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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송산리 벽돌무덤 6호분에

유입수,물이 들어왔고

이를 막기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벽돌무덤 1기가 발견됬습니다


무덤은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있어서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는 영동대장군 사마왕(무령왕의 이름은 부여사마)

이라는 이름이 써있어서

백제 25대왕 백제의 중흥군주 무령왕의 무덤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냥 평범한 백제왕 무덤을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한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인데

무령왕은 유능하고 어진 자로

백제를 안정기,중흥기로 이끈 왕이고

무덤은 귀한 보물들이 나오고

백제 특유의 화려함이 더해져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하게

만드는 무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도굴되지 않은 왕릉이 발견된

사례에는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발굴 등이있고

모두 세계사적으로 가치있는 유산입니다


도굴이란 옛날 왕의 무덤 등은

금 장식품,왕관 등 같이 묻는 껴묻거리 등이 많았는데

말그대로 무덤을 파내서 도둑질 한다는 의미로

왠만하게 개방적으로 만들어진 무덤들은

그 당시 국가가 왕권이 강하거나

행정력이 강할때는 당연히

묘를 지키는 묘지기,수묘인들이 있어서

도굴이 어렵거나 불가능 했다 해도

왕조가 멸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거나

나라의 행정력이 약해졌을 때는

어김없이 무덤이 도굴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백제 무덤의 경우

굴식 무덤, 말그대로 굴로 만들어진 무덤이라

무덤 안에 벽화도 있고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개방적인 무덤이었기에,,

도굴이 쉬웠고


이집트 피라미드의 경우에도

피라미드 안에 굴방이 있는 형태라

왠만한 무덤들은 도굴이 됬고

대대로 도굴을 하는 집안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비해 영리했던 ?? 신라인들은

굴식 무덤이 아니라 무덤과 보물들,껴묻거리등을 넣고

그위에 돌들을 매우 많이 쌓아서

돌무지를 만드는 '돌무지 무덤' 형태의 무덤을 만들었고

도굴이 사실상 불가능해서 오늘날까지

신라 유물들은 고구려,백제에 비해

잘 보존되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시조,건국왕이 온조왕으로

온조는 고구려 시조,건국왕 주몽의 아들이었고

부여,고구려 등 북방에서 남쪽 마한지역으로

내려와서 건국된 국가라

마한 지역의 토속적 형식 무덤에

개방적이었던(도굴에 취약했던)

북방 고구려식 굴식 돌방 무덤이 결합된 형태였고

이에 백제에서도 굴식 돌방무덤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무령왕의 무덤은

벽돌무덤이었고

이는 기존 백제식 무덤형태에

중국 남조 양나라식 벽돌무덤형태가 융합된 형태로

무령왕대의 중국 남조 양나라의 교류가 활발했고

무령왕과 왕비가 안치된 목관은

일본 규슈지방의 금송으로 만들어진 거로 밝혀져서

백제가 해상으로 활발하게 중국과 왜(일본)와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왕릉으로

무령왕릉은 이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됬습니다


그렇게,,

1971년 송산리 무덤의 배수로 공사중

무령왕릉이 발견됬고

당대 사람들은 이 전설적인 왕의 무덤의 발견에

흥분의 도가니로 가득했습니다


마을 주민들과 기자들은 몰려들었고

희대의 발굴에 기자들이 무덤안으로 난립해서

사진을 찍으려 하고 일부는 책임자를 폭행하고

유물을 파손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로는 어떤 기자는

무덤안에 함부로 들어가 촬영하다가

난입으로 청동 숟가락을 밟아서 부러트렸다고 합니다,,)


이에 조급해진 발굴자들은

급한 마음에 유물들을 자루 등에 쓸어담았고

졸속으로 발굴이 이뤄졌고

당시 발굴장은 아수라장같은 상황이었고


이에 무령왕릉 발견은

한국역사상 최고의 발견이자

최악의 발굴이라고 이야기 되는 사례로 꼽힙니다,,


이는 당시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경험 부족과 당대 사람들의 인식 미약 등

여러 악조건들이 많았고


여러 악조건들이 모이며

발견 자체는 최고의 발견이나

그 발굴 과정이 엉터리라

수많은 괴담을 남긴 발굴이 됬습니다,,


이는 하면된다,맨땅에 헤딩,제일주의 등

당대의 유행했던 결과와 성과에만 중요시한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발굴이라 할 수도있고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함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발굴단은 천년을 넘게 땅속에 잠들어있던

