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임금 고종>
[친일파 박영효]
[중단된 개화]
[명성황후 VS 박영효]
[을미사변]
[을미개혁]
[아관파천]
[조선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
<라봉봉>
[친일파 박영효]
그렇게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이 일본군에 잡힌 시점부터
사실상 조선은 멸망했고 고종은 허수아비 왕이 됬는데
허수아비왕이 된 고종을 뒤로하고
친일내각 , 군국기무처가 구성되어
김홍집 내각의 갑오개혁(1894년) 이 시작됩니다
갑오개혁으로 조선은 신분제가 폐지되고
근대국가 , 더 정확히 말하면
일제의 조종을 받는 근대국가로 나가게 되었는데
일본의 요구에 의해
김홍집 내각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중이던
친일파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내각을 구성시키고
김홍집은 일제의 지원을 받는 박영효를 대항할 수 없었고
사실상 일본-박영효 내각으로 조선이 움직이게 됩니다
<고종실록 1895년>내부대신 박영효에게
내각총리대신의 사무(일)를 서리(대리)하라고 명하였다
고종에게 박영효는
갑신정변대부터 역적 , 반역자였고
갑신정변 이후 박영효는 일본으로 런했지만
박영효 집안은 몰살됬는데
그런 역적이 일제를 등에 업고 다시 돌아와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것에 대해
고종 및 조선인들은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중단된 개화]
당시 고종은 외세로는 일제 ,
내부로는 군국기무처에 의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였고
500년 왕조국가로서
왕의 말이 곧 법이었던
봉건국가 조선에서
일제를 등에업고 나라를 재단하는 박영효 등에 대해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비록 그것이 봉건제를 탈피하고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는 일이었음에도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전
지배를 편하게 하기 위한 근대화 작업이었지
우리 손으로 하는 근대화가 아니었기에
올바른 근대화라 볼 수 없었고
갑오개혁 전
한국인들이 스스로 근대화하려 했던
'개화' 는 완전 중단되고
점차 조선은 일제의 괴뢰화(꼭두각시화)되기 시작합니다
일본 , 식민사관은
이때 ,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한국 근대화가 시작됬다 서술하고 있지만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허울뿐인 근대화이자
실제 조선 , 한국인들의 의식수준과 근본적 민도를 끌어올리지 못한 점 +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내내 수십년동안
한국인은 일제에 자주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인들에게 2등국민 혹은 노예수준으로
차별대우받으며
자체적인 주요 기술 , 산업영역에서 배제되었다는 점으로
한국인들이 스스로 이뤄낸 진정한 개화 , 근대화는
수십년이 한참 지나서
광복 이후 , 박정희 정부대부터 시작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조선은
이전까지 청나라 대감집에 소작농으로 살다가
이후 청나라보다 더 잘사는 일제 대감집에 강간당한 후
자유권을 잃고 일제 대감집 노예로 살게 된 것인데
당연히 일제가 청나라보다 더 우수했으니
조선 역시 청나라보다 더 발전한
일제가 주는 새로운 신문물도 접했지만
그럼에도 소작농은 엄연히 자유인이고
노예는 비자유인인데
조선의 자주권을 완전 박탈한
일제를 빠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 수준 ,,)
[명성황후 VS 박영효]
하여튼
이렇게 일본이 조선에 허울뿐인 근대화를 강요하며
조선을 괴뢰화 시키고
박영효 역시 조선왕국을 전복하려하자
수많은 조선 유생 , 지식인 , 백성들이 반발했고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 역시 정말 무능했지만
한민족과 500년간 이어온 종사를
일제에 바칠 수는 없었기에
박영효+일제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고종은 당시 일본 , 군국기무처라는 외부와 내부의 간섭으로
단독으로 할 수 없는게 아무것도 없었고
이에 고종왕비 명성황후는 이를 분하게 여겨
군사권을 회복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기로 했고
박영효는 명성황후의 계획을 우려합니다
이에 명성황후는
박영효와 급진개화파를 사살할 기회를 찾고 있었고
그러나 이 계획은 발각되게 됩니다
결국 박영효 역시 명성황후를 두려워해
1895년(고종 32년) 7월 초
