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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정책에 실패한 고종>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임오군란]

[돌아온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복고]

[납치된 흥선대원군]

[임오군란의 영향]

[급진개화파]

[갑신정변]

[갑신정변의 영향]

[거문도 사건]

<라봉봉>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

그렇게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는

외세를 극단적으로 배격하는 수구파(보수파 중 풍습을 그대로 지키려고 따르려는 무리) 였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반대로

 

외세를 받아들이는

개화파(꽃이 피듯 지혜가 열려 외국 풍습을 받아들이려는 무리) 정책을 시행했고

 

단 젊었던 고종 부부 역시

급하게 개항 , 나라 문을 열며

일본에 지나치게 특혜를 퍼주거나

여러 정치 , 문화적 충격이 강했기에

민심에 거대한 반발이 있었고

 

고종의 개화정책은 곧 수구파와 백성들의 역풍을 맞게 됩니다

 

조선 후기부터 비록

조선 내부에서도 시장 및 기초적 자본주의 체제가 발달했지만

가내수공업 , 재래식 보따리상(보부상) 수준의 정말 아주 기초적 자본주의 수준이었고

 

조선 후기 시장

 

조선 보부상(등짐 상인)

 

근대화를 성공한 후 증기기관 도입 등 기계의 힘으로 압도적인 물량으로

물량과 상품을 생산해낸 일본이

조선에 밀고 들어오자

조선 시장 경쟁력은 일본 시장 경쟁력에 대항할 수 없었고

조선의 수많은 국부와 경제적 이권들이 점차 일본에 잠식됩니다

 

공장제 대량생산인 일본산 직물 , 도미오카 제사공장

 

가내수공업 수준인 조선산 직물 (가격 경쟁력에서 게임이 안됬음)

 

[임오군란]

또한 ,

고종은 1881년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 후

신식군대 별기군에게 압도적 혜택을 주며

군사훈련은 일본에 맞겼고

 

신식군대 별기군

 

기존 5군영(조선 5개군영 , 전통적 조선의 군사체제) 체제를

2군영 체제로 축소시켰는데

 

이로인해 기존 재래식 , 구식군인들은 실직자가 되었고

또한 조선 정부는 남은 재래식 군인들에게 급여도 1년 넘게(정확히 13개월) 지급하지 않습니다

 

결국

1882년 6월 여름날 ,

구식 군인들은 밀린 13개월 급여 중

일단 1개월치만

선혜청(쌀 관리 관청)에서 지급받는데

이미 조선 말기는 군대 뿐만 아닌

조정 및 관리들까지 전부 부패해있던 상황이라

 

선혜청 관리들은 농간을 부려서

군인들 줄 쌀안에다가

썩은 쌀겨와 모래를 섞어 주었고

 

구식군인들은 제대로 된 쌀을 달리 요구했지만

지급 담당자였던 병조판서 겸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직계하인은

새로 못주겠으니 받기 싫으면 가라는 식으로 군인들을 모욕하고 자극했고

 

그전까지도 꾸역꾸역 차별대우에 참고 참다가

밀린 월급까지 쓰레기 쌀을 지급받은 구식 군인들은

개빡돌아서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합니다

 

임오군란의 시작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도

사실 정황을 뒤늦게 듣고 (ㅉㅉ)

 

구식군인들이 13개월동안 버틴것도 신기하다며

군인들의 편을 드는 듯한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조정에서 아무런 대책이 내려오지 않고

폭행 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에게 매질을 하고

가두었는데

 

투옥된 군인들이 모두 사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에

구식군인들은 이판사판으로 결국

한양(서울) 백성들과 (군인들 가족과 친척이 곧 한양 백성임)

의금부에 쳐들어가게 되며 

 

임오년 구식군인들의 난 ,

 

'임오군란(1882년)'

 

이 시작됩니다

 

임오군란

 

[돌아온 흥선대원군]

구식 군인들은

민겸호의 자택을 습격하고 약탈한 후

장성한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에게 실각한 후

운현궁에 머물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찾아와서 도움을 부탁합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심복을 풀어

비밀리에 구식군인들을 지휘하기 시작했고

 

구식군인들은 무기고를 부숴

병장기를 탈취해 무장한 후

포도청(경찰청)과 관가를 습격해

갇혀있던 흥선대원군 지지자들을 석방한 후

 

