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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신라의 *태대각간이었던 신라의 대당 외교관 김인문>


(*태대각간 太大角干 각간=이벌찬 , 신라 1등벼슬인데

그 앞에 태대가 붙은 신라 전설의 최고위 벼슬 ,

신라 1000년 역사동안 김유신 장군과 김인문 단 두명만이

받았다고 하는 벼슬)


김인문

생몰년도 629~694년 66세


김인문의 자(이름에 준하는 이름)는 인수 仁壽 이고

태종대왕(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해서

유가(유교)의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동시에 '장자' , '노자' (장자와 노자는 도가[도교] 사상가) 및

불교 서적을 널리 섭렵했습니다


또한 예서(한문 서체 , 글씨)를 잘 쓰고 ,

활쏘기 , 말타기, 향악 鄕樂 (한국전통음악) 을 잘 했는데 ,

이처럼 기예(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갈고닦은 기술이나 재주) 에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 했습니다


영휘 永徽 (당 고종의 첫번째 연호) 2년

김인문의 나이 23세 때 김인문은 왕명을 받들고

당나라에 가서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 했습니다


당고종은 그가 바다를 건너와 내조 來朝 (올 내자에 조정 조자로

조정에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하자

충성이 가상하다 해서 특별히 좌령군위장군 벼슬을 제수했고

4년에 조칙(황제의 명령)을 내려서 본국(신라)으로 돌아가서

부모(신라 29대왕이자 김인문의 아버지 태종 무열왕 김춘추)를

만나게 했습니다


태종대왕(태종 무열왕)이 김인문에게

압독주 押督州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

총관 摠管 (주의 군대를 통솔하는 벼슬) 벼슬을

제수했습니다


이에 김인문이 장산성 獐山城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쪽 성)을 쌓아서

요새를 설치했으므로 태종 무열왕이 그의 공로를 기록하고

식읍 3백 호를 주었습니다


(뭔가 재벌 아버지가 재벌2세 자식한테 중소기업 하나 차려주고

자식이 뭔가하자 잘했다 칭찬하면서 일감을 몰아주기같은 포상을

내린 그런 느낌같기도 하나,,

태종 무열왕은 가족복이 정말 좋은 인물이었고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분열한것과 달리

태종 무열왕의 아들들은 첫째아들 문무왕 김법민이나

둘째아들 김인문 같이 유능하고 식견이 있어서

태종 무열왕에게 큰 도움이 된 자식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자식같은 사례를 호부견자, 호랑이 아버지에 개자식,, 이라하고

태종 무열왕의 자식 같은 사례를 호부호자, 호랑이 아버지에 호랑이 아들,

그아버지에 그아들 이라는 비유가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가 여러 번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되자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원수를 갚고자 해서

숙위(당황제를 모시는 직)하러 가는 김인문으로 하여금

당의 원군을 청하려 했습니다

때마침 당고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도록 했습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인문이 니가 우리 신라랑 당사이에서

잘 조절을 해야 한다 이기야


<김인문>무슨 말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아버지 아니 폐하 !


당황제가 김인문을 불러서

도로의 험난한 사정 형편과

행군의 편의 便宜 (형편의 좋음 ,이용하는 데 편리하고 마땅함)에 대하여 물었는데

김인문이 일일이 소상하게 대답하니

당황제가 기뻐해서  김인문에게 신구도 부대총관의 관직을 주어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병영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김인문은 마침내 소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서

덕물도 德物島 (오늘날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 에 이르렀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태자(김인문의 형이자 태종 무열왕의 첫째아들 김법민 , 훗날 문무왕)에게 명령해서

장군 김유신 , 진주 , 천존 등을 데리고

큰 전함 1백 척에 군사를 싣고 당군을 맞이 하게 했습니다


웅진(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인데 기록에는 능진 能津 이라 기록되 있습니다)

어귀에 이르니 적(백제군)이 강가에 집결하여 있었으므로

그들과 싸워서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서 백제의 서울(=수도 , 사비성으로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에 들어가서

그들을 격파했습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의 왕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 등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대왕(태종 무열왕)이 김인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서

파진찬(신라 4등벼슬)을 제수하고

또한 각간(=이벌찬 , 신라 1등벼슬) 벼슬을 더 주었습니다


김인문은 얼마 후 당에 들어 가서 전과 같이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 했습니다


