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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은 신라 53대왕 신덕왕 박경휘의 아들,

54대왕 경명왕의 친동생으로 마지막 박씨 왕입니다

이당시 신라는 옛날 통일신라라는 말도 옛말이 된거같고

경상도 일부지역이나 경주지방에서나 영향력이 있는

도시국가화 됩니다 그동안 지방은 농민봉기와

지방에서 호족들은 스스로를 성주나 장군 이라 부르면서

독립하거나 사실상 독립세력으로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의 왕건,후백제의 견훤 입니다


또 골품제에 불만을 느낀 신라의 지식인,6두품 들은 고려에 협조합니다,,

6두품들은 능력이 있어도 출생이 6두품이면 평생 6두품이었고

다른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물론 김춘추나 김유신 같은 성골이 아니거나(진골 김춘추)

가야계(가야 김무력장군의 손자 김유신)였어도 왕이되거나 신라의 권력자가 된

사례도 있다 하겠으나 단순하게 신라가 골품제로 망했다기보다

이런 폐쇄적인 정치도 영향을 했었을 것이고 농민들의 도적화나 사람대우를 해주는 스님이

된다거나 하며 세금도 줄었고 수많은 정치적 내부모순과 세계의 변화 등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거 같습니다,,


1000년 가까히 왕조를 이어가던 신라가 멸망해가는것을 보고

신라의 지배층들이나 마지막 화랑들,신라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있었을까요??,,

신라의 왕은 선대 왕들을 제사지내는 사당같은데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렇게 55대왕이된 경애왕은 망해가는 영토도 작아진 신라를

다시 살리려 여러 시도들을 하게되는거 같습니다

요나라가 일어날것을 예측하고 외교를 했다거나 중국,또

인망이 높았던 고려 왕건과 친고려 외교를 했고

고려와 연합해서 후백제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후백제의 견훤은 분노해서 신라 수도 서라벌,경주를 공격합니다,,

이미 신라는 대야성도 후백제에게 뺐기고 즉 주요 다른 지방으로 가는

관문이 사라진 경주에서 명맥만 유지하던 국가화된거 같은데요,,(물론 거의

천년을 이어온 나라답게 무시할 나라는 당연히 아니었을것 입니다 이미

백성들도 신라라는 나라가 익숙했을것이고요)

한 나라의 수도가 이렇게 견훤의 군사들에게 공격당하고 경애왕은

이당시 포석정이라고 술마시거나 잔치,연회를 하는곳이 있었는데요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있던,,경애왕은 견훤에게 사로잡혀서

자결합니다,,

이당시 견훤은 고려의 눈치를 봐서 경애왕을 직접 죽이는게 아닌

자결을 강요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는거 같습니다,,

견훤은 이후 노략질과 견훤은 경애왕의 왕비를,,

견훤의 장수들은 경애왕의 첩들을 강간합니다,,

그리고 귀족들과 경애왕의 동생을 포로로 잡고

견훤은 이당시 백제 의자왕의 한을 씻었다고 합니다

견훤 입장에서는 신라가 이미 망해가고 위에서는 덕있는 왕인,,

왕건이 공격하는데 가뜩이나 신라가 고려에 붙어서 공격하자

약이 올라서,,공격했다는 말도 있는거 같고

이는 신라가 수도가 공격받아 왕이 죽고 경애왕의 동생

박효렴과 재상 영경이 전라도 전주로 포로로 사로잡혀갑니다,,

한나라의 수도와 왕비가 강간당하고,, 왕의동생과 재상,포로들과 진귀한 보물들이 약탈당할정도로

이미 신라는 모든게 망해가던 시기였던거 같습니다,,

또 견훤의 의자왕의 한을 씻었다는 말은 견훤 스스로는

신라 장군 출신이었으나 견훤이 일어난 전라도 지역은 본래

백제땅이었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로 해서 그동안 살아가던

백제 유민들에게 보여주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는거 같습니다,,

고려시대에도 고려라는 이름 이외에 삼한이라는 말도 사용된거 같고

사실 20세기까지만해도 여러 방언,사투리 들이 많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특히 제주도같은 섬방언은 오늘날에도 번역을 해야할정도 일수도 있는거 같은데요

이후 세종대왕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며

조선 후기 대한제국때 삼한을 통합해 대한제국 이름으로 가고 오늘날 대한민국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삼한은 보통 마한(백제),진한(신라),변한(가야)라고 의미하는게