고종의 왕비이자 국모인 명성황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고
일본에 군사를 요청한 후
자신과 가깝다 생각한 개화파 유길준에게 조용히 이 계획을 알렸는데
유길준은 곧바로 박영효의 왕비암살계획을 고종에게 알렸고 (통수의 통수의 통수)
결국 일이 탄로나자
박영효는 다시 일본의 호위를 받아 일본으로 도주합니다
[을미사변]
박영효가 결국 빤스런하고
일본은 공들여 세운 박영효 내각 및 친일괴뢰정권이 무너지고
조선이 명성황후 주도로 러시아편으로 붙어가자
일본은 조선합병의 걸림돌이었던
고종비 명성황후 민씨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낭인(건달 , 일본깡패) 들을 경복궁에 풀어서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합니다
(을미사변 , 1895년)
일본은 경복궁 점령 이후부터
조선을 합병하려 했는데
명성황후가
친일관료들을 몰아내고
러시아 편에 붙으려 하자
곧바로 명성황후를 죽여서
조선왕실 및 조선인들에게 자체적 의지를 꺾어버렸고
이때부터 그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조선인들은
그전까지 나름 강성한 이웃국가수준인줄 알았던
일본의 실체를 다시보게 되고
일본이 조선의 주적임을 인식하게 되고
격렬한 반일감정이 일어납니다
사실 명성황후 민씨는 반일이고 자시고를 떠나서
무능과 사치를 일삼아 조선 국고를 탕진시키고
그냥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고
굳이 일본이 개입하지 않아도 조선인들이 죽이려 했던 왕비였는데
갑자기 일본이 그것도 일개 건달무리들을 풀어
조선 정궁 경복궁에 침투해 어쨌거나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그냥 죽여버린 것은
국가의 자주권을 무시한 행위였고
이에 명성황후에 대한 동정여론 + 그녀의 반일행보까지 겹처서
명성황후는 순식간에 국썅에서 국모로 미화되게 되었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분개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을미개혁]
을미사변 직후 일본은 러시아에 붙어가는 고종 및 조선인들을 정치에서 배제시키고
고종은 사실상 일본군에 감금되었고
일본은 다시 김홍집 내각 , 친일내각을 구성시켜서
'을미개혁(1895년)'
을 단행해
'태양력 사용 , 단발령 시행'
등을 실시했고
이전 일본에서 단발령이 실시할때
일본 천황이 머리를 자르자 신하들이 따르고 백성들이 따랐기에
일본은 조선도 그런식으로 단발령을 실시하기 위해
먼저 고종과 태자 순종 , 조선 내각신하들을 강제로 상투를 자릅니다
<고종실록 고종>
짐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다른 나라)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
일본은 곧 상투보다 위생과 작업효율이 좋다며
조선 백성들에게 단발령을 강요했지만
유교사상중
'신체발부 수지부모'
즉
'사람의 신체와 머리카락과 살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
이라는 사상때문에
조선인들은 전통적으로 감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고
상투는 중국 , 일본 민족과 다른 한민족의 수천년간의 전통이었으며
설사 단발령이 합당하다 한들
그것을 강요한 주체가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이었기에
이런 복합적인 것이 모두 겹쳐서
단발령은 조선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여버렸고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를 이유삼아 조선인들은 을미의병(1895년) 을 일으킵니다
[아관파천]
이런 상황속에서
이미 경복궁이나 조선 궁궐은
내부 , 외부 세력에 의해 너덜너덜하게 계속 털리던 고종시대였고
고종은 부인 명성황후도 순식간에 일본 건달들에게 살해당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상황이 되어버리자
결국 신변의 안전을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1896년)'
을 단행합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맡긴 후
모든 힘을 쥐어짜내 일제에 마지막 반격을 가합니다
<고종의 어명>역적의 우두머리와 반역 무리들의 흉악한 음모와 교활한 계책의 진상이
숨길 수 없게 되자 막아버리고 승복시키는 방도가 혹 허술한가 걱정하여
외국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대로 임시 방편을 써서
짐이 왕태자를 데리고 대정동(서울 중구)에 있는
러시아 공사주관에 잠시 가 있는 뒤에
왕태후는 왕태자비를 데리고
경운궁으로 갔으며
짐은 유사(관리)에게 명하여 모든 범인을 잡게 하고
그들이 묶인 다음에 곧 돌아오려고 하였다.