명성황후 민씨의 여흥 민씨 일가 친척과

개화파 인물들의 자택을 습격해 파괴합니다

 

특히나 중전 명성황후 민씨는

이전 안동김씨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친족들을 동원해 부정부패를 일삼았기에

 

구식군인 및 수구파들은

중전 민씨와 그 일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매우 컸고

 

또한 민씨 일가 뿐만 아닌

개화파들에 대한 원망도 컸던 구식군인들은

일본 공사관과 별기군까지 습격해

일본 별기군 교관과 별기군 조교 , 별기군들을 살해합니다

 

이후 구식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의 지원아래

백성들과 합세해 

창덕궁으로 쳐들어갔지만

궐내 군사들도 아무도

분노한 구식군인들을 저지하지 않았고

 

결국 분노한 구식군인들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해 궁궐을 습격하자

 

(나라꼴 보소)

 

당황한 명성황후는

궁녀옷을 입고 궁녀로 변장해 충주로 도망칩니다

 

도망치는 명성황후

 

당황한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아빠찬스를 썼고

결국 흥선대원군은 구식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금 궁궐로 복귀해

다시 흥선대원군의 섭정 통치가 시작됩니다

 

구식 군인들과 백성들은

흥선 대원군이 다시 궁궐로 복귀하자

만세를 불렀고

흥선 대원군은 그들을 달래며 해산시키고 귀가시킵니다

 

[흥선대원군의 복고]

다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민씨 지지자들을 전부 파면하고 귀양보내거나 처벌했고

밀린 군인들의 급여를 전액 지급하고

다시금 자신의 세력을 기용하고

고종이 시행한 개화정책을 전면 빠꾸시킵니다

 

흥선대원군은 먼저 실종된(사실 충주로 도망감) 중전 민씨가

사망했다 선포한 후

군제를 다시 2영에서 5영으로 복고(되돌림) 했고

개화파들의 개화기구였던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개화정책을 중단시킵니다

 

[납치된 흥선대원군]

그러나 

피신해있던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결국 청나라군은

조선으로 출병했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영을 방문하자

청나라군은 흥선대원군을 잡아 텐진으로 납치해갑니다

 

납치당한 흥선대원군 , KBS 역사저널 그날

 

청나라에 끌려간 흥선대원군 , 63세 시기

 

이 모든게 임오군란과 흥선대원군 집권 1달만에 일어난 일이었고

 

통치자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됬다는 소식을 들은 

명성황후 민씨는 곧바로 환궁했고

청나라군은 곧 구식군인들이 많이사는 왕십리와 이태원동을 습격해

11명을 참수하고

구식군인 지도자들을 능지처참하며

임오군란은 허무하게 끝납니다

 

[임오군란의 영향]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과 구식군인들이 짧게 복고하는 현상이었지만

그 국제적 파장이 어마어마했는데

 

먼저 일본은 자국민들이 살해당한 이유를 들며

 

'제물포 조약(1882년)'

 

을 체결해

조선을 압박해

조선에 경비병을 파견하고

주둔비는 조선이 내야한다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고

 

제물포 조약 (제물포는 인천의 옛 이름)

 

청나라 역시

임오군란을 진압해주었다는 이유로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를 압박하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년)'

 

을 체결해

조선은 청의 제후국임을 확실히 하고

친청인사들이 대거 등용됩니다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한 청나라를 풍자한 그림

 

또한 조선 개화파들은

일본과 청의 간섭 강화에 주체적인 구심점을 잃어버렸고

특히나 급격히 강화된 청나라의 압박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자국군대에게 밥을 안줘서 시작된

임오군란의 파장은 이토록 엄청나게 큰 것이었고

이때부터 조선은 식민지화되기 시작됬는데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는 사실 개화파에 포함되는 인물로서

비록 개화에는 의지를 보였지만

개인적 사치와 탐닉에 몰두하며

나라의 소중한 개화 및 근대화 자금을 탕진했으며

 

정작 자국민에 대한 관리 , 통제에 실패했기에

이런 꼴이 난 것이었고

 

(반대로 흥선대원군은 수구 , 보수파로서

자국민에 대한 정책은 탁월했지만

외세에 지나치게 배타적이었고

 

