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당나라에 지도를 바친 영류왕>


영류왕 9년

신라와 백제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말을 올리기를,,


<신라와 백제 사신>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입조하지 못하게 하며

또 자주 침략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나라 황제가 산기 시랑

주자사에게 당 황제의 신임부표를 주어서

보내며 세나라의 화친을 권했습니다


이에 영류왕은 당나라에

표문을 올려서 사죄하고

신라,백제 두나라와

화친하겠다고 했습니다


영류왕 11년

9월 가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당 태종이 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잡은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 封域圖 를 올렸습니다

봉역도는 한자풀이로는

제후가 책봉받은 영토에 관한 지도로

고구려 강토의 지도였고

지리,기술이 발달하지 않던 당시에는

국가의 지도는 곧 군사정보를

의미한다고도 할수있었고

이에 영류왕이 국가 정보를 넘겼다는

이야기로 해석될수도 있으나


이후 기록이 당나라 첩자 진대덕이

고구려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리 정보를 획득하려 노력한것을 보면

상세한 고구려 지도라기보다는

고구려 - 당나라 양국의 국경선지도로도

해석될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당 고조 이연 이후

당 태종 이세민의 집권 이후

평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되

영토를 분명히 해서

특정선 이상은 쳐들어 오지 말라라는

입장으로도 해석된다고 합니다


물론 고구려 역시 당에 저자세외교로

간거는 있다고 할수있으나

고구려 - 수나라의 오랜 전쟁,

거대 전쟁으로

고구려 역시 심각하게 피폐해졌고

영류왕은 참전용사,

전시영웅 출신 왕으로서

이 사정을 잘 알고있었고

이에 당에 저자세로 나오며

전후 복구에 집중했던

왕일수도 있을거 같습니다,,


<고구려 낭비성의 함락>


영류왕 12년

8월 가을

신라 장군 김유신이

동쪽 변경을 침범해서

낭비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여기서의 신라 장군 김유신은

이후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신라 김유신 장군이 맞습니다,,

아직 젊고(당시 35세) 신라 국정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전 시절로

당시 낭비성 전투에서

신라군이 고구려 군에게

패배하며 사기가 꺾이자

더이상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할때였습니다


이에 아버지 김서현 장군과

참전한 김유신 장군은

아버지 김서현 장군에게 나아가서

투구를 벗고 말했습니다


<김유신>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를 다하기로 기약했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감히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옷깃을 들면 갑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그물 조정줄)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


고 들었으니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저가 군대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그 말을

마치고 말에 올라서

칼을 뽑아들었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며

고구려 장군의 머리를 베어서

머리를 끌어 돌아왔고


신라군들은 이를 보고

승세를 타고 분연히 공격해서

5천 고구려 병사들의 목을 베고

1천명을 사로잡았고

고구려 낭비성 성 안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서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이

모두 나와서 항복했습니다,,


<영류왕>낭비성이 신라군에 함락됬다고 ?!

겨우 수나라군을 막았더니

이번에는 남쪽의 신라군이 문제구나,,


들어보니

신라의 김유신이라는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라 !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라봉봉>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류왕에는


영류왕 12년

8월 가을

신라 장군 김유신이 동쪽 변경을 침범해서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라고만 나오고 더이상의

기록은 나오지않으나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상 金庾信上 (상편) 에는

낭비성 전투가 자세히 기록되있고

옷깃과 벼리가 되겠다라는

김유신 장군의 명언이 나옵니다,,


당시 신라는 정말 국운이 좋았던시기로

선대로부터의 차근차근 다져진 국력과

한강유역의 풍요로운 곡창지대,

김유신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던 시기로

더이상 옛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보호를 받던

약소국이 아니었고

중국 통일 제국이었던

당나라 못지않게 고구려의

위협 세력으로 떠올랐다고 할수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수나라 100만대군과의

전투 이후부터 가뜩이나 위축되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

남쪽에 신라까지 이렇게

공격한 모습에 쉽게 함락되는

모습이 보여진거 같습니다,,


고구려,신라 모두 우리 역사지만

고구려인들의 당당한 기상은

신라에 없는 특유의 모습이기에

당시의 위축된 고구려인들의

모습은 또 안타깝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