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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1000년 왕조라 불리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이야기입니다

1000년이면 고려 500년 조선 500년해서 거의 2왕조가 나타나던 시기였고

중국은 보통200~300년정도 같으니 여러 왕조가 들어설 시기일것입니다,,

일본은 외적의 침입도 거의 없다싶이했고 한번도 왕권교체가 없었고요

그래도 고구려,백제도 700여년을 가기도 하나 천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먼 시간일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수천년전이나 신라유물들을

보면 그 오랜시간동안 세월에서도 아직도 남아있는게 신비로운거 같고요,,


사실 신라왕조는 992년입니다 보통 1000년이라 하는거 같고요

고구려가 망할때 내부사회의 갈등이나

백제가 망할때 불길한 징조들도 신라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국기는 오늘날에 초승달로 추측하는거 같고요

옛날에 백제 마지막왕이라는 의자왕때 백제는 둥근달,

신라는 초승달 이라는 점괘가 나왔는데요

백제는 이미 다 찼으니 기울것이고 신라는 아직 다차지 않았으니 잘될것이다

이런 의미였던거 같습니다 그렇게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들도

신라인,귀족들,화랑들,신라 왕들 모두

신라가 망해가는것을 느꼈던거 같습니다,,

옛날에 시조 박혁거세와 초기의 지혜로운 신라 왕들부터

중기에 김유신과 김춘추라는 큰 인물들과 삼한일통,삼국통일

통일신라때의 당나라와의 무역과 청해진의 해상무역등의 번영과

헌강왕때의 도성의 노랫소리와 태평성대

그리고 그안에서도 충신 박제상 이야기나 화랑,선덕,진덕여왕,

김유신과 천관녀,꿈을사고 김춘추의 아내가된 문희,문명왕후 같은 사랑이야기들,

황룡사 9층 목탑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던 고대 한국의 나라 신라 이야기를 쓰다보니

마지막 경순왕의 이야기까지 쓰는거 같습니다,,

모두 옛이야기가 됬고 현재 경주에는 그 장소들은 빈 터가 됬거나

풀밭이 되었겠으나 그곳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꿈을 꾸었고

가지각색의 인생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뭔가 가을이 되서인지 저가

이렇게 멋있는 말을 하는거 같습니다 ^6^,,

한가위,추석 즐겁게 보내세요~~


<경주 첨성대 야경>


그러면 마지막 신라의 왕 경순왕 김부의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천년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그렇게 신라는 55대왕 경애왕이 수도 서라벌,경주까지 온 후백제 견훤에게

자결강요로 자결,,사실상 살해당하고 왕비와 첩들은 강간,,

재상과 왕의 동생 박효렴은 후백제의 전라도 전주로 끌려가게되고요

견훤은 신라에 다시 김씨왕인 김부 를 신라 왕으로 하게하고 돌아갑니다,,

선덕여왕때도 신라는 고구려 백제 일본에게

둘러쌓여 공격받고 내부적으로는 재상이라 할수있는(상대등) 비담의 난 등

국가 멸망까지 간 상황이라 했겠으나 그당시에는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선대때부터 있어온 선정과 한강유역의 확보,활발한 외교활동으로 국난을 타개했으나

이번에는 이미 신라는 한강도 없었고 김유신이나 김춘추같은 왕을 보호할 세력들도

이미 골품제에 환멸을 느껴서 다른 세력들에 붙어버리거나 떠났다 할수있겠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지식인이라 불리는 6두품 최치원은 신라 말기에 개혁을 하려다

좌절후 지리산으로 들어간 사례가 있습니다,,

영토는 이미 사실상 수도 경주 밖에서는 세금이 들어오지 않은거 같고

백성들도 신라를 떠나가던 시기였을거 같습니다,,


경순왕 김부는 다시 도중에 박씨왕이 있었다 이렇게

견훤에게 자결강요로 죽게되고,,견훤에 의해 왕이된 왕이었다 할수있겠습니다,,

허수아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신라는 옛날의 부귀나 영화같은거와는

거리가 먼 작은 나라가 되었을거 같습니다,,


경순왕 김부의 아버지는 효종으로 어디서 들어본 분도 있을거 같습니다

신라 사회를 울리고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는 효녀 지은 설화의

부잣집 종이되서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지은을 도운 의로운 화랑 효종(효종랑)인데요