[조선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
고종 역시 부인 명성황후가 죽은 을미사변 이후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하고 굴욕적이었던 상황이었기에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에 몸을 맡긴 후
모든 힘을 쥐어짜내 일제에 반격을 가했는데
러시아 대사관에 몸을 의탁한 고종은
곧바로 즉시
'김홍집 내각의 관료들을 죽여라'
라는 교지를 내렸고
분노한 군중들은 김홍집 등을 길에서 살해합니다
김홍집의 최후 역시 압권인데
비록 일제에 의해 괴뢰 , 꼭두각지 내각의 수장이 된 김홍집이었지만
그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조선 관료 겸 지식인이자
조선 마지막 영의정으로서
김홍집은 친일파였지만 일본을 모델로 배우자는 입장으로서
박영효같이 자존심도 없던 친일매국노는 아니었던 인물이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때
곧 조선 재상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자결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일제와 엮일대로 엮여서
결국 고종의 미움을 정면으로 받으며
백성들에겐 매국친일당의 두목으로 찍혀
김홍집은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일본에 구차하게 몸을 의탁하지 않고
일본군의 만류에도
직접 고종을 배알하러 죽을 각오로 거리에 나섰고
지금 나가면 죽을거라는 일본군의 만류에도
<김홍집>시끄럽소 !
일국의 총리대신으로서 백성에게 죽는 것은 천명이오 !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 !
라고 뿌리친 후
직접 고종이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다
붙잡혀 광화문 앞으로 끌려나간 후
분노한 군중들에게 돌을 맞고 집단구타당한 후 사망합니다
당시까지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자원을 가진 전통적강대국이었고
일본은 막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하는 신생강국이었기에
고종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몰아내겠다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치고 대놓고 일제에 반기를 들자
일본은 더이상 조선을 근대화시키겠다는 합법적 명분을 모두 잃었기에
주춤하게 되고
갑오개혁 및 친일내각은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라봉봉>일단 당대에도 조선은 인물이 없었던것은 아닌데
고종의 리더십의 부재가 가장 컸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반기를 든 인물들이 모두
고종이 키운 개화파들이며
외세 일본보다 더 위험했던게
바로 조선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었고
위정척사파 VS 개화파 ,
흥선대원군 VS 고종 ,
고종 VS 급진개화파 ,
친러파 VS 친일파
등 짧은시간동안 조선 개화파 , 지배층들은
서로에 대한 공격 , 테러에 집중하느라
근대화 , 개화에 필요한 중요한 시간들을 날려먹었습니다
아 그리고 ,
고종 주변엔 유독 간신 , 매국노들이 꼬였는데
박영효나 이완용은 실제로 능력은 있었으나
민족의식 , 책임감이 결여된 인물이었고 (소시오패스)
차라리 김옥균이나 김홍집 같은 인물들은
비록 시대적 한계나 논란은 있는 인물이지만
능력도 좋고
기본적 책임감 ,
민족을 위한 순수 이상가적인 성향은 있었던 인물이고
이런 인물들을 품지 못하고
박영효나 이완용 같은 인물을 걸러내지 못했던 고종이 참 안타깝고
아쉬운 역사입니다
고종은 온건한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봉건군주라는 한계가 매우 강했던 인물이고
결국 고종도 백성보단 군주권 행사가 더 먼저였으며
그로인해 자유민주진영이 아닌
전통적 군주제 , 후진봉건국가였던 청나라나 러시아편에 서버리며
조선은 줄타기도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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