에 장수사를 창건합니다

 

[불국사와 석굴암]

이에 깨달은 바가 있던 김대성은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고

현생의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불사(석굴암) 을 창건하여

거대한 불상을 설치합니다

 

경주 불국사 , 한국의 문화유산

 

불국사 복원도 , 물이 흐름

 

<삼국유사 일연>이로서 김대성은 부모님에게 양육한 노고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날에도 또한 듣기 드물었다

 

착하게 베푼 효과로 가히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김대성은 석굴암의 석불을 조각하려

큰 돌 하나를 만들려 하는데

돌이 갑자기 셋으로 깨졌고

빡친 김대성은 분노해서 아무렇게나 잠들었습니다

 

그때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고는 돌아갔습니다 (거의 톨스토이 소설 머슴 에밀리안과 빈북 급)

 

신라와 한국 문화의 정수 석굴암

 

대성은 잠자다 일어나 남쪽 고개로 쫓아가

향나무를 불에 태워 천신에게 바쳤고

이에 그 땅을 향령이라 했습니다

 

김대성이 세운 불국사의 사다리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새긴 업적이

경주의 여러 사찰 중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습니다

 

<일연의 김대성 찬양>

모량의 봄이 지나 세 땅을 보시하니

향령에 가을이 들자 만금을 얻었네

어머니는 오랜 세월 가난과 부귀를 누렸으니

괴정(재상 , =김대성)은 한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일세

 

이로인해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이자 한국 문화유산

불국사와 석굴암이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아사달과 아사녀]

신라에서 불국사 건축이 이뤄지고 있을때

김대성은 석가탑을 만들기 위해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 후손 아사달을 서라벌로 불러

불국사 3층 석탑 , 석가탑을 만들게 합니다

 

불국사의 다보탑(왼쪽) 과 석가탑(오른쪽)

 

아사달이 탑을 만드는데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3년이 흘렀고

고향을 떠나 아사달은 석탑 만들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는데

 

아사녀는 아사달이 돌아오지 않자

그를 보기위해 서라벌로 떠났습니다

 

아사달과 아사녀

 

아사녀는 기다리다못해 불국사로 찾아왔는데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불국사 문앞에서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싶어합니다

 

아사녀를 불쌍히 본 스님은

 

<스님>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다음날부터 아사녀는 못에 나가

하루종일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추기를 기다렸지만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력도 잃고

남편 아사달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뒤늦게 탑을 완성한 아사들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한걸음에 못에 달려왔지만

아사녀가 죽은 뒤였습니다

 

아사달은 죽은 아내 아사녀를 그리워하며 못을 방황하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 바윗돌에 겹쳐져

웃는듯하다 사라지고

또 웃는 모습이 인자한 부처님같이 되었기에

 

아사달은 괴로움과 혼란속에서

커다란 바위에 아사녀의 모습을 새기었습니다

 

아사달이 아사녀를 위해 조각한 영지석불좌상

 

아사녀의 조각상이 만들어지자

아사녀의 모습은 점차 자비로운 미소를 담은 부처상이 되어갔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 못을 그림자 연못 , 영지라 부르고

그림자를 끝내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그림자 없는 탑 , 무영탑이라 불렀습니다

 

불국 영지

 

아사달 아사녀 전설을 기반으로 쓴 민족소설 현진건의 '무영탑'

 

[인도에 간 혜초스님]

통일신라 시대

신라인들의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 역시 컸고

신라 승려 혜초는 직접 당나라를 거쳐 천축국 , 인도에 다녀오고

여행기를 남겼습니다

 

혜초스님의 모습 복원도

 

혜초의 여정

 

그의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중국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

고대의 동서교류사 연구에서 귀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왕오천축국전

 

[군자의 나라]

신라는 건국시기부터 두 사람의 성인이라 불린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와

알영 왕비가 나라를 세운 것이었고

예절과 덕을 중요시한 나라였습니다

 

