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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호국스님 사명대사]

[총명한 스님]

[사명대사 VS 서산대사]

[참스승 서산대사]

[상동암의 돈오]

[호국불교]

[승군을 이끌다]

[조선의 보배]

[일본에 들어가다]

[병풍을 외우다]

[조선의 생불]

[조선 포로들을 구출하다]

<라봉봉>

 

사명대사

 

[호국스님 사명대사]

사명대사는 조선 중기의 덕망있는 뛰어난 승려였으며

임진왜란시기 일본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한

호국스님이자 임진왜란 종결 이후

일본 지배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설득해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해오고 임진왜란 이후 200년간의 한일평화관계를 정립하고 온

한국의 위인입니다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이고

당호는 사명당으로서

존경하는 뜻을 담아 오늘날

사명대사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총명한 스님]

사명대사는 1544년(중종 39년) 10월 7일

경상도 밀양군에서

풍천임씨가문으로 태어났습니다

 

밀양 사명대사생가지

 

사명대사는 어렸을때부터 총명했는데

7살때부터 한학(한자)을 배워

13세때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했습니다

 

사명대사는 13세때 황악산 황유촌 문하에서

맹자를 배우다

 

'세속의 학문은 저속하다'

 

라고 탄식하며

불가로 귀의해 스님이 되었습니다

 

총명했던 사명대사는

1561년 (명종 16년)

18세의 나이에 승과에 합격했습니다

 

사명대사는 일찍 급제한 영예를 입었지만

자만하거나 게으름 없이 수행에 정진해

주변사람들에서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명대사 VS 서산대사]

1572년(선조 8년)

32세의 사명대사는 선종의 주지로 추대되었지만

원래 권력에 자리에 욕심없던 사명대사는 사양하고

평소 늘 흠모하던 서산대사를 찾아 묘향산으로 갔습니다

 

서산대사 휴정

 

한국의 위인 사명대사 유정 ,

사명대사보다 23살이나 많았던 평생의 스승이자

사명대사와 함께 임진왜란때 활약한 호국스님 서산대사 휴정 ,

 

이둘의 첫 만남은 남달랐습니다

사명대사는 당대 가장 뛰어난 스님이었던

서산대사를 만나는 마음에 기뻤지만

 

초딩들이

호랑이 VS 사자나

엄마 VS 아빠

누가 이길까 시뮬레이션을 하듯이

 

비슷한 사자성어 용과 호랑이의 대결 '용호상박'

 

당대 조선에도 이름난 스님이었던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중

누가 더 도술이 높다거나 아래라던가 하는 소문 , 풍문들이 퍼지고 있었고

 

이에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와 도술 실력을 겨뤄보기로 결심합니다

 

사명대사가 서산대사가 있는 법당을 찾아가자

마침 서산대사가 법당문을 나오려 하고 있었습니다

 

사명대사는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공중에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를 잡아 쥐고서는 첫 말문을 열었습니다

 

<사명대사>대사님 , 내 손아귀에 있는 이 참새가 죽을까요 , 살까요 ?

 

스님의 손에서 아침식사하는 참새 , 전남 구례군 화엄사

 

사명대사의 손안에 있는 새였기에

새가 죽고 사는 것은 사명대사에게 달려있는 것이었고

만약 서산대사가 살것이라 말하면 새는 죽고

죽을 것이라 말하면 새는 살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답도 찾기 어려운 질문에

법당 문을 나오던 서산대사는 태연하게

 

<서산대사>허허 사명대사 ,

이 몸의 발이 지금 한 발은 법당 안에 있고 ,

한 발은 법당 밖에 있는데

이 몸이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 안으로 들어오겠습니까 ?

 

던질까 말까 VS 나갈까 말까

 

서산대사가 역시 난처한 질문으로 되치기를 시전하자

사명대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멀리서 손님이 오는데 밖으로 오는게 당연하다 생각해서 대답합니다

 

<사명대사>그야 밖으로 나오시겠지요

 

이에 서산대사는

 

<서산대사>과연 그렇소 , 사명당이 그 먼길을 한달음에 오셨는데

어찌 문밖에 나가 영접치 않겠소

 

서산대사는 사명대사에게 얼른 법당으로 올라올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참새를 쥐고있던 사명대사는

 

<사명대사>고맙소이다 대사님 ,

그런데 이 참새는 어찌 되겠습니까 ?

