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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 20년

정월(1월) 봄

유리왕의 태자 도절이 죽었습니다,,


유리왕 21년

3월 봄

또다시 교제(하늘과 땅에 지내던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 났습니다


<돼지>나 잡아보라우 ? 꿀꿀 ㅎ


유리왕이 장생 掌牲 (제관, 제사지내는 관리)

설지에게 명해서 뒤쫓게 했습니다


설지는 국내(지역) 위나암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았고


우선 국내 사람의 집에서

기르게 했습니다


설지가 돌아와서 유리왕에게 말했습니다


<설지>제가 돼지를 따라

국내 위나암에 갔는데


그곳 자연이 준험하고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신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유리왕>으음,, (풍요로운 고장이겠군,,

하긴 여기 졸본은

아버지의 땅이기에 내 정치를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기도 하지,,)


4월 여름

유리왕이 위중림에서 사냥을 했습니다


8월 가을

지진이 있었습니다


9월

유리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돌아 보고 오다가


사물 못에 이르러서


한 사나이가 연못 한가운데의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유리왕에게 이르기를,,


<사물 못의 사나이>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유리왕이 흔쾌히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이라는 이름과

위씨라는 성을 주었습니다


유리왕 22년

10월 겨울

유리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습니다


(국내성은 이후부터 425년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됬습니다

이때에 국내성은 평소의 수도,

근처 위나암성은 전쟁시의

비상수도(전시수도) 였습니다)


12월

유리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보 협보( = 협부)가 말했습니다


<협보>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서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응당 열심히

사회의 안정과

정치와 백성의 구휼 사업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왕꼐서 만일 이러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왕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유리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해서

협보의 관적을 파면하고

관과의 장원(정원사 일)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협보는 동명성왕,

주몽과 함께 부여를 탈출한 개국공신이자

고구려 대신에서 그렇게

관청의 동산의 정원사 신세가 됬고

이는 유리왕이 아버지의 신하들을

견제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협보>내가 추모(주몽) 임금님과

오이,마리와 함께 부여를 탈출해서

이 나라를 세운게 엊그제 같은데


나에게 이런 하찮은 일이나 시켜서

면박을 주니 원 !


협보가 분개해서

그 나라(고구려)를 떠나서 남한 南韓

(백제나 신라쪽)으로 갔습니다


<라봉봉>그렇게 유리왕은 아버지가 세우고

자리잡은 고구려 첫번째 수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내성은 이후 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때까지 425년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됬습니다


유리왕은 아버지 주몽의 신하들 중

부분노와는 친하게 지냈으나

개국공신이었던 협보와는

서로 잘 맞지 않았던거 같고


평소 사냥을 좋아했던 유리왕에게

협보도 나름의 충언을 했으나

이에 유리왕도 개국공신을 함부로 내치기는

어려웠기에 국가 대신 大臣 을 정원관리사로

크게 낮춰버리는 방법으로

면박을 주게된거 같습니다,,


여기서 협보의 충언도 곧이 곧대로

바른말이었다기보다

협보는 개국공신이자 유리왕의 아버지였던

주몽의 친구로서

주몽과 오이,마리와 같이 졸본에서 자리를

잡은 고구려 개국공신,대신이었고


이에 수도를 옮길때의

기존 수도의 세력(협보)과

옮기려는 신 세력(유리왕)의

마찰이었기도 했을거 같습니다


옛날 왕들의 수도 이전계획(천도)은

풍요롭고 입지가 좋아서 만이 아닌

수도 내의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고구려에서 이후 장수왕대부터

평양성으로 수도를 천도한 이후에는

이번에는 국내성에서 구 귀족들의

반란(간주리의 난) 등이 일어납니다,,


젊은 주몽을 도와 나라를 건국한

협보도 유리왕대에 이르어

구 세력이 되고 유리왕이 건국한

신 세력의 대표적 모습이었던 국내성도

평양성 천도 이후 구 세력이 되는것도

역사를 읽을때 묘한 모습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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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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