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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권을 잃게 된 고종>

[사라진 개화파들]

[동학농민운동]

[외세를 끌여들인 고종]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갑오개혁]

<라봉봉>

 

[사라진 개화파들]

그렇게

임오군란(1882년 , 피지배층 , 백성) 과

갑신정변(1884년 , 지배층 , 청년관료들) 이라는

두 사건으로 연속으로 2번이나 궁궐이 털려버린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는

점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

 

난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청나라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조선은 외국군대까지 먹여살리게되어

가뜩이나 부족했던 조선 국고는 더욱 빨리 소모됩니다

 

갑신정변 이후

엘리트 청년관료들은 다 외국으로 망명 , 도망치고

이후부터 고종은 개화정책에 힘을 잃었지만

내무부 설치 및

명성황후 민씨의 친척들을 끌여들여

다시금 개화정책을 실행합니다

 

그러나 이미 신뢰를 잃을대로 잃은 조정에

서울 민심은 모두 등을 돌렸고 ,

또한 갑신정변 이후 급진개화파들이 모두 역적으로 지정되며

더이상 서울에서 개화라는 말 두글자를 꺼내는 사람이 사라지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

고종은 임오군란 , 갑신정변으로

수도 한양의 피지배층과 지배층들이 모두 자신에게 등을 돌렸음을 알고

더이상 관료들을 믿지 못하고

 

마누라 명성황후 민씨 일족을 끌여들인 것이었고

그토록 사람들이 경계하던

세도정치가 또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미 신뢰와 기강이 땅에 떨어진 조선 조정이었기에

지방에선 점차 다시금 관료들은 부패하고 탐관오리(탐욕스러운 관리)들이 들끓었고

 

백성들을 가렴주구(수탈) 했던 탐관오리들

 

끝내 ,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 터지며

한양 밖에도 전국적 민심이 폭발합니다

 

동학농민운동(요즘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는 추세임)

 

특히나 전라도 ,

전라도는

전통적으로 한국 ,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로서

지리 , 경제적 이점으로 지속적 수탈을 받은 고장이었고

 

풍요롭다는 이유로 지속적 수탈을 받은 전라도

 

전라도 고부의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은 만석보라는 대형저수지를 지으며

사용료를 부과하며 백성들을 착취하고 수탈했고

그외에도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겠다며 백성들에게

여러 조세와 잡세를 거두고 가렴주구 , 강제노역을 시키며 백성을 괴롭힙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인 만석보터 (농민군에 의해 파괴됨)

 

이에 고부군의 지식인들은 전창혁을 대표로 삼아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조병갑은 전창혁에게 곤장을 때리고 내쫓았고

전창혁은 곤장을 맞고 곧 사망합니다

 

이에 전창혁의 아들 전봉준은

농민 , 백성들을 모아 봉기를 계획했고

이전 농민봉기와 달리

 

'수령을 죽이고 전주성을 점령하고

나아가 서울로 상경한다'

 

라는 체계적인 계획을 하고

당시 서학(천주교) 에 반발해 생겨난

민족종교 동학(유교+한국신앙+천주교 영향을 받음) 의

동학교도와 농민군을 모아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 , 1894년)'

 

을 일으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 , 한국위인

 

[외세를 끌여들인 고종]

전봉준과 농민군은 파죽지세로

고부 , 전주성을 점령했고

점차 전국적 세력을 확대해가자

 

결국 위기를 느낀 고종은

조선왕조의 붕괴까지 생각할 지경이 되었고

 

고종은 자국관군의 힘을 믿지 못하고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또다시 외세를 불러들이는데

 

청나라에게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달라 요청합니다

 

근데 당시는 이미 조선관군이

독일제 소총과 미국제 소총 및

기관총까지 보유한 상황이어서

충분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고

 

당시 관군은 농민군을 전주성에서 밀어내던 상황이었는데

외국 군대 빌리기를 너무 쉽게 여긴 고종은

단숨에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파병요청을 한 것이었고

 

대신들 역시

2가지 의견이 나뉘는데

 

하나는

청나라군이 파병할경우 텐진조약의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조항에 의거해

일본군 역시 개입할 빌미가 있다는

합리적이고 강력한 반발이 있었고 (조선 조정에도 정상인이 존재하긴 했음)

 

하나는

차라리 청의 속국이 될지언정

동학군에 정권을 잃을바에 청의 속국이 되서 정권을 계속잡는게 낫다했고

 

외세를 끌어들인 고종

 

결국 고종의 의지에 의해

청나라군이 파병되고

 

연쇄적으로

일본 역시 어짜피 근대식 총포로 무장한 자국군에 비해

조총 , 죽창이나 농기구따위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죳밥군대인것을 알기에

 

조선에 숟가락을 올리고자

텐진조약에 근거해

일본군을 조선에 파병합니다

 

일본과 청나라에게 쌍으로 털리는 조선을 풍자한 삽화

 

결국

동학농민군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고

우금치 전투에서 학살당하듯이 패배하며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게 됩니다

 

우금치 전투(사실상 우금치 학살)

 

그러나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에 야욕을 드러냈고

 

일본군은 조선 대궐에 난입합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1894년 6월 21일 새벽 ,

