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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28년

정월(1월) 봄

성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해서

이를 함락시켰습니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습니다


성왕 31년

7월 가을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서

신주를 설치했습니다


10월 겨울

성왕이 딸이

신라에 시집갔습니다


성왕 32년

7월 가을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서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성왕이 난병 亂兵 (규율이 잡히지 않은 군대) 에게

살해됬습니다


이때 일본기록에서는 신라군

고도(삼국사기의 고간 도도로 추정)가

명왕 明王


(성왕의 이름은 명농 明襛, 부여명농으로

중국 양서에서는 이름을 명 明 이라 불렀고

일본서기에서는 성명왕 聖明王 혹은 명왕 明王 이라 기록되있습니다)


을 사로잡아서 두번 절하고는,,


<고도>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라고 했고


명왕,성왕이


<성왕>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


고 하니


고도가


<고도>우리(신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신라 관습에서는 3년내에 맹세를 어기면

중대한 징벌사유가 됬다하고


'왜 너네는

딸을 우리왕에게 시집보내면서

3년도 안됬는데

곧 우리를 공격하냐'


라는

의미로 본다고 하더라도

어짜피 당대 신라역시 백제와의 나제동맹을

충실히 지켰다기 보기 어렵고

전쟁이란게 고도의 말처럼

정말 국법이라기보다


'내가하면 정의고 남이하면 위법'


이런식으로

힘의논리,국력싸움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고도,혹은 도도는 노비라 자칭하며

성왕의 목을 베는데

이는 성왕은 백제의 국왕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신라장군 고도,도도는 성왕에 비해

신분이 비천하다는 의미로 겸손을 떨었다고 보기도

한다고 보고 아니면 진짜 노비출신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했고


명왕,성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성왕>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고 합니다,,


시호를 성 聖 이라 했습니다 (성왕 聖王)


<성왕의 유언 여러 버전,,>

1. 짐은 매양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왔다.

더 구차히 살고 싶지 않다


2. 짐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3.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성왕의 유언같이

백제인들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

백제시조 온조왕이 건국하고 북방,부여,고구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자질구질하고

구차한 인생을 살기 싫어했던거 같고,,


주몽도 부여를 탈출하기 전에 부여에서

부여왕자들의 시기와 질투와

빼어난 재능이 있음에도

마굿간에서 말을 돌보게 하는 등

여러 천대를 받았고

이에


<주몽>나는 천제,하느님의 손자인데

남을 위하여 말을 기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부여를 탈출해서 나라(고구려)를 세우려 했고


백제 부여씨들도 그런 조상(주몽)들의

후예여서인지 죽을때 별다른 변명없이

죽으려 한게 미덕으로 여겨졌던거 같습니다,,


물론 한국은 구차하게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끝내 강대국이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서인지

결국 이런 것보다는 끈질기게 살아남는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풍조로 변했고

실제로도 멋진 죽음은 없다 생각하고

강한자가 살아남는게 아닌

살아남는자가 강한거라는 말처럼

백제왕들의 방식이 옳다 생각하지 않고

더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안타까우나


성왕은 죽으면서 그간 오랜 고통속에서 살며

고구려,신라 양쪽으로 당하는 치욕의 세월 지내고

이에 죄책감과 백제왕,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 이런 말들을 한 거 같고

이 성왕의 유언이라는

'더이상 구차하게 살고싶지 않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워낙 인상적이어서인지

성왕 이야기에 처음에

소개되는 문구로 나오는거 같습니다,,


백제 성왕의 기록들은 '삼국사기' 신라 진흥왕 기록과

같이 봐야 어느정도 돌아가는게 알수 있고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 기록에도 이렇게

성왕의 유언이 남아있는 거 같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서

성왕 26년

정월(1월) 봄

에 고구려 양원왕이 한수 북쪽의

독산성을 공격했고

이때 신라군은 나제동맹으로

성왕을 도와서 한강 북쪽 독산성을 방어해냈습니다


신라 역시 진흥왕대에 떠오르는 강국이었으나

오랜 강국이었던 백제의 눈치를 보며

먼저 나제동맹 대로 같이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해 낸거 같으나

결국 공짜가 없다는 말 같이

신라인들도 슬슬 백제인들에 대한

미묘한 생각들이 생겨난거 같고

(도와줬는데 우리는 얻는게 뭐임 이런식 ??,,)


448년 독산성 전투 2년후

450년 1월 성왕은 신라군을 너무 믿었는지

혹은 고구려 군을 물리치고 자신감이 너무 생겼는지

고구려 도살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으나

2개월후 3월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금현성을 함락시켰고


(백제 성왕 기록엔 금천성 포위라 나오나

신라 진흥왕 기록엔 금천성 함락이라 나옵니다)


삼국사기 신라 기록 진흥왕 기록엔

이때 고구려,백제 두나라가 전쟁으로 서로

피로한 틈을 이용해서

이찬 이사부(신라 지증왕때

울릉도,독도인 우산국을 정벌하신 신라장군으로

진흥왕때 당대엔 백전노장이었을 것입니다)

