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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24년

4월 여름

양제는 또다시 요수를 건넜습니다

그렇게 3차 고수전쟁이 시작됩니다,,


양제는 우문술과 양의신으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고

왕인공은 부여를 경유해서

신성으로 진군하도록 했습니다


우리 군사 수만명이 이들과 대항해서 싸우다가

왕인공의 강병 1천여 명에 패배했고

우리 군사는 성을 굳게 지켰습니다,,


양제는 모든 장수에게 명령해서

요동을 치게했고

그들로 하여금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했습니다


<수양제>이번에는 저번보다

원정군의 수는 적지만

더 효율적인 준비를 했지 흐흐흐 !!

고구려놈들은 속임수가 많기에

저번과 같이 나에게 보고만 하며

시간을 주기 보다는

적절히 알아서 융통성 있게 행동하도록 !


그들은 비루동,운제,지도를 이용해서

사면에서 동시에 나아가서

밤낮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했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양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수나라에서는 길이가

열댓길(열다섯 길,1길은 10척,당시 1척을

30cm가 아닌 23cm로 계산했기에

약 34.5미터,, ?? )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 심광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 보면서

우리 군사와 단병(칼이나 창같이

길이가 짧은 병기, 백병전)으로 접전하여

10 여명을 죽였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쳤는데

그는 땅이 채 닿기전에

사다리에 매달려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습니다,,


<고구려 군들>거대 사다리 위에서

수나라 군들이 줄에 매달려서

묘기를 부리는구나

허참 ;; 


수 양제는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서

즉시 그에게 조산 대부 벼슬을 줬습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자

양제는 1백여 만개의 푸대(자루)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는 푸대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30걸음)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뚝길(둑길,

요동성 앞에

흙 성을 쌓았다 보면됩니다,,)을 쌓게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높이가 성보다

훨씬 높은 팔륜누거(8개 바퀴의

대형 이동식 공성탑,,)를 만들어서

새로 만든 큰 뚝길에 세워서


성 안을 내려다 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했습니다


<고구려 장군 1>쟤네 뭐하는 걸까 ?,,


<고구려 장군 2>무시무시 하구먼,,


장차 날짜를 정해서

이러한 방법으로 수나라 군이

공격하려 하자

요동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위축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수나라에서 양현감이

반역했다는 보고가 오자

수 양제는 크게 두려워했고

또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현감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됬습니다,,


이때 수나라 병부시랑 곡사정이

본래부터 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해서

우리에게 도망해왔습니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서

후퇴를 명하게 됩니다


군수 기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같이 쌓였고

병영과 보루(방어 구축물),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으나

수나라 군사들의 마음은 흉흉해서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습니다


우리,고구려 군사가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고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다음날) 오시 午時 (오전11시~오후1시)

에서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 병사 1>간거야 ?


<고구려 병사 2>수나라 대군들도

무시무시했구려,, 날래날래 나오라우 !


그러나 이때에도

오히려 수나라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했습니다


이틀이 지나서야,,


<고구려 장군>정말 퇴각했구나,,

그렇다면 바로 추격해야지 !


수천명의 고구려 군사들이

출동해서 퇴각하는

수나라군을 추적해갔습니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해서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90리

(30~35km)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습니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했습니다


이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명이엇는데

우리 군사가 따라가면서

끝까지 공격해서

대략 수천명을 죽였습니다,,


<라봉봉>3차 고구려-수전쟁은

2차때와 다르게 100만 규모는 아니었으나

수 양제가 직접 나선 친정이었고

이번에도 30만 규모였고

고구려는 그에 비해 적은

군사였고 수비하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고구려 군사 수만명이

수나라 강병 천명에게 패배했다는 기록으로는

수나라 역시 물량에서만 압도하는게 아닌

유능한 지휘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있고

당시에도 고구려는

정말 큰 위기였다고 할수있습니다


거대 사다리,거대 흙산등은

수 양제의 평소 화려함을 추구하며

국고를 탕진했던,,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전술이라

할수 있는것이고

압도적인 자원과 이런 거대한 행위들에

고구려 인들도 위축된 모습을 보입니다


두려움없는, 강인한 고구려인들이었으나

한번 113만 수나라 군대의

충격을 느끼고서부터는

정말 강인한 용사들이었던

고구려 인들도

기존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지고있다는것을 직감했고

수 양제가 본국에서의 반란으로

퇴각하는 와중에도

극도로 조심스로운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나라 내부반란으로

수 양제는 퇴각했고

3차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끝나게 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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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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