둘 다 극단적이라

둘 다 노답이었음)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고종 부부는 다시 개화정책을 시행하려 했지만

군대를 끌고온 청나라와 일본에게 이중으로 배상금을 물게 되며

가뜩이나 부족했던 조선 국고가 더욱 빨리 탕진되고

 

봉건제국 청나라의 압박으로

근대 , 개화정책 추진은 힘을 잃습니다

 

[급진개화파]

이에 일본과 가까운 개화파들은 불만이 폭증되었고

일단 이시기즘까지만 해도

일본은 제국주의의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얄밉게 조선을.괴롭히며 자국 영향력을 확대해가며

훈수도 두어주는 정도였는데

 

임오군란 이후부터는

일본도 조선에 점차 대놓고 제국주의 발톱을 드러내는 시기였기에

필연적으로 일본과 가까울 수 밖에 없었던

개화파들 내부에서도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꼬이고 꼬인 상황속에

개화파들도 분열이 가속화되어

 

'야 시발 그래도 이젠 일본놈들도 본색을 드러냈는데

신중하게 개화해야지..'

 

하는

 

'온건개화파'

 

 

'ㄴㄴ 비록 일본도 ㅈㄹ하긴 해도

그래도 일본 힘을 안빌릴 수 없음

일본따라 개혁에 힘을 더해야함'

 

하는

 

'급진개화파'

 

로 분열하는데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

 

이 급진개화파는

조정내 강화되는 친청세력 및 개화중단에 불만을 품고

일본과 내통한 후

 

조선에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갑신정변]

급진개화파의 김옥균 , 홍영식 등은

행동을 개시해

 

1884년 12월 4일 겨울 , 저녁 6시

우정국(최초의 우체국) 개국 축하연회에서

 

'갑신정변(1884년)'

 

을 일으킵니다

 

우정국

 

민영익 일행이 갑신정변 직전 촬영한 사진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가 한창 끝나갈 무렵

담장 밖에선 불이 났고

이때 사대당(개화파의 반대세력 , 수구 및 친청파를 의미) 의

민영익은 불을 끄려 먼저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는데

곧 급진개화파들이 풀어놓은 여러명의 자객들의 습격을 받았고

 

원래 개화파였지만 온건개화파성향+명성황후 친족(민씨일가는 대부분 친청+보수파) 이라는 이유로 급진개화파들에게 칼통수 제대로 맞은 민영익 

 

민영익은 나아가 맞받아치다

결국 칼을 맞고 대청 위로 돌아와 쓰러집니다

 

쓰러진 민영익

 

축하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자

 

김옥균 ,

홍영식 ,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 젊은 청년 급진개화파들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고종의 침전에 들어 급하게 변고를 아뢰었는데

 

갑신정변 주역들 , 왼쪽부터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그리고 김옥균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개화파 수장 김옥균

 

급진개화파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였지만

고종에게 사대당과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보고했고

고종에게 난리를 피힐 것을 청했습니다

고종은 결국 경우궁으로 거처를 황급히 옮겼고

 

갑신정변 전개도

 

김옥균 등은

고종의 명령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자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했습니다

 

다케조에 신이치로

 

이어 고종을 속여 정권을 잡은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들은

사대당 및 왕실 척족(친척) 세력들을 살해했고

다음날 12월 5일

곧바로 정강 14조를 발표해

개혁을 실시해 (ㄹㅇ 급함)

 

청에 납치된 흥선대원군 송환 ,

청에 대한 조공 폐지 ,

문벌 폐지 ,

지조법(토지세) 개정

 

등의 내용을 담은

급진적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갑신정변 정강 14조

 

명성황후는 곧

갑신정변은 사대당과 청나라가 아닌

김옥균과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것이라는 것을

눈치를 채고

곧바로 청나라에게 원병을 요청합니다

 

이에

12월 6일 오후 청나라군사 1500명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들에게 군사 지원을 약속한 일본은 

수적 열세에 사전 약속을 어기고 일본군을 철수시켰고

 

불리해진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제물포(인천) 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고

 

갑신정변은 3일만에 끝나버려서

 

'3일천하'

 

라고 불리게 됩니다

 

[갑신정변의 영향]

