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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때 영조의 아들이었던 또 영조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는 여러 비행과 살인 등으로 영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사도세자를 뒤주,쌀을 담아놓는 나무상자에 넣고 굶겨 죽이는데요,,

영조는 백성들에게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을 없엔 왕이었으나

자식,사도세자에게는 그 방식이 잔인하고 비정하게 죽인 아버지였던거 같습니다,,

이런 사례는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치,여태후와 비슷한거 같습니다

백성에게는 형벌을 가하지않고 유능한 사실상 여자 황제,여황제였으나

가족 관계는 유방의 부인을 잔혹하게 죽이거나 그랬습니다,,


이렇게 사도세자가 죽고 차기 왕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왕세자,아들 자 子가 아닌 왕세손 손자 손 孫이 됩니다 

정조 역시 할아버지 영조를 닮아 유능했던 왕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사도세자를 죽이라 압박한??,, 신하들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거 같습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뒤에 대신에

영조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하게 하셨고 신하들을 안심시키려는

설명이 있었으나 앞에 말의 영향이 너무 커서 유명한거 같습니다,,

이후 정치적 행보에서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는 행보가 있었고

아버지 묘지가 있는 수원 화성도 그 이유에서 쌓고 여러번 행차하십니다,,


<수원 나그네 전설 이야기>


이렇게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능으로 자주 행차하시던 정조는

어느날 미복 차림으로(지위가 높은 사람이 몰래 살피러 다닐때

남의 눈을 피하려 남루한 옷차림으로 암행어사가 대표적 사례 같습니다)

아버지가 묻혀있는 수원 융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민간의 생각,민심들이 궁금해서였는지 지나가다가

수원 농부에게 사도세자의 능을 가르키며 저곳이 어떤곳이냐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농부는 저곳은 뒤주대왕 애기능이라고 대답했고

정조는 그렇게 부른 이유를 묻자

임금(왕)이 되실분인데 임금이 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

뒤주대왕이시고 애기능이라 한 이유는 임금의 산소를 능이라 부르는데

왕이 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애기능이라 했다하자

정조는 내심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당시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존하려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못하고 있던 상황이라 했다는거 같습니다


이에 기뻐한 정조는 농부와 이야기하다

농부가 책도 읽고 과거도 여러본 실력있는 선비였던거를 알았다고 합니다

옛날에 선비들도 먹고살아야해서 자손 3대 이상이 과거나 벼슬을 갖지 못하면

선비,양반 신분이 사라지거나 가난한 양반을 향반,잔반이라고도 했습니다

중앙 정계에서 권력이 있는 양반을 권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선비들도 먹고살려고 직접 농업,상업,수공업을 하기도 했고 현실적

학문인 실학을 연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조와 이야기한 농부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조와 이야기한 농부는 과거시험도 여러번 보았는데 계속되는 낙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조선 중앙,수도 서울 내에서도 적은 관직수에 지원자는 많았고

이미 과포화 상태에 급제자들도 넘쳐나는데 관직수는 한정되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이야기로 가서,,

정조는 그렇게 아버지의 능을 높여부르는 농부를 위해

과거시험을 다시 보라하고 시험 문제도

융능(사도세자 묘) 근처에 있었던 자신과 어느 선비의 대화를 적어보라는 내용이였다고 합니다,,

농부는 당연히 과거에 급제했고 자신과 이야기한 선비가

조선의 임금님이었던거를 알게되었다고 하는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야사이고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거 같습니다

가뜩이나 너무 지원자가 많아 대부분 합격하지 못하는게 과거인데

이렇게 왕이 계속 시혜를 내리는 사례를 온정주의라 하는거 같습니다

온정은 필요하나 이런식으로 관직을 가진다면 관직에 있어서도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거 같고요,,

그러나 야사,민담은 단순히 과학적이거나 실제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민간의 바람,이상향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한거 같습니다

따뜻하거나 인간적인 이야기가 많은거 같으나 인터넷이 발달하며

저는 아 야사였네 이런거를 자주 알게되는거 같습니다,,

수원 나그네 전설이 말해주는것은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는다는

우리나라 속담같이 착한 평소의 언행이나 말들이 우리를

가치있는 사람이 되게한다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조,정조 시대때는 상업발달이나 한글 소설이 나타나고 판소리등

여러 문화들이 발달한 시기입니다 그래서이지 전설이나 민담등도

많은 시대같고요 특히 영조,정조는 평복차림으로 백성들을 살피며

암행어사 이야기나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거 같습니다


<정조 임금님 그림 사진 왕의 그림을 '어진' 이라고 부릅니다

정조 어진 사진입니다>


사실 영조 야사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조 어머니의 출생이 무수리,궁궐 나인이어서

어머니 묘소를 능이라 부르지 못하고 원이라 부르다가

어떤 나뭇꾼이 어머니 묘소 근처에서 나무를한거를 본

미복(변장)차림 민생을 살피던 영조는 어디서 캐왔냐해서

무식했던??,,나뭇꾼은 소령원을 소령능이라 부르다 영조가

기뻐하며 나무꾼을 소령원의 묘지기 능참봉 벼슬을 주었다는 야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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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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