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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7대왕 차대왕

재위기간 19년 (146~165년)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이며

태조대왕, 태조왕의 친동생이었습니다


차대왕은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한 마음은 적었다고 합니다,,


태조왕은 차대왕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별궁에서 지내게됬고

태조왕이 물려준 자리를 받아서

수성은 고구려 7대 왕이 됩니다

이때 그의 나이 76세였고

차대왕도 젊은 나이라 할수는 없었으나

형이었던 태조왕이

100살을 넘게 살고 93년을 재위하는 바람에,,

76세에 고구려 왕이 됩니다,,


중국 역사서에는 수성,차대왕은 태조왕의 아들이라 나오나

한국 고대 역사서와 삼국사기에는 태조왕의

동생이라고 나옵니다


차대왕 2년 2월 봄

차대왕은 자신의 심복,근신이었던

관나 패자 미유를 좌보(당시 고구려에는 좌보와 우보가

최고 관직 벼슬이었습니다)에 임명합니다


그러나 선대왕이었던 태조왕의 사람이며

충신이었던 고복장은

역시 고구려 최고 관직이었던 우보 벼슬에 있었고

차대왕에게 고복장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미유를 좌보에 앉히고 한달후였던 3월

차대왕은 우보 고복장을 죽입니다,,


복장은 죽을때 탄식하며 말하기를,,


<고복장>슬프고 원통하다

내가 전일에 선왕(태조왕)의 근신이었으니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자를 보고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으랴 ?

전 왕이 나의 말을 듣지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것이 한스럽다

이제 임금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새로운 정치와 교화를 백성들에게

보여줘야 할것인데도

정의에 어긋나게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한다

내가 이와같은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것이 낫겠다


고복장은 곧 형을 받았고

원근(멀고 가까움)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7월 가을


좌보 목도루가 병을 구실로 퇴직하자

역시 차대왕의 근신이었던 환나부 우태 어지류를 좌보로 삼았고

작위를 올려서 대주부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복장과 목도루 모두 태조왕때의 신하들이었고

차대왕대에 이르어 이런 권력 교체등이 있었고

고복장은 죽음으로, 목도루는 병을 구실로

벼슬에서 물러나는데요

비슷한 사례로는 세종대왕이 돌아가시고

이후 세종대왕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이

세종대왕의 손자,단종의 삼촌이었으나

반정을 일으키고 왕위를 찬탈한 후에

단종을 보필했던

세종대왕의 신하들을 죽인것과 비슷합니다

이에 세종대왕대의 신하들은 죽음으로서

저항했던 6명의 신하 사육신과 죽지는 않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6명의 신하 생육신 이야기와 비슷한거 같습니다,,

사육신 死六臣 은 죽은 여섯명의 신하라는 뜻이고

생육신 生六臣 은 산 여섯명의 신하라는 뜻입니다,,


고복장은 사육신, 목도루는 생육신의 원조격이 아니었을까요 ? ,,


겨울 10월에는

차대왕은 비류나부 양신을 중외 대부로 삼고

작위를 올려 우태라 했고

미류,어지류,양신 모두 차대왕의

옛 친구들이었다고 합니다,,


11월

고구려에는 지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차대왕 3년 4월 여름에는

차대왕은 사람을 시켜서

태조왕의 맏아들,첫째아들 막근을 죽이자

막근의 동생이었던 막덕은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봐 두려워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를 쓰신 김부식님은 이에 사론

(역사가가 이야기 밑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것)을 쓰십니다


<김부식>

논하여 말한다,


옛날 송 선공이 그의 아들 여이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아우 목공을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작은 인정에 이끌려

국가의 대계를 어지럽힌 것이다

그리고 이에따라 여러 세대에 걸친

환란이 일어났다

이때문에 춘추(중국 역사서)에서는


'정도 正道(올바른길, 바른길)에 처하는것을

가장 크게 여기라'


라고 말하였다

이제 태조왕이 정의를 알지못하고

중대한 왕위를 가볍게 여겨

어질지 못한 아우(수성, 차대왕)에게 넘김으로서

화란이 한명의 충신과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수 있으랴 ?


<라봉봉>

김부식님은 당시 유교적 사상과

충,효적 사상에 입각하여 장자,아들의 왕위 계승을

이야기하셨으나

사실 왕정이라는거 자체가

민주주의가 아닌 계급제로

여러 모순과 한계가 있는 정치입니다,,

태조왕도 정치를 훌륭하셨으나 여러 뒷일이나

예방책등은 안타깝게도

고려하지시 않으신거 같습니다,,

나라에서 이렇게 내분이 나면

큰 나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게

여러 사례에서 있었고

태조왕때에도 태조왕의 긴 재위기간동안

쌓아놓은 국력이나 여러 인물들이

정치 다툼으로 많이 사라졌고 이로인해

고구려는 여러 혼란을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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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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