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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봉봉>백제 24대왕 동성왕은

백제 22대왕 문주왕이 웅진(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백제

시대를 열었다면

동성왕은 웅진백제 시대를 안정기로 이끈

백제의 중흥군주(다시 일으킨 왕)입니다


백제 24대왕 동성왕

재위기간 22년 479~501년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이니


<김부식>혹은 마모라고도 한다


문주왕의 아우,동생 곤지 昆支의 아들었습니다


(곤지는 개로왕의 아들이자

역시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의 동생으로

개로왕대에 왜,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스카베,오사카 일대를 16년간 경영했고

일본기록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에서

곤지는 곤지왕 昆支王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동성왕,그는 담력이 대단히 컸으며

활을 잘 쏘아서 백발백중이었습니다

삼근왕이 붕어,사망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동성왕은 백제 귀족 성씨인

해씨였던 해구의 반란을 진압,토벌한

진씨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일본 기록 '일본서기'에는,,


<일본서기>문근왕(삼근왕)이 죽자

천왕(왜왕)은 곤지왕의 다섯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 末多王(동성왕의 이름은

모대나 마모라고 불렸다고 위에 삼국사기 기록에 나옵니다)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왜왕의)칙명으로

궁궐에 불러서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백제)의 왕으로 삼았다(일본서기는

과장과 허세가 심하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

중국조차 일본 아래라고 써있습니다,,)


또 그리고 병기를 兵器 (무기)  주고

아울러 츠쿠시국 筑紫國 군사 500인을 보내서

자기나라(백제)로 호위해서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 東城王 이 되었다


이 해 백제에서 바친 조부 調賦 (공물)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츠쿠시의 아치노오미,우마카히노오미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고구려)를 쳤다


라고 기록되있습니다


<라봉봉>사실 개로왕이

곤지를 왜에 사신으로 보낼때

곤지에게 자신의 임신한 아내,왕비를

곤지의 부인으로 삼아서 데려갔고

당시 배로 왜에 가는도중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이자

개로왕의 아들이었던 곤지의 새 부인이,,

산기를 느껴서 후쿠오카 북쪽의

가카리시마섬에 정박해서 동성왕 다음왕인 무령왕을

낳았다고 하는데(한국과 일본 기록의 차이,혈연관계 등

장난아니게 복잡한거 같습니다,,)


이 무령왕은 개인적으로 백제 온조왕 만큼이나

백제 최고의 군주로 생각되며

실제로 자질이 높은 자였고

어찌어찌 곤지의 아들로 편입됬고

동성왕의 이복형이었으나

당대 귀족들,특히 진씨귀족 세력이

원래같으면 왕위에 올랐어야했을,

또 어른이며 너그러웠던 무령왕은 제어하기 어렵고

어린 10대 정도의 겉으로는 총명하다하나

만만하다 느껴지는 동성왕을 왕위에

옹립했을 수도 있다는거 같습니다


즉 여기서 동성왕의 총명은

무령왕보다 만만해서

진씨 귀족 세력들이

삼근왕같이 어린 동성왕을

주무르기 쉽다라고

느꼈을 수도 있는거 같습니다


무령왕은 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아들로 나오나

일본측 기록이 옛 백제역사책들을

참고하기도 했고 일본은 백제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은나라기에

백제사정도는

정확한 편이라하고 무령왕릉 발굴결과

일본측 기록의 사실성과

신빙성이 꽤 높은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복형이고 유능한하고 또 어른이었던

무령왕을 제치고 동성왕이 먼저 왕위에 오른거 역시

백제가 혈연적으로 정치를 한 만큼 또

왕위 계승등이 여러 꼬임이 있었던거 같고

기록을 보고 쓰는 저도

장난 아니게 복잡한거 같습니다,,


동성왕 4년

정월(1월) 봄

진로(진씨귀족으로 삼근왕대에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고

동성왕을 옹립한 인물로 추측한다고 합니다)를

병관좌평(지방군사 담당,오늘날 국방부장관)에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해서

맡게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왕이었던 삼근왕대에

어린 왕을 앉혀놓고

전횡(권세를 쥐고 제 마음대로 함)한

해씨귀족세력,해구를

저지한 진씨귀족세력,진로가

이번에도 어린 동성왕을 앉혀놓고

군권을 쥐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려 한거 같습니다,,


즉 바뀐게 없으나

동성왕은 23년간 재위하며 이후 나름대로

진씨 귀족에게 벗어나려 하며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9월 가을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해서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습니다


