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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의 아들로 도중에 자살했던,, 호동왕자의 이야기입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 이야기를 쓸때 썼는데요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써봐야 될거 같습니다,,



옛날 고구려가 건국된지 얼마안된 작은 나라였을때 이야기입니다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부자(父子)관계,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1대왕인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은 부여에서 도망칠때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를 냅두고 부여에서 나와서 나라를 세웠고요,,

그렇게 유리는 아버지가 남긴 증표,반쪽짜리 칼을 들고

아버지,주몽의 나라 고구려로 와서 증표,칼을 맞춰보이고 왕이 됩니다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인데요 유리왕도 아들,태자인 해명태자가

이웃나라 황룡국에게 힘자랑을 하자,,이웃나라와의 관계 문제로

유리왕은 해명에게 자결하라하고,,해명은 자살합니다,,

해명태자도 원래 첫째아들이 병으로 죽자 왕이된 둘째였는데요

해명의 죽음으로 셋째였던 무휼이 3대왕이 됩니다

고구려 3대왕 이번 이야기 호동왕자의 아버지인 대무신왕입니다,,

호동왕자도,, 비극적인 자살로 돌아가시는 분입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자명고 이야기>


이당시 고구려는 작은 국가로 주변에는 여러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부여,옥저,동예 등이 유명한거 같은데요

이당시 고구려 왕 주몽이 비류국 왕과 활쏘기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나

고구려 2대 왕 유리왕때 해명태자와 황룡국 이야기 등을 보아

삼한 지방까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소국들도 여럿 있었던거 같습니다


이당시 고구려 왕자였던 호동은 옥저지방을 유람하다가

그곳을 다니던 낙랑왕 최리를 만나게 됩니다

호동은 얼굴이 수려하고 잘생긴 왕자였다고 합니다 낙랑왕 최리도

호동의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합니다 게다가 호동은

그당시 고구려도 작은나라였어도 북방에서 잘나가는 나라였을 것입니다,,

호동이 고구려의 왕자였다는거에 또 마음에 들어한거 같습니다,,

그래서 최리는 호동을 집으로 초대해서 딸에게 호동의 접대를 시켰다고 합니다,,

딸도 아리따운 여인이었다고 합니다,,저는 외모나 이런거로 사람을 차별하는거는 반대하나

역사에 기록되있거나 당시 사람들의 인식 역시 기록할 필요가 있는거 같습니다,,

최리의 딸 낙랑공주인데요,,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 그날 연분을 맺고

사랑을 하게됩니다


여기서,,낙랑국,낙랑공주는 한사군의 낙랑군과 다르다는 말이 있는거 같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 영토에 설치한 낙랑군은 이미 왕,황제는 중국에 존재하기에

식민 총독같이 태수를 보낸다거나 할것이지 왕이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을것입니다

물론 중국에서는 황제 밑에 왕이라는 명예직 같은게 있었는데요

보통 황실에 가족들이나 공신들이 가져간거같고 실제로 최리의 낙랑국과의

관련은 없다는거 같습니다 다른 이야기로는 낙랑군과 최리의 보통 최씨낙랑국이라

하는 나라가 같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러 설들이 있는거 같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먼저 한자는 같은 낙랑 樂浪 이고요 최리의 낙랑국은

호동왕자의 계략,대무신왕에게 멸망했고 한나라 낙랑군은 고구려 미천왕때 멸망했기에

한나라의 낙랑군과는 별개의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낙랑국에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결혼을 하게됩니다,,

뭔가 시작부터 정상적인 만남이라기 보다 아버지(최리)가 강국인 고구려의 왕자에게

시집보내려는 정략적인 의도가 있는거 같습니다,, 시작이야 그렇다 쳐도

서로 연분을 맺고 결혼까지 했고 또 이렇게 후대에도 기록,이야기 되는것을 보면,,

서로 사랑한거는 사실 같습니다 시작이야 어쩔수 없다쳐도 과정 역시 이용하고 이용하는

그런 관계였던거 같습니다,,

당시 고구려 대무신왕은 이웃나라였던 비옥한 낙랑국을 탐내고 있었으나

병사들이 쳐들어오면 자동으로 울리는 신비의 북 <자명고> 때문에 공격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명고는 신비스러운 북이라기보다 적이 공격해오면 연기로 알리는

