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자객에게 살해당한 동성왕,,>


(*자객 刺客 은 사람을 몰래 죽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으로

좋은 말이 아니나 백제왕들은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옛 일본에서 자객,닌자 이런 이야기가 많은게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같습니다,,)


동성왕 22년

4월 여름

동성왕이 우두서에서 사냥하다가

비와 우박을 만나서 중지했습니다


5월

가뭄이 있었습니다


동성왕이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잔치에 쓰는 누각 이름)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실컷 즐겼습니다


동성왕 23년

정월(1월) 봄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해서

사라졌습니다

남산에서 호랑이 두마리가 싸웠는데

잡지 못했습니다


노파가 여우로 둔갑했다는 거는

그렇다 쳐도

호랑이들이 출몰했는데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혼란의 백제에서 행정력이 약해졌음을

의미 하는거 같습니다,,

여우나 호랑이 둘다 불길한 징조로 해석됩니다


3월

서리가 내려서 보리를 해쳤습니다


5월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7월

탄현에 목책(나무 울타리,나무 방어장벽으로

흙성,토성과 함께

백제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방어방식으로

둘다 왜,일본에도 건너갔습니다)

을 세워서 신라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궁궐에서 군주호위,왕궁수비 직)

백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했습니다


10월 겨울

동성왕이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했습니다


11월

동성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했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서

마포촌에서 묵었습니다


이전에 동성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했을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서

병을 핑계로 퇴관 退官 (벼슬을 내놓고 물러남)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동성왕은 이를 승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있었습니다

(물론 이 일만으로 원한까지 품지는 않았을거 같습니다,,)


이 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서 동성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동성왕이 붕어,사망하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했습니다,,


동성왕은 11월에 칼에 질렸는데

12월에 사망했다기에

자객에게 당했을때 바로죽은게 아니라

중태에 빠졌고 얼마후 절명 絕命,

사망 했다고 본다고 합니다,,


<김부식> '책부원귀(중국 송나라책)'에 말하기를

남제 건원 2년에

백제왕 모도(백제 22대왕 문주왕의 이름)가

사신을 파견하여 공헌하므로

조서로 말하기를


'천명이 새롭고

은택이 먼 곳까지 미쳐

모도는 대대로 동방의

번신이 되어 글을 올리고

멀리서 직책을 다하므로

곧 가즉수사지절도독백제

제군사진동대장군의 칭호를 주었다'


고 하였고


또 영명 8년에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사신을 파견해서 글을 올리므로

알자 복사(=복야??) 손부를 파견해서

왕으로 책명하고 망조부의 벼슬을 세습케 하여

모도를 백제왕으로 삼고 말하기를


'아 !

그대들 대대로 충성을 다하니

성심이 먼 곳에서 나타났다

바닷길이 험난하나

조공이 변함이 없었고

떳떳한 법에 따라

왕위를 잇게 하니


삼가라(= 천명을 돌아보며 언행을 조심하라) !


그 아름다운 왕법을 이어받았으니

가히 삼가지 않으리오'

(요약 해석으로는,,

'오 조공 고마워

친하게 지내자 백제 ㅎ')


고 하였다


그러나 '삼한고기 三韓古記' (현재 전하지 않고

김부식님이 삼국사기 편찬때 참고했던

우리나라, 한국 고대역사서)

에는 모도(문주왕)를 왕으로 삼은 사실이 없고

또한 모대(동성왕)를 개로왕의 손자로 생각하나

그는 개로왕의 제 2자인(둘째아들,차남)인

곤지의 아들인데

모도(문주왕)의 근본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제서 齊書 (주국기록, 남제서)'에

실린 기록을 가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저도 김부식님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명쾌하게 해석이 안되나

백제 혈연관계가 개로왕의 첫째아들 문주왕과

둘째아들 곤지 그리고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었기에

중국측에서는 동성왕을 문주왕의 아들로 본거 같고

이상하다 이렇게 해석하신거 같습니다,,

개로왕대는 특히 백제의 거의 500년 수도였던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장수왕의 고구려군에게

죽은 백제의 국가적 위기의 상황이었고

개로왕의 첫째아들 문주왕이 뒤를 이었으나

너무 일찍 죽었고,,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어린나이에 왕위를 이었으나

역시 아버지 문주왕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 모두 3년씩 재위하고 사망합니다,,