혁거세왕과 알영왕비 , 두 사람의 성인

 

비록 고구려 , 백제보다 동남쪽 변두리에 위치해

문물 발달도 늦었고 선진화도 늦은 나라가 신라였지만

강력하거나 부유했음에도 지배층 , 피지배층간에 분쟁이 잦았던

고구려 , 백제와 달리

예절과 덕성이 강한 신라는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화합이 잘되서

 

(단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 이고 통일신라때부터는

평화기가 도래하자 다시 신분제인 골품제의 한계가 부각되어 멸망)

 

이로 인해 삼국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아

끝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고

이런 경향으로 인해 신라는 '군자의 나라' 라 불렸습니다

 

<삼국사기 효성왕중 당현종의 발언>

신라는 '군자의 나라' 라고 불리우나니

책과 글에 조예가 상당히 깊어서

우리 중국과 비슷하다

 

新羅號爲君子之國 (신라호위군자지국)

 

이로인해 신라는

불교나 도교 이외에도

유교 문화도 크게 발전했고

당시에는 동아시아에 불교가 대세였기에

신라는 불교 중심의 나라였지만

유학 연구도 활발했고

이후 점차 유교가 성리학으로 발전하며

한국은 고려 , 조선시대대부터 본격적인 유교국가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의 유학자들

 

[머리에 뿔이 있던 강수]

신라대에 강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꿈에 뿔이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더니

머리 뒤에 뼈가 뿔처럼 불쑥 나와있는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뿔몬이었던 강수형님ㅠㅠ

 

강수 영정

 

강수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강수의 아버지>이 아들은 보통 아이가 아니니

잘 길러 앞으로 나라의 재목으로 만들자

 

고 했고

강수는 나이가 들자 저절로 책을 읽을줄 알아

의리에 통달합니다

 

이에 강수 아버지는

 

<강수의 아버지>너는 불교를 배우겠느냐

유교를 배우겠느냐 ?

 

라고 강수의 뜻을 물었고

강수는

 

<강수>제가 들으니 불교는 세속을 도외시한 가르침인데

저는 인간세계의 사람으로서

어찌 부처가 하는 것을 배우겠습니까 ?

유교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강수의 아버지>네가 좋은 대로 하라 !

 

라고 했습니다

 

[조강지처]

강수는 열심히 공부했는데

들은 바는 비록 낮고 비근해도(가깝고 흔하다)

얻은 바는 높고 깊어서

우뚝 솟은 당시의 인걸(뛰어난 인재) 이 되었습니다

 

이에 강수는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강수는 출세하기 이전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의 딸과 야합(혼인하지않고 남녀가 관계를 맺음) 했는데

서로 사이가 자못 좋았고

 

출세한 강수가 20세가 되자

강수의 부모는 중매를 통해

고을의 용모와 덕행있는 여인과 결혼시키려 하니

강수는 사양하여 다시 장가들 수 없다 했습니다

 

강수의 아버지는 성내며 말하기를

 

<강수의 아버지>너는 이름난 사람이어서

나라 사람이 모르는 이 없는데

미천한 자(대장장이 딸)를 짝으로 삼으니

또한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

 

라 하니

강수가 두번 절하며 말했습니다

 

<강수>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음이

실로 부끄러운 바입니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

 

'조강지처(술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을만큼 몹시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 고생한 아내) 는

뜰 아래에 내려오지 않게 하며 (손에 물도 묻히지 않게

고생시키면 안된다는 의미)

가난하고 천할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

 

라고 했으니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어려운 시절 함께 고생한 아내 '조강지처'

 

술만드고 남은 곡식 찌꺼기인 술지게미 , 한국에서는 먹을것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은 음식아닌 음식이었습니다

 

[신라 문장가 강수]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자

당나라 사신이 와서

당황제의 조서를 전했는데

 

그 글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태종 무열왕이 강수를 불러 그 뜻을 물으니

강수가 왕의 앞에서 한번 보고는

해석하는데 막힘이 없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로 늦게 만남을 한스러이 여겼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강수로 하여금

