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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16년

3월 봄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무령왕 21년

5월 여름

홍수가 났습니다


8월 가을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자

백성들이 굶주려서

신라로 도망간 자가 9백여 호(집) 이었습니다


11월 겨울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이에 앞서

고구려의 침략을 입어서

몇 년간 쇠약해서

이때에 이르러

글을 보내서 여러번 고구려를 격파하고

비로소 통호 通好 (서로 통해서 우정을 맺음,

서로 사이좋게 지내다, 우호관계를 맺다) 하게 되서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12월

양고조,양나라 고조는 무령왕에게 조서를

보내서 책명하고 말하기를


<양고조>행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백제왕 여륭(부여융, 중국에서는

백제 왕족 성씨인 부여씨를 여씨로 줄여불렀습니다

또 무령왕의 이름은 부여사마 이외에도 부여융이라고도

했습니다)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정성이 지극하며

짐은 이를 가상하게 여긴다


마땅히 옛법에 따라

이에 영명을 내려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으로 봉함이 가하다


고 했습니다


무령왕 22년

9월 가을

무령왕이 호산 벌판에서 사냥했습니다


10월 겨울

지진이 났습니다


무령왕 23년

2월 봄

무령왕이 한성으로가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해서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군의 백성들을

징발해서 쌍현성을 쌓게 했습니다


<라봉봉>무령왕 대에는

다시 적극적으로 백제 엣땅이자

백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땅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게 뺏긴 한성수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무령왕대에 이렇게

다시 한강유역을 수복했던거 같습니다


고구려 문자왕의 아들,태자였던

흥안태자는 무령왕 말기때

계백현,오늘날 고양시에서 한씨미녀를 만났는데

당시 계백현은 백제땅이었고

오늘날 고양시는 한강 북쪽이고

위 기록에서는 한수(한강) 이북의 15세 이상 백성을

징발했다는 기록을 보아서

실제로 백제인들이 무령왕대에

한강 이북까지 다시 영토를 회복했던거 같습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한강은 정말 좋은 땅이었지만

백제 시조, 1대왕 온조왕대부터 거의 500년간

백제인들의 주요 거점지이자 수도였던 한강유역,

한성이기에 고구려인들도 이곳을 점령했어도

오랫동안 통치하기도 까다로웠던거 같고

백제인들이 비록 이곳을 뺏기고

웅진,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로 수도를 옮겼지만

이렇게 끊임없는 공세 끝에 결국

한강일대를 다시 수복한 거로 보이는거 같습니다


교과서에서나 여러 책들에서는

한성유역 확보를 삼국의 전성기의 징표로서

나타내며 삼국 지도들이 나오는데

물론 틀린 지도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백제인들도 이렇게 다시 한강유역을

회복했음에도 한번 한강유역을 뺏기고

다시 찾은적은 없는 것 같이

오해할 수도 있는거 같고

또 옛날에는 이렇게

고구려에게 한강지역을 뺏긴 이후에도

백제에서 한성유역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들이

별로 안나오다가 현재에는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된거 같습니다,,


3월

무령왕이 한성에서 돌아왔습니다


<백제 신하들>어라하(왕) !

우리의 숙원이었던

한수 지역을 다시 회복하신 것을

대단히 경축드리옵니다 !

다시 수도를 옮기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


<무령왕>허허, 짐도 바로 수도를 옮기고 싶으나

아직 한성은 불안정한 땅이기에

성을 쌓아 수비를 견고히 하고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백제 신하들>알겠사옵니다 !


<무령왕>무리를 많이했는지

조금 피곤하군,,


5월 여름

무령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시호를 무령 武寧 (호반,무예 무 武 편안할 령 寧) 이라 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사마였던 것은 왜(일본)의 섬에서 태어났기에

일본어로 섬 島 이 시마 しま 기에


(혹은 당시 백제어이고

백제에서 섬을 시마라 발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인들도 백제어의 영향을 받았지만

사라진 백제어들도 있는데

이런 백제어들이 일본에는 남아있기도 하다고 하고

실제로 백제어들이 일본어의 원형들이

됬다고 합니다,,)


이름이 시마 = 사마가 된 것이고

그의 시호가 무령이 된것은

직접 전쟁터에 나가서

오랜 숙적이자 500여년 수도 한성을

뺏은 백제인들의 원수인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수도 한성과 한강일대를

수복한 점과 특히 오랫동안 고구려군에게

당하기만 했던(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

백제인들에게

고구려 군은 공포의 대상이자

넘어설 수 없는 벽같이 느껴졌는데

무령왕의 대승으로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 계기가 된 거 같고

이에 무예 무 武 , 편안할 령 寧 자를 써서

무령왕 武寧王 이 그의 시호가 된거 같습니다


<라봉봉>무령왕의 기록이 별 특이한게

은근 없어보여도 별 특이한게 없는거 자체만으로도

업적이라 할수밖에 없는게

백제에서는 25대왕인 무령왕 이전까지는


백제 19대왕 구이신왕부터 20대왕 비유왕,

21대왕 개로왕, 22대왕 문주왕,

23대왕 삼근왕, 24대왕 동성왕까지

6연속으로 백제의 왕들이

살해당하거나 의문사 한 상황이었고

귀족의 권한은 강화됬고

왕실의 군위는 추락했으며

혼란과 혼란의 연속이었던 상황이었고


무령왕은 모처럼만에 암살이나

반란,의문사가 아닌

62세에 사망하며 자연사,천수를 누리고 죽은 왕이고

당연히 큰 기록은 없다해도

이전 왕들,예전 상황들을 볼때

그가 백제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안정기로 이끈

정말 유능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무령왕의 아들부터는 다시

혼란이 시작되서,,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전사합니다,,


성왕은 백제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으로 옮긴 왕이고

즉 웅진백제시대 왕들은

무령왕을 제외하고 모두 암살이나 의문사했고

비슷한 사례로는,,

조선 4대왕 세종대왕은

비록 선대,후대 왕들이 사망하지는 않았으나

모두 반란,쿠데타를 일으킨 조상과 후손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

아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올랐고 유일하게 세종대왕만이

반정이나 반란 없이 자신의 재능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고


무령왕 역시 선대왕,후대왕과 다르게

백제를 안정시키며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할 수 있습니다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바로 전왕인 동성왕과 정반대입니다,,)


제방을 튼튼히하고

무직자 혹은 유랑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했으며


양나라,중국 남조와 교류하며

백제에 선진문물들을 도입했고


백제인들의 숙원이었던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다시 수복했다는 점 모두

모범적인 어라하(왕) 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치세동안 사막에 오아시스같이,,

백제인들은 모처럼만의 안정을 누렸고

망해가던 백제를 다시일으킨,

중흥시킨 백제의 명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그의 무덤 무령왕릉이 온전하게 발견됨으로서

많은 백제인들의 문화를 알 수 있게됬고


비록 기록이 밋밋한 감은 있어보여도

기록 이외에도 그가 유능한 왕이었다는 사실들을

충분히 알 수 있고

훌륭하고 어진 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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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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