그래서 개로왕의 둘째아들 곤지는 문주왕대에 죽었고

이후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여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또 무령왕은 일본기록에는 개로왕이 자신의 임신한 아내를

동생인 곤지(일본기록에서는 동생입니다)와 결혼시켜서 왜에 보냈고

배를 타고가는 도중에 그 개로왕의 아내였고

곤지의 아내가된 부인이,, 자식을 낳고

이 자식이 동성왕 다음왕인 무령왕이 되는데

형식적으로는 곤지의 아들이나 실제 아버지는

개로왕이라 할 수 있고

동성왕은 곤지가 진짜 아버지인 아들이고

동성왕 다음왕인 무령왕이 동성왕같이

서로 곤지의 아들이나 무령왕은 동성왕과

혈연적 아버지가 달랐고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복형이라 할 수 있었기에

이때 족보가 복잡한 면이 있고

이래서 당시 삼국사기를 기록하신

고려,한국의 김부식님도,

중국인들도,일본인들도 기록이 서로 다른거 같고

오늘날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 아닌

이복형이라는 일본측 기록이

신빙성이 있는거로 해석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때는 전쟁과 내분으로 왕위교체등

혼란의 상황이었기에 당시

족보가 복잡한 면이 있는거 같고


혈연으로 신분제가 유지했던 골품제때문에

서로 근친혼을 했던 신라왕족쪽보다는

그래도 건전하고,, 덜 복잡한거 같습니다,,


<라봉봉>그렇게 동성왕 말기는

혼란의 연속이었고 백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동성왕의 왕권강화책 혹은 신하들의 말에

귀를 막은 것 등에

귀족층 내부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있었던 거로 보이고

백가가 동성왕 8년부터 궁중호위직,중앙군 직책인

위사좌평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왕의 정책들에 회의를 느낀거 같고

결국 벼슬을 물러나려 하자

동성왕이 승락하지 않았다해서

원한을 품었다는데

단순히 이것때문에 왕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던거 같고

여러 평소 동성왕의 정책들과 실정들에

원한을 품어서 자객을 보내서 동성왕을

죽인거 같습니다,,


다른 해석으로는 백가는

백제의 새수도였던 웅진,사비쪽(오늘날 충청남도)에

세력 기반이 있었던 사씨,연씨,백씨 귀족중

백씨 귀족의 일원이었고

동성왕은 진씨귀족이나 강대해진 구 귀족세력을

견제하려고 이런 웅진이나 사비쪽의 신진 귀족세력들을

등용하다가 이번엔 신진귀족이 너무 커지자

신진귀족을 견제하려고 백가를

웅진에서 멀리 떨어진 가림성으로 보내려했고

백가가 이에 반발해서 난을 일으켰다고도

해석된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역사서 '백제신찬'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서기>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末多王) (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國人) (백제 귀족들)이 드디어 제거하고,

도왕(嶋王;시마키시)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武寧王)이라고 한다


【백제신찬(百濟新撰)에서 말하길,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그리하여 국인이 함께 제거하였다.

이후 무령왕이 섰다. 휘는 사마왕(斯麻王)이라 한다.

그는 곤지왕(琨支王)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異母兄)이다.(이복형)

곤지가 왜로 향할 때, 축자도(筑紫嶋)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돌려보냈고 왕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各羅;가카라)의 바다에는

주도(主嶋;니리무세마)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그래서 백제인은 주도(主嶋)라 이름 붙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嶋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왕(곤지,개로왕의 둘째아들)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異母兄) (이복형)이라 함은 분명하지 않다.(즉 동성왕에게는

무령왕이 할아버지 개로왕의 아들이기도 해서 같습니다,,)】.


어린시절 총명했다는 동성왕이 왜 말기에

갑자기 폭군화 되었냐에 대한 의문들이 있습니다

이는 애초에 이복형을 제치고 진씨귀족들의

권력 독점목적 등으로 급하게

어린 동성왕을 추대해버린거 같고

동성왕도 초기에는 나름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귀족들에게 여러 칭찬을 받으며

진씨귀족이나 구 귀족세력과 국정을 운영하게 된거 같습니다


그러나 이복형인 무령왕은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라는 기록같이 어질고 훌륭한 자였고

비록 어린 동생에게 왕위를 내주었음에도

여러 훌륭한 모습들을 보인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민심이 점점 무령왕에게 향하게 됬고


