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옛날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진흥왕때 신라에서 아름다운 여인(역사서에 미인이라고 써있는거 같습니다)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여인을 뽑아서 사람들이 모이게하는??원화제도를 만들었는데요

준정이 남모를 질투해서 남모에게 독이든 술을 먹이고 강에 던져 죽였다고합니다,,

일이 들어나자 준정도 사형당하고 이에

여자를 뽑지않고 곱상한 남자들을 모집했는데 이게 화랑도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진흥왕때의 화랑제도>

신라 24.진흥왕


화랑은 주로 귀족자제들이었고 그를 따르는 평민자제인 낭도라는 사람들이였습니다

화랑은 청소년,청년들의 집단이었고 전쟁때에는 군인으로 나가고 그랬던거 같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전에 원광법사라는 신라의 승려가 있었습니다

중국에 유학해서 돌아왔는데요

원광법사에게 귀산과 취항이라는 화랑이 찾아가서


저희들 세속 선비는 몹시 어리석어서 아는것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데 평생의 교훈으로 삼을만할 가르침을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인정이 많은 원광법사는 그들의 물음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고합니다


불교에는 10가지 보살계가 있지만 너희들은 신하된 몸으로서 이를 필경 지켜내지 못할것이다

다만 세속인으로서 지켜야할 다섯가지 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사군이충(事君以忠)
둘째는 부모를 효도로 받드는 것이요, 사친이효(事親以孝)
셋째는 벗을 신의로 사귀는 것이요, 교우이신(交友以信)
넷째는 전쟁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임전무퇴(臨戰無退)
다섯째는 산 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려서 한다는 것이다. 살생유택(殺生有擇)

너희들은 이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여기지말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에 귀산이 다섯번째 살생유택의 뜻을 묻자

원광법사는 동물을 잡을때는 봄,여름에는 잡지말고,어린동물들을 잡지말고

꼭 필요한 만큼만 죽여야 한다 라고 했고 이에

귀산과 취항은 기쁜마음으로 공손하게 절을하고 물러갔다고합니다

이는 신라 화랑도의 중심 이념이 되었다는거 같습니다


602년 백제에서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할때

귀산과 취항은 세속오계에서 임전무퇴 구절을 부르며 백제군에 맞서다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임전무퇴는 어찌보면 일본 사무라이정신이나

일제강점기때 천황을 위해 옥같이 아름답게 부서지라는 뜻의 옥쇄

진짜 뜻은 천황을 위해 자살하라는 거나 할복, 비행기에 폭탄을 실고

미국군함에 자폭공격하라는 가미카제 같은거나,,

유럽의 기사도 정신 이런것과도 연관이 있는거 같습니다

낭만주의적 어리석음이라는 말도 있는거 같은데요


이렇게 신라시대에 청소년,젊은이들이 화랑집단에서 전쟁에 동원되서

죽어갔다는게 안타깝습니다

삼국통일때 백제 계백장군과 신라 김유신장군이 황산벌에서 싸웠을때도,,

반굴과 관창이라는 신라 화랑도 이런거로 죽었습니다,,


<반굴과 관창>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군대가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 장군의 5000결사대,,와

싸웠는데요 백제 입장에서는 황산벌에서 지면 나라가 멸망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계백 장군은 10배가 적은 군대로 신라군을 4번을 이기는데요

이에 신라는 화랑 반굴을 내보냅니다 오늘날에는

혼자라기보다 적은 병력으로 가지않았나라는 추측이 있는거 같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조카이자 사위인데요

이는 골품제같이 신분유지때문에 근친혼을 한거 같습니다,,

반굴은 당연히??,,백제군에 죽고

이에 또 김유신 조카 관창이 선봉으로 가서 사로잡힙니다

계백 장군은 어린 관창의 용맹에 감탄하고 돌려보내는데요

관창은 한스럽다면서,, 우물물 한번 마시고 다시 가서 백제군에 죽습니다,,


이에 신라군은 용기백배해서 계백장군과 5000결사대는 20명정도 사로잡히고

모두 죽는거 같습니다,,황산벌 전투는 끝납니다,,

화랑에서 임전무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데요,,

반굴의 나이는 알수가 없는거 같은데요 관창은 16살 이었습니다,,

신라에서는 또 김유신장군은,,이렇게 어린 화랑들을 전쟁터에 보낸거 같습니다

또 김유신 장군 스스로도 이렇게 직접 나갔던거 같고요

그러다 김유신 장군의 아들 김원술도 이렇게 나갔는데

살아돌아오자 아들을 죽이려했고 문무왕은 죄를 용서하였다는데요,,

이후로 아들을 만나주지 않았다고합니다

다른 화랑들은 죽었는데 김유신 장군 아들은 살아돌아왔다는거때문에

주변 귀족들 눈치를 봐서 그랬던거 같습니다,,

김유신 장군이나 태종 무열왕 김춘추도 화랑 출신이었다는데요

이렇게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죽어나간거 같습니다,,

화랑제도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신라가

멸망하자 사라지는거 같습니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김효종,효종랑의 아들인데요

효녀 지은 설화에 나오는 김효종,효종랑도 신라 화랑이었다고합니다

<효녀 지은 설화, 2번에 있습니다>

한국역사에서 봤던 슬픈 사람들

산과 들을 다니며 모험심과 의협심을 중시한 청소년,청년 집단이었던거 같은데요

위작설이 있는 화랑세기에서는

신문왕때 김흠돌의 난때 퇴역,현역,, 화랑들이 반란에 다수 가담해서

화랑제를 폐지하다가 다시 부활했으나 옛날같이 칼을든??,, 무사적 기능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거 같습니다

화랑 관련 역사책으로는 신라시대 진골귀족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라는 책이있는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때까지는 존재했던 책같습니다

화랑들의 생애와 신라왕호가 있다는데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거 같고 일제강점기때

일본 궁내부 서릉부라는 일본 왕실 도서관에서 일하셨다는 박창화라는분이 화랑세기를 발견해

필사라고 직접 배껴쓰셨다는게 있는데요 오늘날에는 위서,진서 논란이 있는거 같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서릉부에서 12년 일했던것은 사실이고 이분 주장으로는 일본 서릉부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때 건너간 한국 고대사 책들이 있다는거 같습니다

일본은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총독,1910년에 한국 고대역사책들을

불온 서적이라 가져갔다는거 같은데요

박창화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본 서릉부에 우리의 책들이 있을수 있는거 같습니다

조선 왕실 의궤도 반환됬는데요 일본정부에서도 꾸준히

약탈해간,,한국 서적들을 한국정부에 반환해 왔다는거 같습니다

반일 감정과 다르게 그래도 꾸준히 반환한거 같은데요,,

그래도 아쉽습니다 일제강점기,일본에 나라를 뺐기고

산과 들 광산만 뺐긴게 아니라 이렇게 역사책들이나 문화재들도

일본으로 많이 넘어갔던거 같습니다

오늘날 화랑세기는 박창화씨의 필사본만 현재 남아있고

이는 위서,진서 논란이 있습니다

화랑과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