가 그들을 공격하게 해서

두 성을 빼앗아서 성을 증축(늘려 지음) 했고

신라 군사 1천명을 그곳에 머물게 해서

수비하게 했다고 합니다


즉 고구려,백제가 서로 공격할 틈에

신라군은 조용히 보다가 두 나라가 피로해지자

두 성을 빼앗아서 신라땅으로 만든것입니다,,


백제 성왕은 고구려에 맞서려면 신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이런 상황에서 신라에 항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라의 국력은 고구려를 제압할 정도로 강성해져있었고

성왕은 그럼에도 비굴하게 신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정도로

나라 상황이 좋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다음해 551년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쳐서

백제가 한강 하류(서울쪽)

신라가 한강 상류(한강 북쪽이 아니라 상류입니다)

를 차지하게 됬고 백제는 한강하류 6군,

신라는 한강 상류 10군을 차지하게 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이때 기록에 이렇게 기록되 있습니다,,


<일본서기>이 해(552년)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니미방이다


라고 기록되있고

백제가 어떤 사정때문인지 한강유역을 포기했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했다고 나오게 됬습니다


옛날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해서 한강유역을 차지했는데

신라가 백제의 뒤통수를 쳐서,,

상류만 가져간게 아니라 하류까지 모두

가져갔다고 이야기됬으나 요즘에는

백제 내부의 어떤 사정으로 한강유역을

포기하게 되자 신라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한강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다고도 합니다


또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차지했음에도

553년 백제 성왕은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고 이는 일어나는 신라와 진흥왕에 대한

그,성왕의 두려움, 그리고 진흥왕을 안심시키고

후일을 도모하거나 하려는 그의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흥왕 기록에는 그렇게 백제의 왕녀를

맞아서 소비 小妃 로 삼았다 하고

1년후 백제왕 명농(부여명농, 성왕의 이름)이

가량(가야)과 함께 와서 신라 관산성을 공격했고

군주 軍主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됬고

신주의 군주 軍主 김무력(신라 김유신 장군 친할아버지)이

주병 州兵 을 이끌고 와서

이들(백제군)과 교전했는데

비장 裨將 인 삼년산군 三年山郡 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해서 백제왕을 죽였다고 하고

이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대승했고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 6백명을 참살했고

백제군은 말 한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즉 백제 역사상 장수왕에게 죽은 개로왕같이

최악의 대패라 할 수 있고

백제 왕은 고구려,신라 두 나라에게

모두 잡혀서 사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왕이 죽을때

기록들은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에 더

자세히 남아있습니다


<일본서기>

얼마 후 고도(苦都)


(삼국사기에선 고간 도도 高于都刀 라 하고

고도는 도도와 이름과 비슷해서 동일인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가 명왕(明王)(성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신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등받이 의자)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또 일본서기에는 그후 고도는 성왕의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에 파묻었거나 혹은 신라가 명왕(성왕)의 두개골(머리)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몸)를 백제에 예를 갖추어 보냈고

신라왕이 명왕,성왕의 뼈(머리)를 신라왕궁

북청계단 아래에 묻었다고 합니다,,


이는 신라인들이 성왕의 머리를 밟고다니라는

의도로 추정된다 할 수 있고


실제로는 신라에서도 당대에도 적국왕이어도

대우하는 예들이 있었는데 비록 죽은 적국왕이어도

이런식으로 대우하다가 괜히 눈치를 볼 수 있고

또 직접 다니는 계단에 머리를 묻어두는거도

소름끼치는 일이기에

백제 유민사이에 들던 소문일 수 있고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고합니다

일본기록 '일본서기'에서는 유독 신라를 미워하는데

이는 일본은 백제인들이 건국한 국가라 할 수 있고

일본서기는 백제기록의 영향을 받았기에

백제인들이 신라인들을 미워한 관점을 그대로

일본서기에서도 이어갔다고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백제 성왕을 사로잡는 신라 지휘관은

가야계 신라장군 김무력 金武力 이며

김무력은 백제를 멸망시킨 삼국통일,삼한일통의 주역

신라장군 김유신 金庾信 의 친할아버지입니다,,


<라봉봉>성왕 후기 기록은 성왕기록만 봐서

이야기 하긴 어렵고 한국 '삼국사기 신라 진흥왕' 기록,

'일본서기' 기록을 같이 봐야 당대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할 수 있기에

약간 복잡한 느낌은 있으나

나름 백제의 명군이면서도 그의 마지막 유언같이

고통과 불운으로 가득했던 인생을 산 왕이었던거 같습니다,,


위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들은 많이 해서

더 할말은 없는거 같으나


그의 유언같이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는 말이

인상깊습니다


성왕은 한국기록인 '삼국사기'보다

일본기록인 '일본서기'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는 왕이라 하며

일본서기 흠명기는 성왕기라 해도

좋을 정도로 백제인들이 기록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했다 하고

일본서기에서는 왜왕의 신하처럼 나오나

실제로는 그 반대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일본서기는 일본 왕을 높이기 위한

과장,허세가 심한 책입니다)


그렇기에 일본기록의 성왕 이야기를

다음 이야기때 한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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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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