당황제에 조서에 감사하다는 답서를 쓰게했는데

글이 잘되고 뜻을 다폈기에

태종 무열왕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강수는 일찍이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

집이 가난했으나 즐거워했고

태종 무열왕은 담당 관청에 명해

강수에게 해마다 조 100섬을 주게했습니다

 

문무왕은 강수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문무왕>강수는 문장을 잘지어

능히 중국과 고구려 , 백제 두나라에

편지로 뜻을 다 전하였으므로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선왕(태종 무열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 하나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니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

 

그렇게 신라 장군 김유신이 무력으로 삼국통일전쟁에서 활약할때

신라 지식인 강수는 뛰어난 문장으로 국제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은

신라의 명문장가였습니다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강수

 

[부창부수]

신문왕대 강수가죽자

신문왕은 강수집안에 물품을 더욱 많이 주었는데

강수의 아내는 물품을 모두 절에 바치고

식량이 궁핍해져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에 신문왕이 조 100섬을 내리려 했지만

강수의 아내는 사양하며

 

<강수의 아내>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으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는데

지금 이미 홀로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듭 후한 하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라 말하고 끝내 받지 않고 돌아갑니다

 

신라에서 문장으로는 강수가

가장 유명했습니다

 

[설총과 이두]

한편 위에서 쓴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 역시

호부호자 , 호랑이 아버지에 호랑이 아들답게

신라의 대유학자가 되었는데

원효의 성이 설씨였기에 이름은 총으로서 설총이었고

그는 일찍 아버지 원효대사가 방랑했기에

어머니 요석공주와 자라며 성장했고

 

설총은 총명하고 예민해서

배우지 않고도 도술을 알며

한국 고유어로서 우리말로 쉽게 풀이해 한자경전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이후까지도 학자들이 그를 높게 받들었습니다

 

설총 영정

 

설총이 만든 이두라는 우리말 한자표기방식은

조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 한글을 발명하시기 전까지 이어져

한국의 고유 발음 표기방식이 되었습니다

 

한문의 한국식 표기인 이두문자 , 세종대왕이 없었으면 아직도 한자나 영어 , 로마자로 한국어를 표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세종대왕의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상소에 대한 분노>

설총이나 나나 백성을 편하게 하자는 것인데 ,

너는 감히 설총은 옳고 임금은 그르다고 하느냐 !!!!!

 

[화왕계]

신라 신문왕이 한여름 5월 어느날 설총에게

심심해서 말했습니다

 

<신문왕>오늘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그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니

비록 좋은 반찬과 애처로운 음악이 있더라도

고상한 말과 좋은 웃음거리로서 울적한 회포를 푸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대는 틀림없이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나를 위해서 이야기 해주지 않겠는가 ?

 

이에 설총은

 

<설총>예 ,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이 들으니 옛날 화왕(꽃의 왕 , 모란꽃) 이 처음 왔을때

이를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비취색 장막을 둘러 보호하자

봄 내내 그 색깔의 고움을 발산하니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자신을 과보호 해달라하는 자뻑있는 장미와 비슷)

 

꽃의 왕이라 불리는 모란꽃

 

이에 꽃의 왕(화왕 , 모란꽃)을 알현하려 하며

가깝고 먼곳에서 정령이나 고운 꽃들이 찾아와

자기가 뒤쳐질까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아리따운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붉은 얼굴에 옥같이 하얀치아 ,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예쁜옷을 입고 하늘거리며 와서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습니다

 

<아리따운 여인>첩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봄비에 목욕을 하여 때를 벗기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스스로 즐기는

그 이름 '장미' 라고 하는데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속에서 잠자리에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

 

아름다움과 매혹의 상징 장미꽃

 