전설적 왕릉인 무령왕릉을

기자들과 구경꾼들의 난립에

긴급 회의를 거쳐서

신속하게 발굴을 끝내기로 결정내렸고


처음 무덤에 들어간지 17시간만에

모든 조사와 유물 수습을 끝내버렸다고 합니다,,


천년동안 잠들어있던 무덤이기에

유물의 배치나 자세한 조사 등이 필요하며

천천히 해야했으나 유례가 없는

속도로 물건들을 말그대로 쓸어담고 밖으로 반출했고

다음날 아침9시경 바닥 청소까지 끝냈다고 합니다


또 발굴책임자들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경쟁과 공명심으로

국보급 유물들을 자발적으로 호위 등이 없이

상자에 넣어서 고속버스로 이동해서,,

청와대에 유물을 보러주러 갔고

유물을 받아든 박정희 대통령은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


하고 두 손으로 팔찌를 쥐고

가운데를 휘어봤고

이를 보고있는 사람들도

아차 하면서도 어쩔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를 TV로 본 공주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공주시민들의 격렬한 유물 반출 반대시위들이

일어나서 결국 공주에 무령왕릉 유물 박물관을

짓기로 합의하고 오늘날

국립 공주박물관이 준공되게 됬다고 합니다,,


무령왕릉의 졸속 발굴 결과

수많은 고대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정보들이 엉터리 발굴 과정에서

미궁속으로 사라졌다 하고

2009년에 1971년 졸속 발굴된 무령왕릉 유물들을

재정리 하던중 사람 뼛조각 4점을 확인하게 되고

2009년이면 최근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당시 발굴이 얼마나 조급하게 이뤄졌나를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그래도 최고의 발견답게

그 화려한 무덤과 출토 유물들이 있고

무령왕 유물 발견으로 인해

백제인들의 미적 감각과

예술상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할 수 있고

백제인들의 미적 감각은

당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에서 최고였다고 생각되고

화려하면서도

과하게 화려하다는 느낌이 아닌

조용하고 고고하며 화려한 느낌들이 있고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인 특유의 정서로 재해석해

당대 세계 최고라 해도 손색이 없을

백제인들의 예술미를 보여주는 유물들 같습니다,,


또 무령왕릉으로 당대 부유하고 번성했던 백제인들의

경제력도 알 수 있습니다

당장 중국 동쪽에는 고구려,백제,신라,왜(일본)정도가

있었는데 고구려는 넓은 영토에 비해

산간지역이 많았고 신라는 동남쪽 변두리였고

왜도 문명과 거리가 먼 상태였고

백제는 땅은 고구려보다 좁았음에도

비옥한 지역에 자리잡고 부유한 강국,

해상대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 내부>


<무령왕릉 지석으로 이렇게 써있습니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왕의 지석 해석]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의 본명은 사마,부여사마)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왕비의 지석 뒷면 해석]

돈 1만닙, 다음의 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앞에 든 돈으로

토지신 토왕, 토백, 토부모, 연봉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료에게 나아가서 서쪽 땅을 사들여

묘를 만들었으니 문서를 만들어 남긴다.

현 율령에 따르지 않는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무령왕릉을 지키는 수호신,

상상속의 동물 개념인

석수입니다>

<왕의 금제관식>

<왕비의 금제관식>

<왕의 발받침으로 저의 블로그 배경화면이

이 문양에서 따온 것입니다,,>


밑 그림같이 원래같이 하면

시각적으로 피로감이 강해져서

현재 블로그를 이렇게 분홍,초록색으로 꾸몄고

화려하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고고한 백제인들의 미를 보여주고

보는 눈이 편안하고 즐거워서

저가 좋아하는 무령왕릉 유물입니다



<왕비 베개입니다 무령왕릉은 부부 합장묘입니다>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입니다

왕비의 신발이라 하는데 신발 밑이 축구화나 스파이크같이

뾰족한 이유는 원래 장례,제사지내는 용도로만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고구려 벽화에서 고구려 무사들이

전쟁때에 이런 신발을 신고있는 그림도 있고

전쟁때 말을 타고 뾰족한 부분으로

적 병사들을 짓밟는 용도나

얼음장을 건너는 등의 용도로도

쓰였다고도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당대 발굴자 분들도 회고하며

자책하시며 한탄하시는게 많습니다,,


비록 최악의 발굴로 여겨지나

당대는 고고학 이외에도

국민들이 모두 못살았던 때라

경제(노동),문화,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부족한게 많았던 시대이고

비록 최악의 발굴이어도

이로 인해 대표적인 타산지석,

요즘말로 반면교사의 사례라 할 수 있고


그래도 이런 대발견으로 인해

우리가 잊혀져가던 백제인들의 생활상을

알게 됬습니다,,


물론 아쉽긴 아쉬우나 앞으로라도

이런 최악의 발굴등이 다시 반복되지 않게

타산지석,반면교사로 삼고

우리가 소중히 지켜가야 할

유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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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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