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개화정책>
[고종의 친정]
[명성황후와 여흥민씨]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고종의 개화정책]
<라봉봉>
[고종의 친정]
그렇게 고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청년이 된 고종 역시 뛰어나지만 고집셌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직접 의기양양하게 국정을 운영해볼 심산이었고
흥선대원군도 초기엔 올바른 선정을 펼치며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극복하고 부패했던 조선을 개혁하며
백성과 양반들의 큰 환영을 받았지만
점차 갈수록 경복궁 공사 , 외세에 대한 극단적 쇄국 정책으로
백성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고
결국 22세의 청년이 된 고종 앞에
더이상 집권할 명분도 떨어지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던 흥선대원군은
최익현 등 사대부들에게 탄핵을 당하며
실각 , 하야하게 됩니다
[명성황후와 여흥민씨]
당시 청년이 된 고종도
독단적으로 계획하며 고집센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벌어지고 있었고
반대로 마누라였던 명성황후와는 사이가 좋아졌는데
친정을 시작한 직후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순종을 낳았고
씨가 귀했던 조선왕실에서
고종은 왕비가 아들을 낳는 적장자 출산이라는 큰 기쁨을 맛보았고
또한 명성황후는 이런 상황에
남편 고종과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이용해
잠자리에서 고종을 꼬득이며 (베개 밑 송사[침대 정치])
자신의 친정가문인 여흥민씨들을에게 온갖 혜택을 뿌리며
흥선대원군 세력을 몰아냈고
결국 흥선대원군은 평생동안 세도정치 , 외척의 발호를 미워하며
며느리도 일부로 안나댈것 같은 여흥민씨 가문에서 고르고 골랐음에도
결국 며느리에 의해 뒷통수를 씨게 맞고
다시금 세도정치가 부활하고(안동김씨에서 여흥민씨로)
흥선대원군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물러나게 됩니다
[운요호 사건]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어나는데
고종의 친정시작 및 명성황후가 순종을 낳은 직후에는
곧바로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침입하는데
이전 미국해군이 일본 앞바다에서 군함을 끌고와
무력시위를 벌였고(페리제독의 쿠로후네 사건)
쇄국정책(나라 문을 닫는 정책) 을 고수하다
미국의 일진짓에 쫄아버린 일본정부는
급하게 미국에 나라 문을 열고
서구식 근대화를 시작했고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곧바로 신식무기를 앞세워
미국에게 배운 일진짓을 그대로 조선에 실행합니다
[강화도 조약]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며
강화도 초지진에 포탄을 쏘며
개 ㅈㄹㅈㄹ을 하자
결국 당황한 조선정부는
1876년
일본정부와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을 체결하는데
이전까지 흥선대원군시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프랑스와 미국의 강화도침략을 겨우 몰아낸 조선이었지만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는
쇄국정책을 고수한 아버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
압도적 무력과 기술의 격차에 이미 개항은 필요불가결한 상황 +
그나마 일본은 푸른눈과 높은 코와 금발이라는 기괴한 백인 양놈들과 달리
같이 똥송한 외모 및 검은머리라는 공통점 겸
고대시대부터 오랫동안 교류해서 서로 양국 통역사도 있고 친숙했기에
이런 여러 상황속에
고종은 결국 나라의 문을 열고
서구화 된 일본과 교류를 시작하는데
문제는 당시 조선정부가 오랫동안
중국 청나라와만 교류하고 있던 상황이라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쇄국정책을 했지만 오랫동안
네덜란드와 교류하며 서양 지식에 밝았던
일본과 달리 서양 및 국제질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조선은
일본 운요호와 서양 무기들에 크게 쫄아서
굴욕적으로 일본에 나라 문을 열게 됩니다
조선이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부산과 인천 , 원산이라는
남부 , 중부 , 북부지방 항구를 개항하는 조약이었지만
그전까지 외국과의 관계는
그저 중국과 조공관계(사대 , 상품을 진상하고 보답품을 받음) ,
일본과 교린관계(왜놈 오랑캐들에게 당근과 채찍)가 전부였던
조선이었고
오랑캐로 무시하던 일본이 힘을 길러
총칼로 조약을 강요하자
굴욕적으로 강화도 조약을 맺은 조선은
또한 사대나 교린이라는 갑을관계가 아닌
양국이 동등한 입장에서의
근대적 조약을 처음 맺은 조선정부였기에
근대적 조약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관세에 대한 규정도 없고
치외법권(외국인에 대한 특혜 ,
일본 상인이 조선에서 살인을 저질로도
조선법 적용을 받지 않아 조선인들이 처리할 수 없음)
등을 허용한
불평등한 조약이었고
당시엔 일본도 막 근대화를 시행하고
오랫동안 조선을 상국으로 모셔왔기에
일본도 강화도조약에 조심스러운 입장이었고
생각보다 조선이 쉽게 따이자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일본은 조심스럽게 야금야금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
일단 아무리 조선 사대부와 지배층들이
국제정세에 어두워도
멀찌감치 일찍이 중국과 일본이 서양인들에게 따였다는 사실을 들어온터라
조선 지배층들도 영원한 초강대국일줄 알았던
중국이 서양 오랑캐들의 신식기술에 아주 손쉽게 함락당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있었고
고종도 그나마 친숙한 일본을 시작으로
