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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삼국사기 이야기로 돌아가서,,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니

모대왕(동성왕)의 둘째아들이라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 나오나

실제 무령왕은 무령왕 발굴결과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음이 밝혀져서

일본 기록대로 동성왕의 이복형,

개로왕의 친아들이 맞겠습니다)



신장(키)이 8척(당시 1척 23cm니 183cm)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 民心 (백성의 마음)이 그를 따랐습니다


모대왕(동성왕)이 재위 23년

(신하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해서,,) 붕어,사망하자

그(부여사마,무령왕)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삼국사기엔 1년이라 기록되있지 않으나

다음 기록이 2년이기에 무령왕 1년)

정월 (1월) 봄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무령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서 공격하게 했습니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무령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서

백강에 던졌습니다


백가는 사람,자객을 시켜서

동성왕을 죽인 자로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무령왕에게 별다른 저항,반항없이 항복한거 같고

이에 백가는 동성왕을 죽이고

무령왕에게 가서 충성맹세를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령왕은 항복한 백가를 죽입니다,,

일각(한쪽)에서는 동성왕 암살의 배후가

무령왕이었고 백가가 동성왕을 죽이자

무령왕은 자신이 배후임을 숨기려

백가를 죽였다는데 비슷한 사자성어가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


라는 뜻의 토사구팽 兎死狗烹 즉 이용해먹고

버린다,, 이런 뜻이 있는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는

무령왕의 기록과는 맞지 않는 느낌이고


실제 무령왕의 성격상 백가가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말년에는 폭정을 했고

민심과 귀족들이 등을 돌리게됬으나

그래도 오랜 기간동안의 왕이었던 동성왕이

백가에게 시해되자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가차없이 죽여버린거 같습니다,,


원래 '착한애들이 화나면 더 무섭다' 라는

민간에서의 속어가 있는거같이

어진왕이었던 무령왕은 왕이 되고

비록 폭정을 했으나 이복동생 동성왕을 죽인

백가를 그대로 받아준다면

그래도 형제의 의를 저버린 것이 되고

추락한 왕의 권위는 더 추락한다고 판단해서

백가의 항복에도 가차없이 백가의 목을 잘라

백강에 던지게 되서 신하들에게

기존과 다른 정치를 할 것임을 보여준거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좋은 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사례는 아니더라도 이런거를

'군기 軍紀 (군대의 기강) 잡기' 라고도 할 수 있는거 같은데,,

중국 삼국시대가 배경인 삼국지 소설에서 나온

읍참마속 泣斬馬謖 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읍참마속의 뜻은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다'


라는 뜻으로 마속은 촉나라 재상 제갈량이

아끼던 장군이고 유능한 장군이었고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려는 북벌원정을 갔을때

마속에게 군사를 맡겼는데

마속은 지휘관이었던 제갈량의

산길을 방어만 하라는 지시와 다르게

스스로 현장에서 산에 올라가서

진을 쳐서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치다

사마의의 위나라군의 포위를 받았고

위나라 군은 포위만 하고 올라오지 않았고

결국 마속과 촉나라군은 먹을 물이 부족해져서

위나라군에게 대패하고

촉나라 군의 대패를 불러왔고

이에 제갈량은 비록 마속을 아꼈지만

엄연히 지휘관이었던 자신(제갈량)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거였기에

결국 군의 기강을 세우려 마속에게

가족을 돌봐주겠다하고 마속의 목을 베어서

걸어놔서 병사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제갈량은 통곡했다고 합니다,,


이게 뭔 소리냐 할 수 있고

실제로 이때문에 제갈량이 비판받기도 했으나

그만큼 법과 질서의 엄중함을 비유할때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법은 역시 인간존중 사상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나

권력과 돈이 있어서,자기편이라고 봐주거나

돈과 인맥이 없어서 끌려가거나 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같이 원칙없이 시행되서는 안되는 것이고

엄연히 원칙에 따라 또 공명정대하게 처리해야 함을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찌보면

무령왕을 왕위에 올리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이

다름아닌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백가는 동성왕을 죽이고

무령왕에게 별다른 저항이나 반항없이

스스로 나와서 인자하고 너그럽다는 평판의

무령왕에게 의탁하는 마음으로 항복한거 같고

그러나 여기서 무령왕이 봐주게 된다면

가뜩이나 백제왕실에서

백제 19대왕 구이신왕부터 20대왕 비유왕,

21대왕 개로왕, 22대왕 문주왕,

23대왕 삼근왕, 24대왕 동성왕까지

6연속으로

왕이 살해당하거나 의문사 한 상황에서

땅에 떨어졌던 왕실의 권위와

말년에 폭군화 되었더라도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그래도 24년간 즉위했던 동성왕을 시해한 자를 받아준다면