봉화대같은 낙랑국의 정보 통신 시스템 같은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초기 고구려는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는 정복국가적 성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한이나 중국같이 비옥한 지방에서 농업으로 살수있던 나라가 아니었고

목축,유목이나 약간의 농사를 짓던 나라로 거친 성향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낙랑국도 고구려에게 정복된 나라중 하나가 됩니다,,


낙랑국에서 낙랑공주와 결혼한 호동왕자는 고구려로 돌아가는데요

같이 가는거도 아니고 혼자 돌아갑니다,,


호동이 낙랑국왕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한 사실을 알게된 호동의 아버지 대무신왕은

그것을 이용해서 호동에게 낙랑공주에게 시켜서 자명고를 찢게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했다고 합니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서 편지를 보냅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호동의 편지>

네가 너희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자명고 자명고의 고자는 한자 북 고입니다 자명종

의 자명과 한자가 같습니다 스스로 울리는 북이라는 뜻입니다)과 나팔을 깨뜨릴 수 있다면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너를 맞지 않겠다


사실 자명고는 신비스러운 북이라기보다 낙랑국의 봉화대같은 정보시스템이 아닐까 싶습니다,,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공주라는 특권을 이용해 잠입해서 정보시스템을 파괴하라는

그런 말을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낙랑공주는 여기서 남편,호동의 말을 따르면 아버지와 낙랑국인들에게

잘못하게되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혼인까지 했던 남편 호동과 헤어지기도 그랬을 것입니다,,

여기서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연인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서 이용하려한 호동왕자나 그거를 그대로 따라한

낙랑공주나 둘다 옳지 못한 선택을 한거 같습니다,,


낙랑공주는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몰래 자명고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자명고 북을 찢습니다,, 그리고 호동에게 자명고를 찢었다고 알려주자,, 호동은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말하고 대무신왕은 낙랑국을 공격합니다

이때 낙랑국인들은 평소같이 북이 울리지않았고 낙랑왕 최리는

고구려군의 기습에 고구려 인들이 소리없이

성문까지 이르게 되고나서야 자명고가 찢어진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낙랑왕 최리는 딸인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공주를 죽이고 고구려에게 항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호동은 아버지가 바래왔던 비옥한 낙랑국을 정복하게 되었으나

낙랑공주의 사망 소식에 슬퍼했을거 같습니다,,

비정한 권력 이런거를 느끼고 허무,허탈해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 대무신왕의 원비,첫째부인은 호동이 태자가 될까봐

대무신왕에게 호동이 자신을 희롱했다고 거짓으로 고합니다,,

대무신왕은 이에 호동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호동은 낙랑공주가 사망하고나서 비정한 권력에 거부감이나,

살아갈 그런거를 잃었던거 같습니다,,

호동은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왕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삼국사기)


하고 칼위에 엎어져 자살합니다,,


너무 성급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었던거 같습니다

또 사회의 바람이나 광기 등에서 휘둘린거 같고요,,


옛날 한국역사에 사랑이야기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나

무왕과 신라 공주의 사랑 서동요

김춘추와 꿈을 산 문희,문명왕후가 유명할것 입니다

보통 사랑을 이뤘다는 사례들을 보면 원만한 가정으로 즐겁게 사는거 같으나

그 과정들을 보면 고생을 매우 많이 했다는 그런게 보이는거 같습니다,,

시적으로 말하면,, 백조가 고고하게 물위에 뜨나 사실은 물에서는 계속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거 같고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너무 사랑을 쉽게 이루려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호동왕자,낙랑공주 두 사람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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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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