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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원년(1년)

8월 가을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자

성왕이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명을 줘서

출전케 하니 그(지충)가 적(고구려군)을

물리쳤습니다


성왕 2년

양고조가 조서를 내려서

성왕을


지절도독백제제군사

수동장군백제왕 


으로 책봉했습니다


성왕 3년

2월 봄

신라와 서로 예방(예를 갖추는 의미로

인사차 방문) 했습니다


성왕 4년

10월 겨울

웅진성을 수축(고쳐짓거나 보수)하고

사정책을 세웠습니다

(사정책의 책 柵 은 울타리 책자로

백제인들은 흙으로 만든 성인 토성이나

나무 울타리,목책을 방어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성왕 7년

10월 겨울

고구려 왕 흥안(고구려 22대왕 안장왕 고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해서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에 성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해서

보병과 기병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사' 에는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백제 북쪽인 개백, 오늘날 한강 북쪽인

경기도 고양시를 공격해서 함락시킨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백현 皆伯縣 은 조선상고사에 나오고

개백현은 사전에도 나오는 고양시,행주쪽의 옛이름,

정식명칭 같고

계백현 階伯縣 이라고도 하는거 같고

백제 계백장군의 조상이 계백현 땅을 분봉으로

받아서 계백 이라는 이름이 됬다는 이야기도 있고

개백현이 정식명칭,이외에 계백현이라고도 불린거 같습니다)


조선상고사에서는 이를


'안장왕의 연애전쟁과 백제의 패퇴'


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있고

예전에 고구려 문자왕~안장왕 이야기를 쓸때

이 이야기를 두번 쓴 적 있습니다






로 각각 다른 링크입니다


안장왕,고흥안은 태자시절

상인차림을 하고 개백, 지금의 고양의

행주에 가서 노는데

그곳 장자 長者 (어른 혹은 큰 부자로 지역유지같습니다)

한씨 韓氏 의 딸 한주 韓珠, 한구슬


(한주의 주 珠 는 구슬 주자로

고양시에서는 한구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와 사랑에 빠져 부부의 정을 맺고

다시 고구려로 돌아갈때

스스로 고구려의 태자임을 밝히고

한주에게 귀국해서 군사를 몰고

이곳을 차지하고 한주를 맞아간다고

하고 달아나 돌아왔고

문자왕이 죽고 아들이었던 고흥안,

흥안태자가 왕위에 올라서

자주 장사를 보내서 백제를 쳤으나

늘 패하고 안장왕이 친히 나서서

정벌했으나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백제에서는

절세미인이었던 한주는 개백현(오늘날 고양시) 태수,

백제 관리의

수청을 받다가 임자가 있다고 거부하고

이에 백제 태수는

한주가 고구려와 내통한게 아니냐며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한다 위협하며

온갖 달콤한 말로 꾀었다 하고

죽을 위기가 됬는데

(이에 춘향전의 원류가 됬다고도 합니다)


안장왕은 한구슬,한주가 갇혀있음을 몰래

탐지해서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 길이 없어서

여러 장수를 불러서

개백현을 회복하면 온갖 상을 내려주겠다했는데도

나서는 이가 없었으나

안장왕의 친여동생 안학과 서로 사랑했으나

신분이 미약해서 안장왕에게 허락받지 못했던

을밀이 상은 필요없고

스스로가 안학을 사랑하는게

대왕(안장왕)이 한주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한구슬,한주를 구해올테니 안장왕 친여동생인

안학과

결혼시켜달라고 해서

안장왕은 여동생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해서

그 청을 허락했고

을밀이 수군 5천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먼저 가서

개백현(오늘날 고양시,한강 북쪽)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테니

왕(안장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면 수십일안에

한주를 만날 거라 했고


결사대 20명을 군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무기를 감추어 가지고

개백현으로 들여보냈고


개백현태수, 백제 관리는 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생일잔치를 열었고

한주에게 사람을 보내서 꾀다가

평복을 입은 을밀의 장사,결사대들이

무객 舞客 (무도장의 손님이라는 뜻이고

여기서는 생일잔치 손님같습니다)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서 칼을 빼들어서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 군사 10만이 입성했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서

성에 넘어 들어가 감옥을 부수고

한주를 구해내고 창고를 막고

안장왕이 오길 기다리고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했습니다

(한주를 구해내고

높은 봉우리에서 봉화를 피웠고

그래서 고봉산의 고봉의 유래가 됬다 합니다)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서

개백현에 이르러서

한구슬,한주를 만나고 여동생 안학을

을밀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씨미녀가 높은 산에서

봉화를 들어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뒤에 이름을 고봉이라 했다 나오고

오늘날 고양시 고봉산과 고양시 설화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즉 고구려 안장왕이 백제 성왕때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북쪽 변경을

공격해서 이겼다는 기록은 사실이라 할 수 있고


삼국사기 안장왕대 기록엔


'안장왕 5년

8월 가을

안장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안장왕 11년

10월 겨울

안장왕이 백제와 오곡에서 싸워서

승리하였다

2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백제 기록에


'성왕 7년( = 안장왕 11년)

10월 겨울

고구려왕 흥안(안장왕의 이름)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왕(성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라는 기록과 일치하고