임오군란이 병사와 백성들 (조선 피지배층) 이 일으킨 쿠데타였다면

갑신정변은 젊은 명문가 자제들 (조선 지배층) 이 일으킨 쿠데타였고

 

고종도

아래 , 위로 쿠데타를 연속으로 두드려 맞자

멘붕이 왔고

 

역시 갑신정변도 그 파장이 엄청나게 커서

일본은 이때 일본 공사관이 불탄 것을 이유로

조선을 압박하며 배상금을 요구하며

 

'한성조약(1885년)'

 

을 체결했고

 

한성조약을 체결한 김홍집

 

또한 청나라 역시 간섭과 압박이 심해져서

조선을 두고 일본과 충돌하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국제 상황뿐만 아니라

내부적 상황도 완전 죳됬는데

 

갑신정변 주역들은

개화정책을 추진해야만 하고 차기 조선의 미래였던

고작 2~30대의

조선 명문가 + 엘리트 청년관료들이었고

 

이로인해 조선 인재풀을 박살나게 됩니다

 

또한 갑신정변은 곧 반역이었기에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고

개화파 세력들이 줄줄이 처단되거나 해외로 망명해버리자

 

더이상 조선에서는 개화라는 두글자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었고

개화는 곧 외세를 끌어들인 역적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버려

조선 개화정책은 임오군란때 옐로우카드 , 갑신정변때 레드카드를 맞고

완전히 퇴장선고가 내려집니다

 

[거문도 사건]

하여튼 ,

이렇게 나라꼴이 막장화되자

외세들도 다시 조선에 압박을 시작했고

 

멘붕온 고종은

청나라도 , 일본도 둘 다 믿을 수 없다 판단해

북방의 러시아와 내통했는데

 

시베리아 넘어 동방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싶었던 러시아는

추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바다가 꽁꽁 얼어있었기에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 를 찾고 있던 러시아는

고종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역시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시켰고

 

조선이라는 물고기를 노리고 있는 일본과 청나라 가운데 지켜보는 러시아를 그린 풍자화

 

이 사실을 안 당시 세계 초강대국 영국은

한창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 , 패권경쟁중이었기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 남부 전라도의 섬인 거문도를 점령합니다

 

(거문도 사건 , 1885년)

 

당시 국제정세와 거문도 사건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요즘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경계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그레이트 게임)

러시아 군함이 블라디보스톡에 집결되자

영국 사람들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홍콩을 침략할까봐

동양 함대를 파견하여

3 초하루(1일)에 거문도를 검거한 다음 포대를 쌓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았다

 

이에 고종은

 

<고종>거문도를 다른 나라 사람이 제멋대로 차지하고

아직 철수하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며 걱정했습니다

 

계속되는 왕권 밑 여러 세력들의 도전을 받은 고종은

결국 자체적인 힘보단

조선에 밀고 들어오는 서양 열강들의 힘의 균형을 이용해

외세의 힘을 빌린 정책을 추진하려 했고

왕비 명성황후 민씨의 친척 세력인 여흥민씨들을 끌여들여

지지기반을 구축합니다

 

(개혁하려고 다시 세도정치를 부활시키는 고종 ㄷㄷ;;)

 

<라봉봉>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조선 수도 한양내

피지배층 , 지배층이 모두 조선왕실에 등을 돌렸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고

 

조선 왕궁이 이렇게 고종대부터 계속 수시로 털리게 되자

점차 고종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명성황후 민씨 ,

현명한 여인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민씨 일족을 동원해

다시금 세도정치를 부활시켰으며

 

고종과 함께

사치에 몰두해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다져놓은 국부를 탕진시켰고

 

외세에 특혜를 퍼주고

외국 군대를 함부로 끌여들여

망해가던 조선의 멸망을 더욱 가속화시켰기에

 

서울 민심이 모두 등을 돌린 것이고

그저 자신의 사치와 권력에 몰두한 탐욕의 여인일 뿐

지혜로운 여인이라 보긴 어렵습니다

 

고종 역시 명성황후와 비슷한 혹은 명성황후보다 더 좋지 않은 수준이었고

이런 명성황후를 정치적 동반자라 인식하고 깊게 의지하며

이후에도 정신 못차리고 더욱더 명성황후와 민씨일족들을 조정에 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트들은 다 도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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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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