또 한 대장부가

베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고

흰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노쇠하여 비틀거리며

굽어진 허리로 걸어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장부>저는 서울 성 밖의

큰 길가에 살면서

아래로는 넓은 들 경치를 바라보고

위로는 뾰죽히 높다란 산에 기대어 사는

그이름 백두옹(할미꽃) 이라 합니다

 

꼬부랑 할머니처럼 초라한 모습이며 독초이기도 하지만 약으로 쓰이는 할미꽃

 

저가 생각하옵건대

좌우에서 공급하는 것이 비록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옷장에 옷을 가득 저장을 하고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귀한 실이 있더라도

띠풀같은 천한 물건을 버릴 수 없다 하기에

 

무릇 모든 군자는 모자람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였습니다

왕께서도 또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화왕계 , 겉의 화려함 VS 내면

 

그때 또 어느 사람이 화왕에게 와서 말하기를

 

<어느 사람>두 사람(장미 여인 , 할미꽃 대장부)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

 

했고

결국 화왕이 말하기를

 

<화왕>장부의 말에도 합당한 것이 있으나

아름다운 사람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 어떻게 함이 좋을까

 

하니

장부가 와서 말했습니다

 

<대장부>저는 왕께서 총명하셔서 이치와 옳은 것을 알것으로 생각하여서

왔을 따름입니다

이제 보니 (장미에 미혹되는 것을 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무릇 임금된 자가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히 하고

정직한 사람을 멀리하지 않음이 드뭅니다

 

이런 까닦에

맹가가 불우하게 몸을 마쳤고

풍당은 낮은 낭중 벼슬에 묶여 늙었습니다

 

옛부터 이러하니 저인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

 

화왕이 말하기를

 

<화왕>내가 잘못하였구나 !

내가 잘못하였구나 !

 

하였답니다

 

설총의 꽃의 왕 이야기(화왕계) 를 들은

신문왕은 설총의 뜻을 파악하고는

슬픈 얼굴빛을 지으며 말하기를

 

<신문왕>그대의 우화속에는

실로 깊은 뜻 (화려한 겉보다는 속 , 내면을 보라) 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써서

임금된 자의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

 

하고는 설총을 발탁해 높은 벼슬을 주었습니다

 

[신라의 도교]

이외에도 도교가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유교 , 불교 , 도교를

유불도라 부르며 같이 중요시하고 있으나

도교는 유교나 불교처럼 경전이나 조직이 체계화된다기 보다는

자연속에서 자연스럽게 지내는 것을 중요시하기에

구체적인 감이 없는 면도 있고

 

특히 신라의 경우는 사신도를 그리거나 봉황을 조각한 고구려 , 백제와 달리

이런 경향이 더 적어서

유교와 불교에 비해 뚜렷한 종교로 인식하지는 않고

호기심으로 연구되거나 천신이 된 김유신 , 해룡이 된 문무왕 등 특정인물을

미화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문무대왕릉 해룡일출제

 

평화를 불러온다는 신라의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

 

[풍수지리설]

신라 말기의 경우에는

신라 중앙정부가 혼탁해지고 사치에 물들며

잦은 왕위다툼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점차 신라 종교 , 신라 불교는

연구 , 교리 중심의 고종에서

현실 , 체험 중심의 선종으로 바뀌며

새로운 문화사조가 들어왔고

 

도선대사와 함께

대표적인 도교사상인 '풍수지리설' 이 한국에 들어옵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이자 고려 태조왕건의 스승이었던 도선대사

 

풍수지리설이란 명당의 개념을 도입해

좋은 터에 자리를 잡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으로

고려시대대부터 유행해

기존 수도가 아닌 새로운 수도인

개성이나 한양에 자리잡은 고려 , 조선 정부의 건국대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배산임수(강과 산 사이에 자리잡으랑께) , 명당개념이 있는 풍수지리설

 

[풍류 문화]