 

이에 서산대사는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서산대사>불도를 닦는 분이 어찌 살생을 하겠습니까 ?

 

당대 두 고승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됬습니다

 

같이 모셔져 있는 서산대사(왼쪽) 와 사명대사 진영

 

[참스승 서산대사]

그럼에도 사명대사는 서산대사를 굴복시키려 했고

도술로 겨루자 제안합니다

 

사명대사가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보자

구름 한 점 없던 장안사 상공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뒤덮이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서산대사>사명대사 , 과연 훌륭한 신술이오

 

이쯤되면 서산대사가 굴복할 거 같아

사명대사는 내심 기뻐 헛기침을 했습니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사명처럼 합장한채 하늘을 우러러보니

줄기차게 퍼붓던 비가 하늘로 거슬러 올라갔고

한참을 오르던 비는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새로 변해 날아가며

청명한 천지에는 새의 노래와 환희로 가득찼습니다

 

조선 중기 화조화 , 조속 작품

 

가슴 조이던 사명대사는 이 변화무쌍한 광경에 자신의 모자람을 깨달았습니다

 

<사명대사>대사님 ! 진작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과연 만천하의 스승이옵니다.

부끄러운 몸이나 저를 제자로 삼아

법도에 이르도록 가르침을 내려 주옵소서 !!

 

사명대사는 눈물흘리며 제자되기를 간청했습니다

마음이 흡족해진 서산대사는

 

<서산대사>진정 그러하시다면 나 또한 즐겁지 않을 수 없오

그대같이 슬기로운 제자를 맞게 되니 더없이 기쁘구려

 

이후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3년동안 수행해서 정법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에게 평소의 의문을 토로했고

서산대사는 제자에게 깊은 지식과 지혜를 알려주었습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공부하며

이제까지 공부한 번잡스러운 글들이

겨우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었을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불교 표현인 견월망지 見月亡指 ,

달을 가르키는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겉이 아닌 본질을 보라])

 

[상동암의 돈오]

사명대사는 팔공산 , 금강산 , 청량산 , 태백산 등을 다니며

선을 닦았고

1586년

사명대사는

43세 나이로 옥천 상동암에서 머물때

하룻밤 소나기에 떨어진 꽃을 보고

티끌같은 세상 , 이슬같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오랫동안 참선에 들어

깨달음(돈오) 을 얻었습니다

 

<사명대사>부처는 내 속에 있는데 어찌 밖으로 구하여 치닫는가 ?

 

 

[호국불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는 왜장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문화재 약탈군을 만나

영동지방의 9개군을 재난에서 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날이갈수록 심해져

멀리서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이 올라오자

사명대사 역시 영정사(밀양 표충사) 에 의승병 훈련소를 설치하고

사자평에서 의승병을 훈련시킵니다

 

밀양 표충사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지하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대부터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보위해야 한다는

 

'호국불교'

 

사상으로 인해

스님들이 교리를 어기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앞장서서 나섰고

승병이 되어 외세를 물리쳤습니다

 

(단 방어전쟁에만 나섰고 정복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음)

 

고려의 대몽항쟁 당시 승장 김윤후

 

[승군을 이끌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군들이 한국 국토를 유린하자

사명대사는 전국 사원에 격문을 보냈습니다

 

<사명대사>우리가 편히 살 수 있는 것이 모두 나라의 은덕인데

어떻게 앉아서 참을 것인가 ?

이제 침략의 무리를 몰아내는 것이 보다 큰 자비의 실현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

 

사명대사는 수백 승병으로 서산대사 휘하로 들어가

수천 승군을 통솔했습니다

 

승군을 지휘하는 휴정(서산대사) , 박광진(1976년)

 

임진왜란 지도

 

사명대사는 게릴라전으로

평양과 중구 사이의 왜군의 후방연락과 보급로 차단하고

모란봉에서 싸워 평양성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의승군(스님들로 구성된 의병)의 활약에

관군들도 점차 힘을 얻어갔습니다

 

이에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 ,

사명대사는 수락산전투에서 크게 이겨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수도 서울(한양)을 탈환했습니다

 

[조선의 보배]

사명대사는

1594년 4월부터 몇차례동안 왜장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을 찾아가

회담하고 정탐하고 왔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기세등등한 가등청정은

자신의 진으로 몸소 찾아온 사명대사의 이름은 널리 들었기에

사명대사에게 종이와 부채를 건내며

휘호를 청했습니다

 

이에 사명대사는 친절하게 글을 써주었습니다

 

<사명대사>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말라 ,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

참으로 자기 물건이 아니면 털 한올이라도 취하지 말라

 

라 써주었습니다

 

어서 빨리 조선에서 물러나라는 비유적 표현이었고

깜짝 놀란 가등청정은 탐욕스러운 눈으로

사명대사에게 물었습니다

 

<가등청정>조선의 귀중한 보물이 있느냐 ?

