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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버지를 찾아간 유리는

아버지 시조 주몽,동명성왕의

뒤를 이어서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이 됬고


유리왕 2년

7월 가을

유리왕은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유리왕,송양의 딸 송씨왕비>

비록 우리 아버지들은 다투셨지만

우리는 잘살아 봅시다 ~ ♡


9월

유리왕은 서쪽 지방으로 사냥을 나가서

흰 노루를 잡았습니다


흰 노루,흰 사슴은 상서로운 동물로

그런 동물이 나타난다는거는

고구려에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로 해석됩니다

(반대로는 귀신,산짐승의 습격)


10월 겨울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습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온조가 고구려 기록에 기록된 것은

시조여서이기도 하나


온조는 주몽이 유리왕,유리를 임신한 상태였던

예씨부인을 부여에 남겨두고

친구들과 남하해서 부여를 탈출해서

고구려는 건국했고

이때 주몽은 소서노라는 여인과

고구려 땅에서 재혼을 해서

낳은 아들로


유리왕과의 동복(같은 어머니) 형제가 아닌

이복(다른 어머니) 형제 였습니다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고

소서노는 주몽이 남하해 온

지방의 유지로

주몽과 재혼해 고구려 건국에 큰 기여를 했고

이에 주몽이 친아들같이 아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리가 아버지 주몽이

부여에 남겨둔 증표를 찾아서

어머니 예씨부인과 고구려로 오자


소서노와 소서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나와서

각각 나라를 건국하게 되고

비류는 위치를 잘못잡아서

결국 온조가 세운 백제에 흡수되고

그렇게 백제가 건국되게 됩니다


유리왕 3년

7월 가을

유리왕은 골천에 이궁(별궁)을 지었습니다


10월 겨울

송양의 딸이었던

왕비 송씨가 죽었습니다,,


유리왕이 다시 두 여인에게 장가를 들어서

후취( = 재취, 아내를 여의었거나

아내와 이혼한 사람이 다시 장가가서 아내를 맞이함)

를 삼았는데


한 사람은 화희이니

골천(고구려) 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이니

한나라(중국) 사람의 딸이었습니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 했으므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유리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

두개의 궁궐을 지어서

각각 따로 살게했습니다


그 후 유리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두 여인은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를 욕하며 말했습니다


<화희>네가 한인(중국 한나라 인)의

집에 살던 비첩 婢妾 (종으로 첩이된 여인)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이토록 심한가 ?

(한나라의 천한 계집이

어찌 이토록 무례하단 말이냐 ? )


치희는 부끄럽고 분해서

집으로 도망가버렸습니다


유리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해서 쫓아 갔으나

치희는 분함을 참지 못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유리왕이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꾀고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를 황조가 黃鳥歌 (꾀꼬리 노래) 라고 합니다


<유리왕>펄펄 꾀꼬리 이리저리

암수가 서로 의지하며 노는데

나의 고독을 생각하니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


(펄펄나는 저 꾀꼬리는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누구]와 함께 돌아갈고)


<라봉봉>유리왕이 그리워 한 대상이

치희인지 죽은 왕비 송씨인지는 불분명 하다고 하나

느끼는 바가 있어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으로 보아서

이때 외로움을 타신거 같습니다,,


유리왕은 이렇게 화희와 치희 이외에도

자식 문제도 있었습니다 (유리왕은 아들

해명태자를 죽였습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이렇게

주몽이 어머니와 유리를 임신한 예씨부인을

부여에 두고 탈출했던거부터 시작해서

2대왕 유리왕, 3대왕 대무신왕 등 초기에는

여러 가족문제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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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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