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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백제 22대왕 문주왕 文周王

재위기간 2년 475~477년


문주왕은


<김부식>문주 文周 를 문주 汶州 로도 쓴다


개로왕의 아들입니다


처음에 비유왕이죽고

개로(개로왕)가 왕위를 이었을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백제 최고관직 오늘날 국무총리)에

이르렀습니다


즉 문주왕은 왕이 되기 이전부터

백제 최고위직을 지내며

아버지를 보좌했다고 할 수있습니다


개로(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해서 한성을 포위했습니다


개로(개로왕)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서 구원을 요청토록 했습니다


그,문주는 신라(당시 신라 20대왕 자비왕, 자비마립간)

에서 구원병 1만명을 얻어서 돌아왔습니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개로왕이 붕어,사망해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습니다


<부여문주>늦었구나 !

아바마마는 고구려 군사들에게 죽었고

도성은 파괴됬다,,


<백제 장군들>지체할 틈이 없습니다 !

어서 국난을 수습하시고

재빨리 왕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


<부여문주>,,


<백제 장군들>지체하시면 안됩니다

왕위에 오르소서 !!


<부여문주>알겠도다 !


그렇게 부여문주는 백제 22대왕

문주왕이 되었고

문주왕, 그는 성격이 *우유부단


(*우유부단 優柔不斷 어물어물하기만 하고

딱 잘라 결단(決斷)을 하지 못함,

결단력이 부족한 것)


했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했으므로

백성들도 그,문주왕을 사랑했습니다


<백제 백성 1>건길지(왕)가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며 ?


<백제 백성 2>그래도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이야

현재같은 국난을 수습하실 분으로 적격이지 !


10월 겨울

문주왕은 웅진(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문주왕>한성은 이미 파괴되었고

고구려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

남쪽의 곰나루(웅진)로 수도를 정하겠노라 !


그렇게 493년간 이어진

백제수도 한성(오늘날 서울특별시)은

웅진(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수도를

옮기게 됬습니다


웅진의 유례는

웅진 熊津 말 그대로

곰 웅 熊 자에 나루 진 津 자로

곰나루라는 뜻이고 실제 순 우리말,고유어 들로는

고마나루, 곰나루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며 웅진이 된거 같고

다음은 왜 곰나루,웅진이

되었냐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웅진의 유례인 곰나루 전설>


웅진의 원래 말은 한자 풀이말대로 곰나루이며

웅진나루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옛날 한 농부,나무꾼이 연미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암컷곰, 암곰의 눈에 띄게 됬습니다


암곰은 당시 발양 發陽 ?? (발정 같습니다)이 나서

임신할 때가 됬고 남편을 구하던 참이었는데

나무꾼을 보게됬고

성별을 떠나서 곰은 곰이기에,,

암곰은 힘이 세서 나무꾼을 잡아서 끌고가서

곰굴에다가 큰 바위로 문을 막아서

꿈쩍도 못하게 가둬뒀습니다,,


거기서 암곰은 계속 남자 나무꾼을

가둬둔채로 먹을거도 주었고

그러면서 나무꾼 사이에서 임신도 해서,,

(?? ,, 전설이니 이해해야 할듯요,,)


새끼곰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무꾼과 암곰 사이에서

이후 한마리를 더 낳고,,

두마리의 새끼곰이 태어나게 됬고


암곰은 평소엔 사냥을 나갈때

나무꾼이 도망치지 못하게,,

꼭 굴 입구를 바위로 닫아놓고 나갔으나

이제 나무꾼과의 사이에서

새끼까지 낳았기에,,


<암곰>이제 안심해도 되겠구먼,,

그르니게 워두루 가단 안할 테지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

그니까 어디론 안가겠지 ? 의 충청도 사투리)


하고서는,,

이제 됐다 싶어서 사냥을 나갈때

굴 입구를 돌로 막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무꾼은 이때를 기회로 삼아

재빨리 굴을 나와서

강으로 뛰어들어서 헤엄쳐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나무꾼은 암곰과 살며 새끼도 낳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했던거 같고

그렇게 나무꾼은 헤엄쳐서

강 건너편에 도달했습니다


암곰은 나무꾼과의 사이에서 정도 들고

새끼도 낳았기에

나무꾼과 사이에서 낳은 두 새끼곰을 안고

나무꾼을 쫓아와서는

다시 건너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나무꾼은 도망쳤고,,

상심한 암곰은 두 새끼 곰을 물에다가 던지고

자신도 뛰어들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곰나루,웅진나루,웅진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암곰이 죽고나서 배들이 곰나루를 지날때마다

암곰이 복수를 해서 변고가 생겼고

한두해가 아니고 자꾸 그렇게 되니

사람들이 암곰을 위로해서 사당을 지어서

죽은 곰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계속 사당이 내려오다가

왜정 倭政 ,일제강점기때

다 없어지고 집(사당같습니다)도 헐어버리고

없앴고(일제의 한국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 같습니다)

그러다 다시 복원해서

현재에 충청남도 공주시에는 곰사당이 있습니다

곰사당 자리에서 실제로 돌곰상(석상)이 발견되서

실제로 곰사당이 존재했을거로 추정한다고 하며

(마을 주민들의 곰나루 전설 증언이 1970~80년대기에 마을 어르신들이

일제 강점기때 헐어버린것을 듣거나 목격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 곰사당에는 돌곰상의 복원품이 있고

실제 돌곰상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보관중이라 합니다


또 오늘날 공주시의 유래도

이후 웅진은 통일신라때 웅천주,웅주로 곰동네라는

이름이 계속 유지됬고

고려 태조 23년에 공주 公州 로 개칭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이 공주가 다른 뜻이 아니고 곰고을이라는 뜻의

곰주 를 한자로 음차해서 곰주=공주가 됬다고 합니다

즉 오늘날 공주시 公州市 는 왕자와 공주할때의

공주 公主 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공=곰으로 오늘날에도 이름이

곰동네 라고 보시면 됩니다,,


<라봉봉>이 암곰,곰나루 설화는 기록에는 전해지지 않는거 같고

공주 지역 사람들에게

삼국시대(혹은 그이전일수도요)부터 오늘날에까지도

구전되오는 전설적인 이야기로

이야기가 천년이 넘게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또 그 아들에서 그 아들에게 이런식으로

계속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게 정말 신기합니다,,


또 곰나루 설화는 단군설화의 웅녀와 연관됬다거나

당시 곰나루,웅진 지역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라고 합니다


암곰에게 납치당한 나무꾼도 집에 가지못해 슬펐겠지만

결국 사람과의 이루어 지기 어려운 사랑을 하게된 암곰도,

같이 죽게된 암곰의 새끼들도 정말 슬픈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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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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