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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 12년

7월 가을

나이가 15세인 북부 北部 사람들을 징발해서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습니다


9월

동성왕이 나라 서쪽 사비 벌판에서

사냥했고

연돌을 달솔로 임명했습니다


<동성왕>사비는 해상교통에 용이하고

개발이 덜되고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있군

정말 좋은땅이구나


11월 겨울

물이 얼지 않았습니다


동성왕 13년

6월 여름

웅천물이 불어서

서울(수도, 웅진)에서 2백여 호(집)가 떠내려 가고

물에 잠겼습니다


7월 가을

백성들이 굶주려서

신라로 도망간 자가 6백여 호가 되었습니다


<라봉봉>신라는 기본적으로 백제의 마한 馬韓 과 같이

진한 辰韓 에 자리잡은 나라였고

마한 진한 변한(가야) 삼한 三韓 은 원래

고조선 준왕이 위만의 반란에

남하해서 건국했다는 진국 辰國 이었기에

백제,신라,가야인들 모두 서로 동질 의식이 있었고

이에 백제인들은 나라에서 변고가 나거나 혼란이 있으면

이렇게 자주 신라로 도망갔습니다,,

물론 백제인들은 고구려와의 동류의식도 있었고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조선[고조선]의 후예)

백제인들은 백제 1대왕, 시조 온조왕대는

고구려 대무신왕대의

고구려로 도망치기도 하고

왜(일본)로도 대규모로 이주하기도 하고

백제는 인구가 삼국에서 제일 많은 나라여서 그런지

백제인들은 고구려,신라,왜 등 여러 방면으로

간거 같습니다,, 특히 왜의 경우에는

도망이라기보단 집단 이주였다 할 수 있고

신라의 경우 바로 옆 근처이기에

육지로 교통이 가능했고

동질의식등으로 인해 이렇게 흉년이나

악정 惡政 (잘못된 정치) 등 으로 자주 도망간거 같습니다,,


동성왕 14년

3월 봄

눈이 내렸습니다


4월

큰 바람이 불어와서 나무가 뽑혔습니다


10월 겨울

동성왕이 우명곡에서 사냥하면서

직접 사슴을 쏘아 맞혔습니다


동성왕 15년

3월 봄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왕(소지 마립간,소지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이로서 백제와 신라의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응해 맺은 동맹이었던

'나제동맹'이 결혼으로 더

굳게 재확인 됬다고 합니다


<라봉봉>옛날에는 이런식으로 결혼동맹을

맺는 경우가 있었으나

결혼은 만능이 아닌데도

혈연으로 안위를 의지하려는 짧은 생각일 뿐이고

어짜피 의에 의해 사람은 모여서

사회를 만들고 의가 없다면 혈연이라도

흩어지게 됩니다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도

그렇게 이후 와해(흩어짐)됬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형태들이 여럿 보입니다

그러나 이역시

혈족운영 정치와 다를 바 없는

후진적인 정치 형태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결혼을 정략혼이라 하는데

결혼과 가정은 남녀간의 숭고한 사랑으로

이뤄져야만 하며 정략혼같이 정략적 관계나

사리사욕으로 맺어진다면

태어난 집안의 부유함과 가난함에 상관없이

그 가족과 그 가족의 후손들은

불행을 안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이런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을 확인하려는

결혼동맹은 반복됬고

백제 24대왕 동성왕 다음왕인 무령왕 다음왕인

백제 26대왕인 성왕때에도

성왕이 신라 24대왕 진흥왕에게

딸을 시집보냈다가

결국 사위인 진흥왕에게 사망합니다,,


수많은 역사의 사례에서 보듯

정략혼은 당장에는 어리석은

안정감이나 일시적인 평화,

일시적 부유함등을 가져올지는 몰라도

언젠간 결국 작게 무시한 문제들이

곪아서 터지는 날이 오게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게 반복됨을

여러 사례에서 본거 같고

하여튼 이 글을 읽은 분들은

후진적 행위를 반복하지 않고

좋은 사랑과 올바른 가정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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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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