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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양위받은 수성>


태조대왕 94년 8월 가을에는

태조왕은 장수를 보내서 한나라 요동 서쪽

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10월 겨울에는

우보 고복장이 태조왕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복장>수성이 반란을 일으키려하니

청컨데 그를 먼저 처형하시옵소서


이에 태조왕은 ,,


<태조왕>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이있으니

내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한다

복장, 그대는 염려 말라 !


이에 복장이 대답하기를 ,,


<고복장>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아마도 오늘 대왕 폐하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아시고

죄없는 자손들에게 후환이 미칠것은 알지 못하시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12월에는

태조왕이 수성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태조왕>내가 이미 늙어서

모든일이 힘들구나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으며

밖으로는 군사에 관한 일들을 총괄하여

오랫동안 나라에 공로를 쌓아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니

내가 의지하고 일을 맡길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수있다


<수성>형님 !


<태조왕>내 왕위를 너에게 양보하겠다

이제 수성 너는 왕위에 올라서

길이 경사를 누릴지어다 !


태조왕은 곧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났고

사람들은 이에 이분을

태조대왕 太祖大王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국 기록과 중국 기록의 차이>


삼국사기를 쓰신 김부식님은 태조대왕이

양위한 글 밑에 따로 글을 쓰십니다


<삼국사기>


<김부식>후한서(중국 역사책)에 이르기를

안제(한나라,후한 황제) 건광 원년에 고구려왕 궁(태조왕)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중국 역사서에는 수성이 태조왕의 동생이 아닌

아들이라고 기록되있다고 합니다,,)


이때 현토 태수 요광이 말씀을 올리기를 ,,


<요광>고구려 왕(태조왕)이 죽었습니다

이를 기회로 삼아 군사를 출동해서 고구려를 칩시다 !


라고 안제에게 말하니

의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찬성하였고

이때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진충>전에는 궁(태조왕의 이름)이 훌륭하고

영명하여 요광이 칠수없었는데

그가 죽었다하여 치는것은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서 조문하고

예전의 죄과를 묻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하는것이 좋을것 입니다


이에 안제는 진충의 말대로 하였다

이듬해,바로 다음해에 수성이

한나라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해동고기'(한국 역사책) 에는

고구려 국조왕 國祖王 고궁(태조왕의 본명)은

후한 건무 29년 계사에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7세였기에 그의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해동고기 한국에서 쓰여진 역사서로

김부식님은 삼국사기를 쓰실때

해동고기를 1차 사료로서

참고 하셨고 중국측과 기록이 겹칠경우

한국 기록을 우선시 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전해지지는 않다고 합니다)


효환제 본초 원년(1년) 병술에 이르어

동복 아우 수성에게 왕위를 내어주니

이때 궁(태조왕)의 나이가 1백세로서

재위 94년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으니

건광 원년(1년)은 곧 궁의 재위 69년에 해당한다

한서(중국 역사책)의 기록과

고기(한국 역사책)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혹시 한서의 기록이 틀린게 아닐까 ?


김부식님은 삼국사기를 집필하시면서

이렇게 한국 역사책과 중국 역사책을 참고하셨고

오늘날에는 김부식이라는 인물에 대해

사대주의자라는 비난,비판들도 있으나

이렇게 기록이 다를경우, 중국 기록에서는

태조왕의 동생 수성을 아들이라 기록했고

한국 기록에서는 수성을 태조왕의 동생이라 기록했기에

한국측 기록을 우선시했습니다

중국은 자국 중심 사상이 강해서

타 민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했고요

자신들이 패배한 기록이나

불리한 기록,

외국의 우수한면 같은거는 의도적으로

수정하거나 삭제한 흔적들을 찾을수 있는거 같습니다,,

이는 옆나라 일본도 비슷합니다,,

또 한국 역사서에도 신라인들이 배를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들을 약탈한 해적행위같은 기록은 없으나

일본측 기록에는 신라해적,신라구라는 이야기로 존재합니다,,


결국 자국의 역사는 자국인들이 쓰는게

더 정확할수가 있고

이에 한국측 기록을 더 우선시 했다는 거로

태조왕 등의 기록에서는

삼국사기를 쓰신 인종과 김부식님의

고민의 흔적들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도 중국 역사책인 후한서에도

태조왕이 훌륭하고 영명하다고 기록되있는게

흥미로운거 같습니다

중국,한나라 역시 고구려와 전쟁을 했으나

또 타민족 역사를 중국인들이 기록할때

자국 이외에 타국 역사를 비하하듯이,

요즘말로 후려치기를 하듯이

쓰는거는 있었으나 중국인들도 사람이고 중국인 입장에서는

비록 전쟁을 했던 나라였어도 태조왕의 인품등이

중국에서도 훌륭하다고 알려진거 같습니다

중국에서 후하게 기록하거나 이야기 했던 한국인들도

천하의 보배라고 했던 조선시대 허준의 동의보감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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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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