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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대의 백제 역사서 편찬>


근초고왕 27년

정월(1월) 봄

근초고왕은 사신을

진나라(중국)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옛날 중국은 나라의

힘이 강하던 약하던

문화가 발달했기에

세계에서 선진국 대접은 해줬기에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중국보다 힘이 강해도

중국에 조공했습니다


조공도 굴욕적인 모습이라 하더라도

힘이 없을때는 정말 굴욕적이게

물품등을 바친거고

힘이 있을때는 형노릇은 해주고

선진문물등을 수용하고

전략적 외교관계의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있습니다


조공은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게 예물을

바치던 일이라 할수있고


고구려 전성기의 장수왕도

백제 전성기의 근초고왕도

중국에 조공을 했고

이런 조공기록은

굴욕적이고 비굴한

조공이라기보다는

근초고왕 당시 힘이 약해서가 아닌

선진 문물의 수용이나 외교관계의

목적으로 했던 조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7월 가을

지진이 났습니다


근초고왕 28년

2월 봄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7월 가을

청목령에 성을 쌓았습니다

독산 성주가 주민 3백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갔습니다


근초고왕 30년

7월 가을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습니다

근초고왕이 장수를

보내서 방어하게 했으나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근초고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해서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구려도 근초고왕에게

고국원왕이 활을 맞아서

전사(전쟁에서 사망)했으나

한창 잘나가던 시기였기에

근초고왕에게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11월 겨울

근초고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김부식>고기 古記 (현존하지는 않으나

김부식님이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참조한 기록)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와서

박사 博士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


라고 기록되있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는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근초고왕의 칠지도>


백제 최전성기의 왕인

근초고왕때 일본에 전해졌다고하는

칠지도 七支刀 (일곱 버팀,지탱,가름 칼)라는 전설의 검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일본역사서 [일본서기]에만

기록된 전설의 검이었으나

1873년 일본 신궁에서 칠지도가 발견되며

일본서기의 신빙성을 증명하는 주요 유물이고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칠지도 사진, 이름같이 하나의 칼에

여섯 작은칼이 있어서 7갈래의 칼인 칠지도가 됬습니다>


일본은 원래 한국에서 가야에게

주로 선진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근초고왕대부터 가야가 했던 역활을

백제가 하게된거로 보이고

대표적인 유물이 칠지도 같습니다


칠지도에는 이렇게 써(새겨져)있습니다


<칠지도 앞면>泰[和] 四年 十一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百鍊鐵七支刀 [出]辟百兵 宜 供供侯王□□□□作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후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

만들었다


<칠지도 뒷면>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 爲倭王旨 造 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귀하게 성음 聖音 으로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오늘날의 연구결과로는

칠지도는 근초고왕대가 아닌

백제 전지왕 4년 11월 16일에 만들었으며

후왕은 백제에 신속(신하로 예속)되있던

왕이며 이에 따라 칠지도는

백제왕세자 구이신(구이신왕)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라봉봉>백제 기록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중에

자료가 가장 적고 기록이 부실해서

최전성기의 왕이라는 근초고왕대의 기록인데도

너무 기록이 적고 부실한게 안타깝습니다,,


김부식님이 참조했던 [구삼국사]나

[고기] 등 옛 서적들이나


백제 박사 博士 고흥이

썼다는 [서기]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는게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분명 그이전부터 한자같은

기록들이 쓰여진거는 사실이나

본격적으로 나라의 역사,

백제의 역사서 편찬이 시작된거 같습니다


고흥 박사가 썼다는 [서기] 書記 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 日本書紀 같이

서기라고 되있고 일본서기에서

기자는 비록 다르나

일본사기,일본국사 이런게아닌

일본서기가 된 이유는

백제의 [서기]에 영향을 받아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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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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