 

사명대사는 소리 높여 대답합니다

 

<사명대사>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고

귀한 보물은 일본에 있다

 

이에 가등청정은 의아하게 여기며

 

<가등청정>무슨 말입니까 ?

 

이에 사명대사는

 

<사명대사>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가장 귀한 보물로 보고

모두 노리고 있으므로

보배가 일본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간담이 서늘해진 가등청정은 깜짝 놀라면서

사명대사의 법력과 애국정신에 감탄했고

이로인해 일본군은 사명대사를 지극히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가등청정>적국의 스님이지만

뛰어난 인물이로다..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 , 박서보(1976년)

 

[일본에 들어가다]

임진왜란때는 수많은 한국의 위인들이 활약했고

수많은 이름없는 백성들마저 힘을 모아

의병이 되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이순신 , 권율 , 김시민 , 곽재우 장군같은 뛰어난 장군 외에도

조정에서는 이항복과 이덕형 같은 명신들이 위기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고군분투했고

종교계 역시 사명대사 , 서산대사같은 인물들이 나서

평화를 위한 외교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었기에

결국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으며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군들은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수많은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사명대사는 인질과 조선 보물들을 반환시키고 전후처리를 위해

선조 임금의 국서를 받고 조선 대표로서

1604년 가을 대마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하기 전

대마도의 외로운 산사에서 내리는 가을빗소리를 들으며

근심을 담은 시를 썼습니다

 

<사명대사의 시>

나그네는 밤새 앉아 잠못들고

외로운 절엔 가을 빗소리만

동해물 깊이를 재어보게나

내 근심과 어느 것이 더 깊은지

 

사명대사의 시

 

일본에 들어간 사명대사 , 사명대사행일본지도-제천시 신륵사 벽화

 

[병풍을 외우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 지배자가 되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패한 것을 반성하며

사명대사를 정중히 맞아들였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이전 가등청정의 목 이야기를 들어

사명대사의 인품이 널리 알려져있었고

일본에서 사명대사는 사명대사라는 말보다는

송운대사라 불렸습니다

 

일본 조정에서는 조선의 생불(살아있는 부처) 이

일본에 사신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진짜 생불인지 사명대사를 시험해보려 했습니다

 

사명대사가 일본 항구에 도착해 일본 궁궐로 향하는 길에

1만자가 넘는 글씨가 빼곡히 쓰인 병풍을 쭉 세워놓았고

병풍은 4~5리가 되었습니다

 

왜왕은 사명대사에게 이 글들을 전부 외어보라는 말을 전했고

사명대사는 일본 궁궐에 가면서

병풍에 적힌 글귀들을 읽었는데

굳이 외우려 말을 늦추거나 뒤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 , 표충사

 

일본 에도시대 조선통신사의 행렬

 

궁궐에 도착한 사명대사에게 왜왕은

 

<왜왕>저 병풍에 새겨진 글귀들을 모두 외웠습니까 ?

 

하고 물었고

사명대사는 목청을 가다듬고서는

꼬박 하루가 걸려 모든 병풍의 글귀를 암송했습니다

 

사명대사가 암송을 마치자

이에 왜승 현소는

 

<현소>왜 병풍 두폭의 글귀는 빠뜨리고 외지 않느냐 ?

 

하고 다그쳤습니다

 

이에 사명대사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사명대사>없어서 보지 못한 글귀를 외우라는 것은 억지가 아니오 ?

 

이에 왜왕은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야사지만 쪽바리 수장 인성 ;;)

 

<왜왕>병풍에 분명히 적혀있는 글자가 없다고 생떼를 쓰는데

여봐라 , 어서 가서 그 병풍을 가져오너라 !