<김인문>당나라는 크고 신라는 작다,,

신라가 살아남으려면

내가 당에 머물며 양국의 의견을 조율해야겠지,,


용삭(당고종의 3번째 연호) 원년(1년)

당고종이 김인문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당고종>내가 이미 백제를 격멸하여

너희나라(신라)의 근심을 제거하였으나

지금 고구려가 견고한 요새를 믿고

예맥(고구려 지방민이나 말갈을 이야기 하는거 같습니다)과 더불어

악한 짓을 하여 사대(약자가 강자를 섬김)의 예를 어기고

선린(이웃나라가 사이좋게 지냄)의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


내가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코자 하니

너도 돌아가서 (신라)국왕에게 이 말을 고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우리와 함께 거의 망하게 된 적(고구려)을 섬멸케 하라


김인문은 즉시 본국(신라)으로 돌아와 당황제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문무왕은 김인문으로 하여금 김유신 장군 등과 함께

군사를 정비해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당황제는 당나라 장수 형국공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습니다

소정방은 6군을 거느리고 만리길을 달려서

패강(대동강)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서 이를 격파하고

그 길로 고구려 수도 평양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가 굳게 수비하자 승리하지 못하고

도리어 많은 병마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군량미의 운송로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김인문은 (신라 김유신 장군과) (당나라 장수) 유진장 유인원과 함께

(당나라에 물자를 보급할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쌀 4천 석과 벼 2만여 곡을 싣고 평양으로 갔습니다

이에 따라 당군은 식량을 얻었으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보급을 마친 김유신 장군과 신라군이 돌아가려 했을 때

고구려군이 돌아오는 길목을 막고 공격하려 하자

김인문은 김유신 장군과 함께 교묘한 꾀를 내서

야밤에 도주했습니다


고구려인이 다음날에야 이를 알고 추격해오자

김인문 등이 반격하여 대파하고

고구려군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5천여 명을 생포해서 돌아왔습니다


김인문은 다시 당에 갔습니다

김인문은

건봉(당고종의 5번째 연호) 원년(1년)에 (문무왕 6년)

당황제를 따라서 태산에 올라가서

봉선(중국의 제왕이 천지를 제사지낸 의례)의 의식을 행하였다 해서

(봉선은 중국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국가적 대행사였으며

이를 보는 거 자체로도 신하로서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추가로 우효위 대장군 벼슬을 제수하고

식읍 4백 호를 더 주었습니다


총장(당고종의 6번째 연호) 원년(1년) 무진에

당고종 황제가 당나라 장수 영국공 이적(=이세적)에게 군사를 주어서

고구려를 치게 하고

또한 김인문을 보내서 우리(신라)에게도 군사의 징발을 요구했습니다


문무대왕(신라 30대왕 문무왕 김법민) 은 신라 군사 20만을 출동시켜서

김인문과 함께 북한산성 北漢山城 (오늘날 한강유역) 으로 갔습니다


문무왕은 그곳에 머무르며 먼저 김인문 등에게 군사를 주어서

당군과 회합하여(만나서) 평양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신라군)은 한달 남짓 만에 보장왕(고구려 28대왕이자 마지막왕 보장왕)을

생포(사로 잡음) 했습니다


김인문이 고구려왕(보장왕)을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 앞에 꿇어 앉히고

그의 죄를 따지니 ,

고구려왕이 재배(두 번 절)하고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이 그에 답례를 했습니다


영공(당나라 장수 이적)은 곧 보장왕과

남산, 남건, 남생 (연개소문의 세 아들 연남산, 연남건 ,연남생)

등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문무대왕은 김인문의 지략이 훌륭하고 공로가 뛰어나다 해서

대탁각간 大琢角干 (=태대각간 , 신라 1등벼슬 각간=이벌찬 보다 높은

전설적인 관직) 벼슬과

박뉴 朴紐 (신라 대각간 관등의 귀족이었습니다) 의 식읍 5백 호를 주었습니다

(박뉴가 사망하자 그의 500호 식읍땅은 김인문에게 하사됬습니다)