이외에도 신라에서는

이런 유불도사상을 모두 혼합한

한국 고유의 문화인 풍류문화가 나타났으며

젊은 신라 청소년 집단인 '화랑' 들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신라인들은

노래와 춤을 추며 자연과 더불어 이런 풍류 문화를 즐겼습니다

 

신라 고취대 재현 모습 , 풍류란 특정지어 말하기 어렵고 자연과 어울림 혹은 멋을 아는것과 음악 등 여러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한국식 스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모쓰지의 고대방식으로 유상곡수(물위에 술잔을 띄워 꺼내 마시는 것) 하는 모습 , 일본 고대문화가 한국 판박이니 신라 지배층들 역시 포석정에서 이런식으로 놀았을 것입니다

 

풍류사상은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한국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화려한 기교를 부리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의 어우러짐 , 소박함 , 검소하지만

그 속에서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중요시했습니다

 

<라봉봉>종교와 사상이란 참 어려운듯하면서도

어찌보면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인 이야기도 많고

우리 삶을 좋은 곳으로 이끄는데 도움을 주는

현인들의 생각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가히 철학과 사상의 나라라 할 수 있을정도로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많이 나온나라였고

이런 스마트함은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먼저 원효대사의 경우

지금 보기에도 참 파격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 인물인데

실제 부처님 , 석가모니와 가장 닮은 한국 승려가 

오히려 원효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처님 역시 출가전 결혼을해서 라훌라라는 아이를 낳았고

오랜 단식과 고행끝에 자신을 괴롭히는 극단적 고행들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시고서는

다시 음식을 드셨고

부처님 역시 살생은 피하시되

공양을 받으시며 오늘날 승려들처럼

채식만 하는것이 아닌

주는대로 드셨던 인물로서

채식과 육식의 외면적인 문제가 아닌

깨끗한 마음으로 먹는 것을 중요시 여긴 인물이었고

 

원효대사의 기행은 승려세계에서는 어려운 모습이지만

일반인 기준에서는 나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기도 하며

그의 뛰어난 학식은 당대 따라올 스님이 없기도 했기에

참 부처님과 닮아있는 한국 고승중의 고승이었다 생각됩니다

 

또한 강수라는 인물 역시 한국 , 신라 유학계의 근본 인물로서 참 마음에 드는 인물인데

조선이 고리타분한 성리학때문에 망했다는 등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등

성리학과 유교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 유교의 가치를 모르고 하는 발언이며

옛날 지식인 , 사람들은 당대의 한계나 시대성은 있었을지언정

그렇게 ㅄ가 아니었습니다

 

정작 유교에서는 남녀간의 순정과 의리를 매우 중요시여기는데

왜 유교를 까면서 막장 , 불륜드라마가 흥행하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상할 뿐입니다

 

저는 오히려 유교정신이 있어야

이 사회가 더 올바르게 움직일 수 있다 생각되는 사람이고

조강지처 , 부창부수 , 효도 정신 , 이웃사랑 등

좋은 유교적 가치가 그저 고리타분한 꼰대사상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로 공격당하며

한국사회에서 사라져가고있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꼭 못배워먹은 녀석들이

유교를 그저 제사지내고 향피우고 엣헴거리는 이미지만 만들어내지만

진정한 한국의 유학자 , 선비들은

불교의 사상적인 면에서 나와

현실 참여 , 개혁적 이유로 유교를 공부한 것이었으며

의로운 일을 행하고 실천하는데 앞장서 자신들의 이름을 남겼지

 

오히려 유교를 공부하지 않은 자들이나

그저 과시의 목적등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죽은 조상묘나 제사일에 열중했을뿐입니다

 

도교나 풍류사상 역시

참 아름다운 사상이었으며

이런 유불도사상은 한국에서 크게 발전해

작은 나라였음에도 중국과 일본 , 외국인들이 동경한

사상과 지식인들의 나라가 신라이자 한국이었습니다

 

이런 한국의 올바른 사상과 정신 , 전통들이

스러져가지 않도록

우리 후손들이 전통을 보존하고 노력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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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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