 

했고

알고보니 그 병풍의 중간쯤의 두 폭이 바람에 접혀있어

글귀가 눈에 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살아있는 부처 , 생불이라 불렀습니다

 

'조센에서 생불이 오셨다 데스..'

 

[조선의 생불]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목욕탕에 안내했는데

탕 바닥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렸고

사명대사는 태연히 염주를 탕안에 던지자

독사들이 다 도망가서 편안히 목욕을 하고 왔습니다

 

일본의 독사

 

사명대사가 입었던 장삼 , 밀양시립박물관

 

이에 얼굴이 새파래진 왜왕은

신하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왜왕>저 자가 조선의 생불인 것이 틀림 없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 ?

 

머리 좋기로 유명한 한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일본 신하>무슨 수를 쓰더라도 죽여야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신라때 박제상을 쇠판에 태워 죽였듯이

사방이 무쇠로 된 무쇠집을 지어서

그 속에 가두고 불을 때면 아무리 생불이라 하더라도

살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왕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고

즉시 무쇠집을 지어

밤에 사명대사를 모시겠다며 무쇠집에 들여보내고

얼른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왜왕은 곧 무쇠집에 장작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폈습니다

 

<왜왕>생불이 아니라 철불이라도 녹아서

형체도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야

 

사명대사는 무쇠집에 들어가자마자

스승 서산대사가 주었던 부적을 벽에 붙였고

벽에는 얼음 빙 氷 자와 겨울 동 冬 자를 붙이고

명상에 잠겼습니다

 

다음날 아침 무쇠집이 식어 문을 열게했는데

왜왕과 신하들은 모두 기절할듯이 놀랐습니다

 

타죽은줄로만 알았던 사명대사의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고

사방의 벽과 천장에는 얼음이 쌓여있었습니다

 

고드름

 

이에 사명대사는 왜왕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사명대사>내가 듣건대 일본은 섬나라기에

나무가 귀하다고 들었다

아무리 나무가 귀하기로서니

일국의 사신을 이렇게 추운 방에다 얼어 죽게 할 작정인가 ?

 

사명대사와 고드름

 

이에 왜왕과 신하들은

그가 참으로 생불인 것을 알고는

 

<일본인들>아이고 대사님 !

저희가 위대하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하고는 본격적으로 조선-일본의 전후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남긴 유묵들

 

[조선 포로들을 구출하다]

당시 사명대사가 일본에 방문했을때

일본에 억울하게 끌려가 노예가 된 조선 백성들이 많았고

사명대사가 가는길마다 그들의 통곡소리를 들었습니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 포로들 , KBS 역사저널 그날

 

또한 조선보다 기술이 없었던 일본에서는

끌고온 조선인 , 조선인 기술자들을 우대해줬기에

남으려 한 사람들은 일본에 남으려 했었고

 

이로인해 사명대사는 일본에 남을 자 , 조선에 돌아올 자를 선별하며

3000명을 조선으로 쇄환(외국의 동포를 데려오는 것)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명대사는 일본에서도 큰 존경을 받은 한국의 스님이었고

이후 양국관계는 회복되어

조선 통신사(일본에 보내는 조선 공식 사절단) 의 길을 열어

임진왜란 이후부터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근대 전까지

260년간 한일 양국간의 평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

 

조선에 돌아온 사명대사는

1610년 해인사 흥제암에서 67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사명대사>사대가 모여서 된 이몸이 장차 신원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무슨 까닭에 부질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이 허깨비 몸을 수고롭게 하리오

내가 이제 입멸하려 하노라.

 

제자들이 유해를 다비(화장)할때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뻗치고

새들이 올라가가 슬피 지저귀였습니다

 

불교의 다비식(화장)

 

사명대사는 한국의 위인이자

평생을 중생의 안녕과

인류 평화를 위해 산 인물이었습니다

 

사명대사 기적비

 

건봉사 가는길의 사명대사 동상

 

<라봉봉>나름 사명대사의 고드름이야기 같은 전설은

꽤 유명하고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전설로 알고있는데

오늘날은 이런 순박한 야사 , 전설들이 한국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이라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불교를 천시하던 조선시대에도 존경받았던

조선을 대표하는 스님이자

이러한 여러 전설들이 남고 한국 , 일본에서 존경받을 정도로

훌륭한 조선의 스님이었고

 

승려의 몸으로

나라에 위기가 닥치자

몸소 뛰쳐나와 의승이 된 한국의 위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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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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