그렇게 효종은 헌강왕의 사위가 되고 신라 왕은 보통 왕의 아들,부자상속이나

이렇게 왕의 사위가 되는 사례로 되는 경우가 많았고 김부(경순왕) 역시 아버지

효종으로 이렇게 왕위 계승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던거 같습니다,,


<효녀 지은 이야기>



이당시 경순왕의 신라는 경주 이외에 지역에 거의 영향력이 없을정도의 국가,,가 되었으나

견훤도 신라가 거의 1000년이나 이어온 나라였고 신라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친 후백제 정권을 세우기에도 어렵다 생각해서인지,, 이후 돌아갔으나

공격은 계속했던거 같습니다,,신라는 계속되는 후백제의 공격,괴롭힘이 있었으나

고려는 오히려 아무런 피해도 안주고 왕건의 덕,인망은 이미 후삼국시대에

유명했던거 같습니다 왕건 역시 이미 힘빠진 신라를 공격할 필요도 없었던거 같고

후백제와의 대치에 집중했던거 같고요,,


그러다 왕건은 경순왕 재위 4년정도(931년)에 경순왕을 '알현' 합니다 왕건은 이미 한 나라의 왕이었으나

이렇게 신라에서 나왔기도하고 이미 망국이 되었다 할수있는 신라인,신라왕 경순왕에게

이 사실은 기존 선덕여왕,진덕여왕때 나라가 망할때 당나라의 구원보다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나라는 애초에 말이 안통하는 중국,

외세였고 도와주면서도 온갖 까다롭게 굴거나 백제나 신라땅을 지배하려는 모습도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당나라도 신라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나라였고 망해가던 나라를 살려준 나라라 할수있습니다

다시 이후에 잘 지냈다고 할수있겠습니다,,

왕건은 경순왕을 만날때 군병들에게도 정숙하고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예의를 갖추고

왕경의 사녀 士女 귀부인들은 저번에 견훤이 왔을때는 승냥이,이리 같았는데

왕건이 오자 부모를 만난거 같았다고 합니다 또 어느날에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수 없음에 하소연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왕건도 인물은 인물입니다,,

왕건이 경주를 방문했을때 기병 50명만 이끌고 날씨가 풀린 봄날에 방문했다는데요

왕건은 일부로 대군을 데려온거도 아니었고 이후에도 경주에 선물을 보내기도 하며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게된거 같습니다

경순왕은 왕건의 경주 방문때

안압지에서 연회를 열어 왕건에게 견훤의 침략을 이야기하다 원통해서

왕과 신하들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왕건의 경주 방문은 정치적 의도도 있었겠으나 태조 왕건을 보면

미국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라고도 불리는 조지 워싱턴이 생각나는거 같습니다

모두 덕으로 혼란의 사회에서 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이고요,,


이후 후백제의 견훤도 아들 금강을 후계로하려다 다른 아들 신검에 의해 왕위다툼으로 금산사에

갇히게 되고 후백제도 혼란이 오자,, 드디어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을 결정하게 됩니다,,

신라 내부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992년,거의 천년을 이어온 나라를

왕건에게 항복한다는것은 그동안 신라는 강대국이 나타나면 친 외교나 사대까지는 했으나

항복은 안했기도 했고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수있겠습니다,,

이에 신라 태자는 반대합니다 또 고려에 귀순,항복한다 할때 반대하고

어전(임금의 앞)에서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일본에 나라를 잃었을때 자살하신 분들도 있었는데요,,

일본은 외국이었고 고려와 성격이 다르다 할수있었겠으나 신라인들 역시 나라가

망하는것은,고려에 항복한다는것은 슬픈 일이었을거 같습니다,,


그렇게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게 되고 후백제도 1년뒤 멸망하고

후삼국 시대는 끝납니다 고려는 또다시 흩어진 삼한,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후삼국 통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한국 고대왕조 신라는 끝나게 되고