낭중지추 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말같이

뾰족한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반드시 뚫고

비어져 나온다는 말같이

어질고 재능있는 자였던 무령왕은

점점 동성왕의 재위기간,성장과 함께

자질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두각을 나타나게 된거 같습니다,,


원래 왕의 역량이 평범하고

평범한 정치를 해도 주변에

다른 대체인물이 없다면 독점이 되는 것이고

인재들이 몰릴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밀어주기 등으로

왕의 역량 이상으로 국정운영의 질이 좋아 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간만해도 박수받는 왕이 되는 경우나

사례가 있고 이를 시대를 잘 타고났다

라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왕,지도자가 더 유능하거나

자국에 그 왕보다 유능한 왕위 계승권자 등이

나타난다면 그때부터 왕의 권위등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고

밀어주는 세력들이 이탈할 수도 있는거 같습니다,,


무령왕같이 다른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나타난다면

민심은 나뉘게 되고 결국

동성왕은 옛날같이 비슷하게 정치를 해도

신하들은 더 까다로운 것을 원하게 되고

그러면서 동성왕의 권위는 점차 흔들리고

인성이 폭발하고 폭군화 된거 같습니다,,


당장 기업의 경우에도 좋은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시대의 변화나 대체재등이

나타나면 매출이 감소할 수도 있기에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하는거 같습니다,,


동성왕은 점차 구,신귀족 세력 모두에게

반감을 사는 정치를 하게 됬고

결국 구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했던

백씨 귀족,신 귀족세력인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됬습니다,,


이는 백제 정치가 '대성팔족'이라는

8성의 귀족들에게 운영되고

귀족권이 강했던 나라임도 보여주고

동성왕 이전에도 백제는 유난히

왕들이 암살당하거나 살해당한 경우가 많았기에,,

왕권이 약했던 나라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원인과 결과에 균형,인과율이 있다는 말같이

고구려 왕권이 강하고

백제 왕권이 약하고

신라 왕권이 적당했음은 모두

지역적 특색과 환경에 기인하고

서로 그 질서가 유지되서 실상은 나름의

균형이 있을 수도 있었을거 같습니다


백제는 왕권이 약해도 인구가 많고

풍요로운 나라였기에 귀족들과 잘 연합하면

그 역시 장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아쉽게도 유능했던 왕들은 그렇게 했음에

비해서 동성왕은 결국 신하들과의

갈등끝에 살해당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게 된거 같습니다,,


이외에도 백제인들의 숙원이었던

한성수복에 소극적이었다는 점으로

한성세력이 동성왕에게 등을 돌렸고

자신을 왕위에 앉히는데 기여한

진씨세력을 견제하고

왕이 되는걸 도와준 일본계 백제세력을 홀대한 점,

사비 천도를 계획하다가 웅진 세력인

사씨와 백씨의 반감을 사고

백성들의 흉년과 굶주림에도 창고를 풀지 않고

사치와 향략에 빠지고

간언하는 신하가 있지 못하게 대궐문을 닫고

재위 말기의 동성왕은 주변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만들게 된거 같습니다,,


그렇게 혼란과 위기의 백제에는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음 백제왕은 백제 25대왕 무령왕으로

저가 좋아하는 백제왕입니다

무령왕은 그래도 유능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무령왕릉이 발굴되며 유명한 축에 속하나


대게 백제하면 온조왕,근초고왕,성왕,의자왕이 유명한거 같은데

이는 여러 왕조의 시작과 끝왕은 아무래도 대부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으나

중간의 중흥군주나 조용히 나라의 기틀과 내실을

다진 왕도 있음에도 오늘날 사람들은

시작과 끝이나 전성군주 위주로만 알고

보통 그런 왕들 위주로 드라마화 되고

조용히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한 왕들에

대한 이야기는 잘 이야기 되지 않는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성향의 왕들이나

중흥군주들도 저는 좋아합니다,,

대체로 이런 기반을 닦은 중흥군주들보다

이때 모인 힘들을 다음 세대때 펼쳐냈던

그 아들,근처 후손대 왕들이 유명한 사례가 많습니다,,


다시 동성왕 이야기로 돌아가서,,

동성왕도 나름 초기엔 훌륭한 정치를 했으나

말기에 폭군의 길을 걸었기에

중흥 군주라고 일컬어 지면서도

기구하고 안타까운 운명의 왕이라 생각됩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