일본군 2개 대대가 경복궁 서문 영추문으로 들어오자 (영추문을 도끼로 까부숨)

조선의 시위(호위) 군사들이 총을 쏘면서 막았지만

 

이미 일본군에 사로잡힌 고종은 중지하라 명했고

 

일본군에 사로잡힌 고종 , 일본의 경복궁 점령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사들은 마침내 경복궁문을 지키고서는

오후부터는 조선군의 서울안의 각 군영에서 무기를 회수했습니다

 

일본군에 점령당한 경복궁

 

일본군은 생각보다 조선군이 일본군에 꿀릴 것 없이

독일과 미국 등 서양에서 수입한 엄청난 고급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음을 알고 깜짝 놀랬고 (고종도 병신임 그냥)

 

일본군은 조선군의 무기를 회수해 본국으로 보내고

일부는 연못에 쳐박아버려 다신 쓰지 못하게 망가뜨립니다

 

[갑오개혁]

운좋게 경복궁을 점령하고 강력했던 신식무기로 무장한 조선군 무장을 해제시킨

일본은 더이상 두려울게 없었고

 

일본군은 고종에게 개혁(일본식 개혁)을 요구했고

결국 고종은 온건개화파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군국기무처'

 

를 설치한 후 

 

군국기무처

 

총리대신 김홍집과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갑오경장 , 1894년)'

 

을 실시합니다

 

조선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 . 일제에 간섭으로 정치에 나서게 됬지만 친일파는 아니었던 엘리트이자 강직했던 인물이고 이후 고종에게 살해당함

 

<고종>오늘 정치를 경장(고쳐서 새롭게 하는 것)

하려는 때를 만나서 등을 불러들여 만나고

이제 윤음(임금의 말씀) 선포하려고 한다.

성실한 마음으로 좋은 정사를 하여

반드시 국세(국력) 다시 떨칠 있게 주기를 바란다.

 

이에 

갑오개혁을 명받은 김홍집 등은

고종에게 일어났다가 엎드려서 공경스럽게 일어난 후

고종에게 아뢰기를

 

<김홍집>오늘 우리 전하께서 운수를 이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나라를 일으키는 때에 윤음을 선포하여 모든 관리들을 격려하니 ,

신들이 듣고 황송하여

어찌 감히 몸과 마음을 다하여 성상의 밝으신 명을 받들어 집행하지 않겠습니까 ?

신이 듣건대 임금의 일심(한마음) 만화(만가지 평화) 근원이라고 하였으니 ,

이제부터 분발하여 결단을 내리고 순일(순수) 도를 끊임없이 뒤에야

모든 일이 되고 온갖 법도가 바르게 되기를 기대할 있습니다.

옛사람이 임금에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던 뜻을 빌어

감히 이렇게 말씀 올리니 전하는 힘쓰고 힘쓰소서

 

고종도 외국군을 끌어들인 상황에서

일본군의 강요로 내정개혁을 실시하게 된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된 상황이었고

 

일본 역시 조선이라는 비슷한 규모의 국가를 병합한다는 것은

당장에 쉬운 것은 아니었기에

조선에 적당히 무력시위를 실시하고

조선에 갑오개혁을 실시시키며 친일관료 육성 및

상황을 지켜보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게 갑오개혁이라는 근대적 개혁이 실시되어

조선은 신분제가 폐지되고 봉건국가의 틀에서 급하게 변화했고

 

동학농민운동시기 일어난 농민군들을 그저 역적 백성으로 규정한 고종은

동학농민운동 이후 고종은 더이상 자국민들을 믿지 못했고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의 압박에

이미 유명무실해진 왕권에

갑오개혁이 실시되며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고종은 이때부터 국왕으로서 실권을 완전히 잃게 됬고

일본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라봉봉>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외세에 지나치게 배타적이었지만

적어도 일을 추진해내려는 추진력은 매우 강한 인물이었고

 

반대로 고종은 아버지와 달리 외곡 문물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항상 결정적인 상황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중요한 기회들을 계속 놓쳐버렸고

외세 끌어들이기를 너무 쉽게 알았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외국의 도움도 처음엔 도움이지만

계속해서 손을 벌리는 고종은 결국 크나큰 대가를 치뤄야만 했고

고종은 무책임한 모습이 강했습니다

 

또한 ,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했다는 조선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고종은 개화 이후

적극적으로 미국 , 독일제 무기를 수입하고

강도높은 훈련을 받은 근대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항상 중요한 상황에 도망친 고종에

결국 일본은 조선이 부담스러운 상황임에도 의외로 쉽게 조선을 멸망시킨 것이었고

 

이건 정말로 의지와 정신력의 문제였습니다

 

비록 정신력 , 의지드립이 열악한 상황에서

이겨내라고 강요하는 폭력으로 나타나는게 대부분이지만

 

이때는 진짜 조선의 장비나 상황들이 일본에 밀리지는 않았던 상황이었고

정신력이 아버지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강한 인물입니다

 

고종은 결국 선대로부터 이어진 조선의 500년 유업을 말아먹은 것이었고

성난 백성들의 민심 뿐만 아닌

김옥균 등에 이어 이후에도 김홍집 등 유능한 엘리트 인재들을

전부 관리 , 통제에 실패하고

죽여버린 고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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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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