서양식으로 하면 한국의 중세시기라 할수있는 고려가 시작됩니다,,


경순왕의 항복은 내부,태자의 반대에도 항복했고 나라를 넘긴다는게

당연히 쉬운 일이라 할수도없었으나 다른 이야기로는

이미 망해가던 신라였고 이렇게 평화적인 항복,,귀순으로 인해

신라 백성들을 살릴수 있었고 경순왕 스스로도 이후 땅을 받고

잘먹고 잘살다 죽습니다,, 외세라 할수도 없고 왕건의 덕이 알려진 시기였고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거와는 성격이 다르다 할수는 있습니다,,


경순왕은 이후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고

왕건도 경순왕 친척의 딸과 결혼하고,,평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왕건은 후삼국 시대에 호족들과 결혼을 해서 안정시키려했고,,

부인이 29명,자녀가 34명(아들 25명 딸9명)입니다,,

이후 경순왕의 후손들 경주김씨들은 고려사회에

주요 세력이 되게 되기도 하고 신라 역시 작은 도시국가 크기가 되었더라도

1000년이 이어져온 정통성 이런거때문에 고려에서도 경순왕을 왕 다음,

태자보다 위 대우를 하고 또 신라 출신 사람들이 많다고 할수있겠습니다

오늘날 김씨,석씨,박씨 이런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성씨가 신라라 할수있겠고요,,


그리고 경순왕은 경주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어서(호족 자제를 고려 수도 개경

으로 불러오는 기인 제도와 같이 사심관 제도는

거기에 땅 수입으로 살게하라는 유화,견제 정책입니다)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항복한 경순왕은 평화롭게 여생을 살다 죽는데요,,

삼국지의 유선이 생각나는거 같습니다,,

유선도 위나라에 항복하고 평화롭게 살다 죽었으나

그래도 유선같이 유비,유선 2대로 역사가 짧은 촉나라도 아니었고

경순왕은 유선같은 태도라기보다 이미 왕건에게 민심이 가있었고

신라 백성들을 살리려는 이유도 있었을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신라왕조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다음 이야기로는 가야나 발해,우산(울릉도,독도),탐라(제주도)를 쓰거나 삼국시대 설화나

이야기들을 쓸거 같습니다,,


<마의 태자 이야기>

그렇게 경순왕의 항복에 반대하며 임금앞,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당시 경순왕의 아들 태자는 반대하나 결국 경순왕은 항복하게 됩니다,,

이에 태자는 개골산 오늘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초근목피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초근목피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는 뜻으로 나물같은거를 캐며 먹고살던가하는

소탈한 삶을 의미한다 할수있겠습니다,,옛날 중국 백이와 숙제라는 사람도

상나라가 망해도 상나라에 충성을 하며 산으로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습니다,,

충신,의인의 대명사라고 옛날 책들에서 자주 인용되시는 분이고 마의태자도

그런 삶을 사신 분 같습니다,,

마의태자는 망국의 통한으로 비단옷을 찢어버리고

삼베옷을 입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고려가 주는 양식을 먹고 소,돼지처럼 먹고사느니 ,차라리 신라 사람으로

칡뿌리를 캐먹고 살겠다


하며 끝까지 신라 사람으로 살다 여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마의,삼베옷을 입고 살다 죽었다고 해서 마의태자라고 부릅니다,,


신라인들의 정서는 북한에서 쓰는 표현인 승냥이,이리나 소,돼지,개돼지라는

말들이 한국에서 유행했던거 같은데요,,신라 충신 박제상도 왜왕의 신하로 사는거 보다는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되겠다,, 이런거를 보면

비록 오늘날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나 원래부터 신라에서 이런 말들이 있었던거로

보아 역시 한민족이기는 한거 같습니다,,


신라에서는 마의태자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었고

경순왕은,,


하늘의 명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의 명을 거슬리는 자는 망하게 마련이다.

지금 나라가 고립되어 위태로운데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이 죽는 것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라며 고려에 항복했다고 합니다,,

이에 후대사람들은 비록 신라가 어쩔수 없이 항복하기는 했더라도

마의태자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덜부끄러웠고 마지막 천년 나라

신라의 자존심같은 인물로 높게 평가되는거 같습니다,,


<신라의 국기는 오늘날 문헌들 사료로 푸른 바탕에 반달 무늬로

추측되는거 같습니다 이 사진과 비슷한 모양이 아니었을까요??,,

달은 그렇게 신라인을 비췄을것이고

신라는 달과 정말 잘어울리는 나라 같습니다,,>


즐거운 추석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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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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