안장왕은 이때인지 그 이전인지 모르겠지만

한구슬,한주를 구하러

백제 북쪽 변경을 침공했던건 사실로 보입니다


백제 입장에서도 보니

또 안장왕이 태자시절

백제 변경인 개백현,오늘날 고양시,한강 이북을

놀러다녔다는 것은

당시 백제가 개백현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고구려 태자가 놀러다닐만큼

행정력이 깊게 작용하지 못하고

장수왕때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잃었다가

무령왕때 다시 찾고 그렇게

고구려,백제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서로 변동이 있었던 국경지역 땅이었던거 같고

고구려 태자가 놀러나와서 연애를 하고

지역 유지인 한씨집에 숨어들어서

한씨미녀 한구슬에게 돌아가면서도


이곳을 많은 군사를 몰아 이곳을 차지하고 맞아가겠다

한것같이 지역유지인 한씨도

적국이었던 고구려 흥안태자(안장왕)를 숨겨줬다는 점 등


백제 입장에서도 보니 당시 한강 북쪽인 고양시 일대는

백제땅이었음에도 여러 변동등과

지역 유지도 등을 돌릴만큼

행정,치안력의 부재등이 있었던거 같고


또 백제 태수,관리가 한구슬에게 수청을

들라하고 춘향전의 변사또 같이 상당히 나쁜놈으로

생각됬으나(한구슬은 실제 춘향전의 모델이라 합니다)


백제입장에서도 보니

어찌보면 백제태수도

국경지역의 백제 태수,관리로서

적국이었던 고구려와 내통한거로 의심되는

한구슬을 잡아둔게 본분을 다한거일 수도 있고

물론 관리일 이외에 결국 사사로운 정으로

잡아둔것때문에 문제이고 나쁜인물 격이라 할 수 있으나,,


춘향전의 변사또같이 부패하고 욕정만으로

춘향이를 잡아둔거는 아니고

어찌됬건 국경지역 관리로서의 자신의 의무는 했던거 같고

문제는 의무에 사사로운 욕정이 합쳐지며 결국 나쁜 인물로

기록됬다 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물론 사사로운 한구술 수청에

생일 잔치를 열면서도 고구려 군사 침입등에

대응하지 못한점 등 개백현(오늘날 고양시) 백제 태수도

역시 좋은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더라도 또 백제입장에서도 보니

국경이 함락되고

최악의 상황으로 간 이야기라 할 수 있고


만약 삼국사기 기록같이

성왕 7년,안장왕 11년에

안장왕이 한구슬을 만나기 위한 연애전쟁을

벌여서 개백현 지역쪽을 고구려땅으로 만들었다면

안장왕도 왕이 되고나서도 10년 이상동안

한구슬을 못만나고 오랜 기다림이었을거 같습니다


이 한구슬전은 춘향전의 실제 모델이라 하고

안장왕이 안장왕 11년에 한구슬을 만났다 가정하면

안장왕이 문자왕 7년에 태자가 되기에

태어나자마자 태자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안장왕이 10대~20대 정도에 만났더라면

그래도 2~30대 정도에 재회했다고 할 수 있고

나름 해피엔딩이나 문제는

안장왕은 안장왕 13년에 죽기에

만약 안장왕 11년에 만났다면

하여튼 오랜 기다림에 만났음에도

2년후 사망했다고 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이로 인해 한구슬,한주는 안장왕과 다시 만났지만

백제는 무령왕때 되찾은 한강유역을

성왕때인 이때 다시 고구려에게 뺏긴 거로 보입니다


안장왕과 한씨미녀 한구슬의 사랑이야기를

결국 또 쓰게됬고 다시 링크를 남겨봅니다 ㅎㅎ,,

지금은 백제 이야기를 쓰는 중이고

백제 입장에서는 다시 한강유역을 뺏겼다 할 수 있는

원통한 일이긴 합니다,,






로 각각 다른 링크입니다


<라봉봉>백제 무령왕때 되찾은 한강유역이

이렇게 백제 성왕때 다시 고구려 안장왕에게

뺏긴거로 보여집니다,,


한강유역은 백제인들에게 정말 소중한 땅이었으나

고구려 안장왕의 한구슬을 구하려는 마음은

당시 매우 강했던거로 생각됩니다,,

오죽하면 조선상고사에는 이를 '연애전쟁'이라 기록되있습니다

고구려 을밀장군도 안장왕의 여동생

안학과 결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서

백제에 침투해서 괴력을 발휘한거 같고


이렇게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려는 인간의 강력한 의지는

거대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사례들이 여러있고


옛 첫사랑인 데이지를 다시 만나려고

당시 미국사회에서 술을 팔면 안되는 '금주령'이

생겼음에도 밀주,몰래 술을 팔며

거부가 된 개츠비가 나오는

미국 문학소설 '위대한 개츠비'나

북한에 있었던 첫사랑을 만나려

무일푼에서 재벌이 되고 방북했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생각납니다

이때 북한 지도자였던 김정일 위원장도

비록 논란이 있는 북한의 지도자였으나

정주영 회장의 그 마음을 알았는지

북한을 샅샅히 뒤지라 명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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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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