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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했던 국제 정세>


그렇게 동천왕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겨우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전쟁시에 위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고합니다


예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는

(고구려)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것을 보고(삼국사기의 표현으로

고구려왕이 중국에 배반했다는것은 사대주의적

기록 같습니다,,)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으나

동천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득래는 탄식하며,,


<득래>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않고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고구려를 침공했을때

득래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하고

그의 처자를 찾아 모두 풀어주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김부식>'괄지지' 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에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치자

고구려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검이 와서 *침노한 것이다


(*침노 侵擄 침공할 침 노략질할 노

남의 나라를 불법으로 쳐들어가거나 쳐들어옴)


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것은

고구려왕 위궁(고구려 10대왕 산상왕)때의 사실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라봉봉>

이 기록으로 보아서는

김부식님의 말대로

잘못된 기록이 아닐경우에

한국 역사서의 주장을 따른다면,,


득래는 친중파일수도 있겠으나

왕에게 굶어 죽으면서 말했다는 것도

당시 강대했던 위나라에대한 경계심으로 보인

충심이라 할수도 있는거 같으나

또 위나라에서 우호적으로 나온 고구려를

먼저 배반하고 공격했고

김부식님의 말대로 중국 기록에는 그 전

이야기거나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고

복잡했던 당시 정세를 보여주는 이야기 같습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득래의 무덤을 보호해줬다고 해도

관구검은 고구려를 공격한 중국 위나라 장수인것은 변한게 없고

이는 고구려 인들에게 중국에게 붙으면

잘해주겠다는 생색내기적 행위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동천왕 21년

2월 봄 동천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습니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고조선 단군왕검)의 택지였고

어떤 사람은 동천왕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고도 말한다고 합니다(삼국사기 기록)


<동천왕의 죽음>


동천왕 22년

2월 봄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9월 가을 동천왕은 사망합니다,,

시원에 장례를지내고

호를 동천왕이라했습니다


동천왕은 비록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수도를 뺏기고 죽을 위기까지 갔으나

초기의 자신을 괴롭혔던 우씨 왕후에게

친어머니는 아니었어도

정성으로 효도했던거 같이

인자한 왕이었고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근신(가까운 신하)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죽은 이와 살아있는 사람이나

사람을 죽여서 같이 묻는 악습으로

여기서는 왕이 죽자 슬퍼서 따라죽겠다는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례일에 동천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섶(풀)을 덮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곳을 시원 柴原 (섶 시 언덕 원)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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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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