결국 무령왕 스스로도 반역에 동조한 행위가 된 것이기에

백가를 가차없이 죽인거 같습니다,,


<김부식>논평한다


춘추에 말하기를


'신하는 난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백가와 같은 극악한 역적은

천지,하늘과 땅도 그를 용납하지 못할 바였지만

즉시 죄로서 다스리지 않고 있다가

이 때에 이르러 스스로 난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모반하다

그제야 그를 참형하였으니 늦은 것이다


(요약하면,, 유교적 사관과 왕권을 중요시한

김부식님은


'감히 신하주제에 딴마음을 품냐

이런애들은 난을 일으키기 전에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라고 하신거 같고,,

다소 논조가 높은거 같고

김부식님은 글에 유교적 사상이 강하셔서인지

왠만하게 폭정으로 죽은 왕들도

먼저 신하탓을 많이 하시는게 있습니다,,


예를들면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고구려 첩자 도림스님과 바둑에 빠져

도림스님에게 속아서 국고를 거덜내고

고구려군에게 죽게된

개로왕도 배반해서 고구려로 간 백제출신의 고이만년,

재증걸루가 잘못한게 명백하다 논평하셨습니다,,

물론 삼근왕같이 어리고 미약했던 왕은

왕임에도 삼근[삼근왕] 애송이,어린애가 뭘알겠냐

라는 식으로 가차없이 비판하시고,,


이는 김부식님의 이중적인 모습과

당대 고려의 권력있는 신하 권신이었으나

동성왕의 실정들도 기록했기에

또 대학자로서 분명 동성왕의 잘못을

모르지는 않았을 거 같고 동성왕 기록때는

동성왕을 비판하기도 했고


그래도 당시 고려가 왕조국가는 왕조국가였기에

신하가 왕을 죽이는 거를 왕 잘못이라 그대로 쓰면

괜히 의심사기에 충분했다 할수 있는거 같고,,

신하가 왕을 감히 살해하냐 이런식으로 눈치를

봐서 쓴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폭정을 했던 동성왕에게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죽인

백가의 행동이 결코 옳은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반정,반란들이 그렇듯이

동성왕 말년에 부패와 타락도 분명

큰 책임은 있었던거 같습니다)


<라봉봉>오늘날 한국인 남성 평균키가 2017년 기준 174.2cm,

여성 160.5cm 정도라 하는데

조선시대 평균 성인남성키가 161cm정도라 하고

여성이 149cm라 하고 이는 영양공급이 부족한

옛날로 갈수록 평균키가 줄어드는거 같은데

당시 고대사회 백제인 무령왕의 키가 8척, 당시 1척 23cm기준으로

184cm이니 오늘날보기에도 큰 키로 보이고

실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무령왕의 유골을

분석하자 180cm정도였다고 합니다,,


눈매가 그림과 같았다는 기록은 그가 내면적인 모습 이외에도

외적으로도 훤칠하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다는

비유가 있을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거 같습니다

민간에서는 잘생긴 외모와 착한 마음이 비례한다는

근거없는 속어들이 나도는거 같은데

무령왕의 경우 그게 맞았다 쳐도

고구려 평강공주와 결혼한 온달의 경우에는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라는 기록이 있는 거로보아서

또 여러사례들로는

꼭 그렇지는 않은거 같고


대신 미국 링컨대통령의 명언인


'40세가 지난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라는 말이 있는거 같이(원래 이 명언은

링컨 대통령이 비서를 채용할때

외모를보고 거절했고,,

부정적인 상황에서 나온 말이긴 합니다,,)


비록 본판같은거는 그 개성이 잘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착하게 살고 밝게 산다면 얼굴에 그 티가 나는거 같고

옛날 역사가들도 은근 이런 외모 기록들을 많이 기록해놨는데

외적인 모습은 마음의 창같고 그사람의

평소 마음의 밝음,

인자함등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는 거 같고

그렇기에 이렇게 기록되는거 같고

비록 미인 美人 소리를 듣고 태어나서 자랐다해도

행실이 포악할 경우 악인 惡人 으로 기록되게 된거 같습니다,,


겉의 외모를 꾸미기전에 먼저 착한 마음으로

사는게 더 중요하다 생각되고


다시 무령왕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 民心, 백성들의 마음이

그를 따랐다는 기록같이

어질고 너그럽고 비범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거 같습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르자마자

백가의 난을 다소 강하게 진압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이 역시

그의 계산된 행동으로 보여지기는 하는거 같고,,


그래도 이후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혼란의 백제를 안정기로 이끈

명군의 모습들을 보여주게 됬습니다


바로 옆,이웃나라 신라에서는

무령왕 즉위 1년전 500년에는

신라에서 전설의 왕 지증왕이 등장하게되고

(무령왕은 501년 즉위)

이때가 삼국시대가 노래라고 치면

클라이맥스,절정기라 생각됩니다

고구려는 문자왕시대를 걸치며

마지막 전성기를 지났고

신라는 지증왕때 나라에 대변혁이 일어나며

백제는 오랜 혼란끝에 중흥군주이자

명군인 무령왕의 등장으로 안정기가 시작됩니다


삼국 모두 강력한 치세의 절정기였고

삼국시대는 이때를 기점으로

삼국 모두 중앙집권화가 끝나게 되며

옛날의 부족적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서로의 국운을 걸고 완전한 국가 대 국가로서

서로 자리잡게 됬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때 이후부터는

삼국시대 말기로 가는 전환점이라 할 수도 있고,,

삼국이 정말 치열 熾烈 (기세나 세력 따위가 불길같이 맹렬하다)

하고 정말 불같이 뜨겁다고 느껴지는 기록들이 많은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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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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