한국 고조선 멸망이후 삼국시대까지 의미겠으나

삼국통일을 삼한일통이라고도 부르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일컷는 말이 되었고 대한제국도 그것을 계승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신라왕들은 멸망전까지 계속해서 고려에 줄을 잡으려 했던게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사회에서 신라인,신라 왕손들의 중앙정계 진출로 되는거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강자에게는 약하게,사대하고 약자에게는 강하게 나가는

신라 초기때부터 계속되는 그런 외교방식은 멸망때까지 변하지않고

계속되는거 같습니다,,물론 이런게 합리적이라 할수도있고

신라 초중기에는 효과를 봤다 하겠으나 사람들은 이미

신라의 그런 방식을 알았을것이고

사람은 역사로 학습을 하기에 더이상 멸망기에는 이런 방법으로

효과를 볼수는 없었던거 같습니다,,


<경애왕과 포석정 이야기,,>

경애왕은 그렇게 망해가는 신라에서 적극적으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일어나는 거란,요나라와

새로운 강국 고려,그리고 전통적인 강국이었던 중국과

외교 관계,제사 등으로 나라의 위기에서 구하려했으나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때 고려를 돕는등 바로 옆 후백제를

분노하게했고 또 이렇게 포석정에서,,

술과 연회를 하다가 죽은거 같습니다,,

저도 옛날에 경주를 가서 포석정을 본거 같습니다

1000년전의 유물들이 오늘날에도 원형으로 그렇게

남아있다는게 신비로운거 같고 또 포석정을 알아보니

비록 사치나 다른이야기로는 제사지낼때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보통 연회로 쓰였다는거 같고 고대 신라인들의 정밀한 과학기술이

있는 유물이라는거 같습니다,,


그림판으로 그렸습니다,, 오늘날에는 물은 흐르지 않고 거북이도 사라졌는데요

옛날에는 이렇게 거북이 입에서 물이 나오고 흐르는 물 가운데 섬같이

있는 땅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는거 같습니다,,

경애왕은 망국의 위기에서 놀고있는 폭군이었다는 후백제나

고려의 프로파간다(선전)일수도 있다는거 같으나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라는거 같습니다

이렇게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어놓고 놀았다는거 같습니다,,

저 왕관쓴사람은 왕이라 할수있겠고요,,

포석정에 있는 과학으로는 포석정은 반듯하게 흘러가는 모양이 아니라

저렇게 구불구불 합니다 그래서 술잔들이 빠르게 한바퀴 도는게 아니라

때로는 물속에서 정지되다싶이도 하고 그러면서 도중에 그 안에서

시를 지을 시간이 생긴다거나 그러는 신라의 사치스러운 연회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또 물을 토하는 돌거북이는 1870년대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문화재 보존의식이나 이런게 없어서 도굴이 흔하거나

이런 문화재 방치들이 세계 여러나라에서 있었습니다 현대에서 문화재는

관광 수입도 되고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수있는 귀중한 사례가 되기에

보호하는거로 가게 된거 같습니다,,물론 전쟁이나 기아(굶주림)등이 있을때

수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되거나 외국으로 팔려나갔을 것이고요,,


저가 가본 나정쪽이나 포석정쪽은 바닥이 매우 단단한 그렇다고

콘크리트도 아니고 흙이었던거 같은데요 저렇게 포석정옆에 나무도 자라고

그렇게 단단한 땅에서 거목들이 자라고 있다는것도 놀라운 일들 같습니다,,

이후 사실은 992년이나 천년왕조라고도 불리는 마지막 56대왕 경순왕 이야기를

하면 길고 길었던 56대 신라 마지막왕까지의 이야기가 끝나게 됩니다

경순왕 이야기는 비록 세계 여러 망국들이 그렇듯이

내,외부 사회가 혼란과 모순으로 있었다해도 중국 청나라 마지막 푸이황제의 이야기

마지막 황제 영화나 한국 드라마 명성황후 같이 망국,마지막 왕이라는

그런 어떤 쓸쓸하기도 하고 처량한 그런 이야기가 있는거 같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끝까지 아버지 경순왕에게 고려에 의지하는 항복을 반대하다

개골산(금강산)으로 가서 마의(삼베)를 입고 살다가 죽었다는 마의태자 이야기가 있고요

그러면,,경애왕과 포석정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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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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