점차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실행하려는 마음이었고
나름 고종도 강화도 조약(1876년)을 시작으로 근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고종의 개화정책]
강화도 조약 이후 고종은
양무운동을 시작하며 서구화 , 근대화를 시작한 청나라를 배우기 위해
청나라에 '영선사' 사신단을 파견했고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화 ,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신사유람단(조사 시찰단)' 을 파견합니다
일단 이전부터
천주교 박해 및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백인들과 맞다이를 뜨기도 했고
ㄹㅇ 찐백인들과 다이렉트 교류하기는 부담스러웠던
조선 지배층들은
조선보다 먼저 서양문물을 수용한
중국과 일본을 통해 서양 문물 맛보기를 시작했고
(이로인해 근대화가 더 늦어짐)
하여튼 외국에 나라의 문을 연 고종은
쇄국 , 수구파(옛것을 그대로 지킴)였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반발해
개화(꽃이 피듯 지혜가 열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 정책을 시행했고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개화정책 추진기관을 섪치합니다
통리기무아문은
일반적 개화관청이 아닌
정1품 관청으로
군국기무 ,
즉 군사와 나라 기밀들을 다루고
근대적 내정기구로서
기존 의정부나 삼군부(국방부)를 대체하는 최고위 관청이 되었고
당시 한중일 정치인 , 지배자들은
압도적인 서양의 신기술인 총과 대포에
영원히 세계 1등국가일줄만 알았던
중국 제국이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린 것을 보았기에
가장 시급한 국가정책으로
서양 신무기를 수입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갑자기 안드로메다에서
외계인들이 미국을 침공해
미국을 멸망시켜버리자
충격을 받은 세계 정치인들이
외계인들과 교류하며 필사적으로 외계인들의 신무기를 수입하려 하는 꼴)
고종 역시 마찬가지로
통리기무아문 설치 및
서양식 신식군대인 '별기군' 을 양성합니다
일찍이 서양식 군대로 재편해
오랑캐에서 강대국이 된 일본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고종은
일본 장교를 교관으로 삼아
조선에도 서양식 신식군대를 양성했고
별기군은 일반식 조선 재래식군대와 달리
압도적 고종의 관심 및 지원을 받아
급여 , 의복 등 엄청난 혜택과 대우를 받았고
이런 차별에 불만을 느낀 구식 군인 및 백성들은
별기군을 왜별기 , 왜놈이 키우는 군대라 비꼬았습니다
또한 별기군은 내부에서도 문제가 많았는데
국가의 압도적 혜택을 받는 신식군대답게
양반 자제들이 별기군으로 들어갔고
양반 자제들은 애비 빽을 믿고
장교 , 지휘부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했고
이전까지 대충 애비빽에 따라
신분과 계급이 결정됬던 조선군대와 달리
근대식 군대는 신분이 아닌 철저하게 계급식으로 상명하복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근대적 군대체제를 오냐오냐 곱게 자란 양반 자제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조선군대라고 계급을 무시하고
막나가진 않았지만
조선후기는
안동김씨의 오랜 세도정치로
양반들도 부패해서
군대도 신분으로 돌아가는 개막장이 되버린 상황이었음)
하여튼 이런 것들은
나름 고종의 근대화의 일환이었고
결국 고종은 일본 이후에도 계속 타국과 개항을 시작해
1882년은 미국 ,
1883년은 영국 ,
1884년은 러시아 ,
1886년은 프랑스
에게 나라 문을 열었고
점차 서양 국가들과도 직접 교류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
고종의 개화정책으로
근대적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던
조선은 자본주의의 유입 , 기독교 도입 등 큰 컬쳐쇼크들도 일어났고
정치사회적 혼란 및
수구파 세력 및 사대부(유교) 지배층들의 거대한 반발을 맞이하게 됩니다
<라봉봉>조선이 일본에 문을 연 강화도 조약 시기(1876년)부터
조선은 엄청난 국내외적 변화를 맞이하는데
이 시기부터 을사조약(1905년) 혹은 경술국치(1910년) 라는
조선이 멸망하는 30년의 시기가
일제가 아닌
조선 권력자들이 조선을 움직일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이자
조선의 운명을 바꿀 골든타임 시기였기에
이때 더 빨리 근대화가 진행되고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단결이 제대로 됬다면 하는 아쉬움이 강한 시기라
대체역사소설 같은 타임판타지류 소설에
현대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이 시기로 가는 등으로
애용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
안타깝게도 조선은 이때부터 급격한 사회혼란 및
여러 계층 혹은 집단간의 분쟁등이 더욱 심화되었고
사실 조선이 정말 무능해서였다기보다도
당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애매하게 껴있고 인구도 , 자원도 , 경제력도 두 나라보다 훨씬 작았던 조선은
서구 열강들에게도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었을 뿐더러
한반도는 근대화를 더 빨리 시작한 일본에 비해
영토와 인구와 자원도 이미 일본의 조선시대격인 일본 에도시대대부터 한참 추월당한 상황이기에
설사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했다 한들
좋은 미래를 낙관하긴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즉 ,
이미 수백년전부터 일본과 격차가 벌어진 조선이었고
일본의 침탈을 막기엔
기초체력 등 여러 부분에서 너무나 많은게 부족한 개화시기 조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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