10월 겨울

큰 눈이 한 길(2.3m) 넘게 내렸습니다


동성왕 5년

동성왕이 사냥하기 위해서

한산성에 이르러서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만에 돌아왔습니다


4월 여름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습니다


동성왕 6년

2월 봄

동성왕이 남제의 태조 소도성(남제 1대황제 이름)이

고구려왕 거련(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서 표를 올려서

내속 內屬 (신하국이 되기를)을 청하니

남제 황제가 허락했다고 합니다


이는 백제의 거의 500년 수도였던

한성,한강일대를 점령한

고구려 장수왕이 중국 북조,남조등

주변국과의 다각적 외교를

펼치자 위기를 느낀 동성왕과 백제에서

주변국과의 고립,요즘말로 패싱을 우려해서

중국 남조왕조였던 남제와

외교관계를 맺은거로 보이고

대체적으로 북방의 고구려는

국경을 맞대고있던 중국 북조와 친했고

남방의 백제는

바닷길로 교류가 가능했던 중국 남조와

친했던거 같습니다


동성왕 6년

7월 가을

내법좌평 內法佐平 (예법과 의식의 일,

조선시대 예조판서가 외교도 담당했기에

여기서 예는

외교도 포함됬을거 같고

오늘날 외교부 장관직 같습니다) 사약사를

남제에 보내서 조공하려 했으나

약사(사약사)가 서해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해서

가지 못했습니다


동성왕 7년

5월 여름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예방(예를 갖추는 의미로 인사차 방문)

했습니다


동성왕 8년

2월 봄

백가를 위사좌평(궁중숙위,궁중지킴,호위,왕궁수비)

으로 임명했습니다


3월

사신을 남제에 파견해서 조공했습니다


7월 가을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았습니다


10월 겨울

대궐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했습니다


<라봉봉>동성왕은

일본 기록이 맞다면

비록 진씨귀족들이 동성왕의 형이었던

이후 무령왕은 만만한 자가 아니었기에

어린 동성왕을

왕위에 앉히고 권력을 좌지우지 하려 했다해도

이후 나름 진씨귀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고

위의 기록같이 나름 외교활동이나

정상적인 국정운영을 하려했고

모처럼만에 나오는 백제의 정상적인 왕입니다,,


백제 21대왕 개로왕은 폭군,폭정을했고

백제 22대왕 문주왕은 멸망할뻔한 백제를

위기에서 구하고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으나

너무 일찍,재위기간 3년만에 신하였던

해씨귀족 출신인 해구가 보낸 도적,자객에게 살해당했고

백제 23대왕 삼근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해구에 휘둘리고 역시 재위 3년만에 사망했고,,

그나마 백제 24대왕 동성왕대에는

다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중국 남조인 남제와

이웃나라,옆나라 신라와 다시 외교활동도 하게됬고

비록 정말 좋은 땅이며

백제가 시작한 첫 도읍지였던

한강유역이 고구려에게 넘어갔지만

다시 백제인들도 고구려와의 큰 전쟁 이후

여러 혼란이 계속되다가 그나마 동성왕대에

다시 안정기가 시작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백제는 경기도(서울과 한강),

충청도,전라도 지역인 마한에 자리잡았는데

모두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당대에도

농사가 잘되고 수산물이 많이 나는 비옥한

지역이었고 이에 의외로 인구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중

백제가 가장 많았습니다

영토는 고구려가 가장 넓었고

인구과 자원(농,수산물)은 백제가 가장 많았는데

고대에는 인구와 국력이 비례한다고도

할 수 있었고 농업 생산력,인구 등

삼국에서 가장 월등한 나라였다고 할 수있으나

문제는 백제인들과 백제 지도층들은

왕권도 약한 나라였고 단합,인구집중동원이 잘 안됬고


비록 이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뺏고

전성기를 맞이함에도

백제 마지막왕이라 할 수 있는 백제 31대왕 의자왕때까지

신라가 백제에게 계속 당했던 이유가

충청도,전라도의 인구와 농업생산력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여러 악조건속에서도

단합이 잘됬고 귀족,상류층들이 직접 아버지와 아들

대대로 군대에 나가서 싸웠고

여러 외교정책 등으로 삼국을 통일하는데


백제는 건국부터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남하해서 마한의 토착세력인 해씨와 진씨 귀족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귀족권이 강하고 왕권이 약한나라였기에

귀족들이 다 저마다 한자리씩하고

따로 논거 같고 전쟁역시 돈없고 집안이 한미한 자들이

나갔고 이마저도 부족해서 왜에서 병력을 데려왔다고 합니다,,

이는 포에니전쟁때의 부자나라였으나 애국심없이

용병으로 싸웠던 카르타고와 작아도 건강한 기풍과

귀족들이 직접 나가서 모범을 보였던 로마의 전쟁때

로마가 대승리했던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서 말하려는거는

백제가 비록 동성왕대에 한강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여러 혼란과 위기의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충청도,전라도 지역 역시

풍요롭고 인구가 많았던 고장이었기 때문에(+왜)

백제인들은 충분히 다시 일어날 저력이 있었고

백제 지배층들의 단합이 정말 너무안됬지만

그럼에도 멸망때까지 신라를 위협했던 강국이었습니다,,


아직은 백제의 국운이 다하던 시기는 아니었고

동성왕과 다음왕 무령왕때 이르러

백제는 2차 전성기,중흥기가

시작되게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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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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