당고종도 김인문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제서(임금의 명령)를 내려서


<당고종>김인문은 짐에게 조아같은 우수한 장수요

문무겸비의 영특한 인재이다

작위를 제정하여 새로운 봉읍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라 하고

작위를 더하고 식읍 2천 호를 더 주었습니다

그 뒤로 김인문은 궁궐에서 당황제를 시위(호위)하며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상원(당고종의 8번째 연호) 원년(1년)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의 반군(고구려 부흥운동군)을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고토(옛땅)를 차지했습니다


(당나라의 한국에 대한 야욕으로 인해

분노한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을 받아들여

당나라를 쳤고 신라와 당으 전쟁이었던 나당전쟁 시작입니다)


당나라 황제는 크게 노해서 당나라 장수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아서 군사를 출동시켜서 신라를 공격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서 문무왕의 관작을 박탈했습니다


이 때 김인문은 우효위 원외 대장군 ,

임해군공이 되어서 당나라 서울(수도) 에 있었습니다


당황제는 (문무왕의 왕위를 박탈하고 김법민 김인문 두 형제와

신라의 내분을 목적으로)

김인문을 임금으로 삼아서 본국(신라)으로 돌아가서

그의 형(문무왕 김법민)을 대신하게 하고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했습니다


김인문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당황제의 허락을 얻지 못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 때 마침 무무왕이 사신을 보내서 공물을 바치며 사죄하였므로

(문무왕의 화전양면전술[앞뒤가 다른 전술]로 당나라와 전쟁을 하면서도

당나나라는 거대제국에 극도로 조심했던 문무왕이었고

이렇게 조공을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황제는 문무왕의 죄를 용서하고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으며

김인문은 중도에서(혹은 일하는 도중) 돌아가서

역시 이전의 관직을 다시 맡게 되었습니다


조로(당고종의 10번째 연호) 원년(1년)

진군 대장군 행우무위위 대장군직을 거쳐서

재초(당예종의 5번째 연호) 원년(1년 , 690년이자 신라 31대왕 신문왕 10년)

에는 보국 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 장군에 제수되었습니다


연재(당나라[무주] 여황제 측천무후의 4번째 연호 , 694년)

원년(1년 , 신라 32대왕 효소왕3년) 4월 29일

당나라 서울(=수도)에서 병으로 죽었습니다

향년 66세였습니다


김인문의 부음(사망소식)을 듣고 당황제가 놀라고 슬퍼해서

수의(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를 주고 관등을 더 높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조산대부행사례시대의서령 육원경과

판관 조산랑 , 직사례시 모 등에게 명해서

영구(시체를 담은 관)를 호송하게 했습니다


효소대왕(신라 32대왕 효소왕)은

김인문에게 태대각간 太大角干 (신라 전설의 최고위 관직 김유신 장군도

태대각간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을 추증하고

유사(벼슬아치)에게 명령해서

연재 2년 (당나라 ,무주 여황제 측천무후의 4번째 호인데

6개월간 사용했다는데 2년입니다) 10월 27일

서울(=수도 , 서라벌) 서원(서쪽 언덕 즉 서라벌 서쪽 언덕)에

장사지내게 했습니다


김인문은 일곱 번이나 당에 들어갔으니

당의 조정에서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한 월일을 계산하면

22년이나 됩니다 (신라와 당과의 관계를 조율했던

신라의 대당 외교통, 외교관이었습니다)


<김부식>그 당시 양도 해찬 海湌 (=파진찬 , 신라 4등벼슬) 도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 西京 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처음과 끝 , 전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라봉봉>신라에서는 태대각간이 천년왕조 역사상 딱 2번만이 있었다는데

태대각간 벼슬은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을 위해만든 특수관직이어서

사실상 김유신장군용 벼슬이었고 김유신 장군이 고구려 멸망 이후

문무왕에게 받은 벼슬이었는데

김인문 역시 김유신장군이 장군으로서 활약할때

신라의 외교관으로서 삼국통일에 기여한 바가 컸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김인문은 김유신 장군과 달리 사망하고 나서 태대각간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나라 황제 당고종은 김인문을 매우 좋아했다 하고

김인문 역시 당황제를 모시며 신라와의 관계를 조용히 조율했다고 할 수 있고

신라에게 당나라 소식통이자 외교관이었다 할 수 있으며

오랜 세월을 당나라에서 보내며 활약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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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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