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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 12년 정월(1월) 봄


군신(많은 신하)들이 태자를 정할것을

신대왕에게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에 2개월 후인

3월에 신대왕은

둘째 왕자 남무(9대 고국천왕)를 왕태자로 삼았습니다


이때 첫째 왕자인 발기는 살아있었고

이후 발기는 둘째 동생인 남무가 왕이되자

한나라를 군대를 끌여들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한국 역사도 이후부터는 후대로 갈수록

유교적 사상이나 부자상속을 중요시하나

고구려는 유목민족의 특색이라 할수있는

형이 죽었을경우 형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는

형사취수제 풍습이나 왕위의 형제상속, 신랑이

아내집,처가에 사는 데릴사위제 등

유교 문화등에 비해 유연했던 생활 풍습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풍습들은 유목민족들의

기본적 풍습이 되고요,,

그러나 이로인해 왕권이나

권력 내부 정치다툼,불안정도 많았던게 사실이고

멸망때까지 이런거는 반복되서 멸망 당시에도

왕은 아니었으나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의 아들들,형제들이 다퉈서 당나라 군을 끌여들이다

700년 고구려 왕조가 끝나게 됩니다,,


신대왕 14년 10월 겨울 그믐(달의 마지막 날)

병자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대왕 15년 9월 가을

국상 명림답부가 사망했고

그의 나이 113세였다고 합니다,,


명림답부는 99세의 나이에 차대왕을 죽이고,,

신대왕을 옹립한 인물로 재상,

고구려 최고관직인 국상이 되었고

한나라 군을 지혜로 물리친 명재상이었고

고구려의 큰 어른이었다고 할수있습니다

명림답부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내에

따로 '열전' 이라는 곳에 기록되있고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며

재상으로서 왕을 보필한 명신이었다고 할수있습니다


이에 신대왕은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합니다


<신대왕>국상 ! 나를 두고 먼저 가시다니

이 무슨 일이요 !! 흑흑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례를 지냈고

20여 호,가정의 묘지기를 두었다고 합니다,,


국상 명림답부가 돌아가시고 3개월후

12월 겨울


신대왕도 91세의 연세로 사망하십니다,,

명재상이었던 명림답부가 돌아가시고

상실감이 크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국곡에 장례를 지냈고

호를 신대왕 新大王 이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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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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