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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의 사비*천도>


(*천도 遷都 도읍,수도을 옮김)


성왕 10년

7월 가을

갑진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습니다


성왕 12년

3월 봄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4월 여름

정묘에

형옥성이 남두 성좌를 범했습니다


성왕 16년

도읍을 사비 泗沘 로 옮기고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김부식>소부리라고도 한다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습니다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라고 바꿨습니다)


<라봉봉>사비천도는 사비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 沙氏 (사택씨 沙宅氏) 가문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또 동성왕때부터 이뤄진

백제 왕실의 권력,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사비로 수도를 옮긴 것이고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수도 내에 귀족들의

영토나 자리잡은 경제적 기반이 있는데

수도를 옮김으로서 토착귀족 세력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렇게 고구려 장수왕때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거나

백제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게 대표적인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사에서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옮긴 것이라 해도

성왕때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 것은

이렇게 왕권,국력 강화책의 일환으로

인위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도를 옮겼던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신라는 시작부터 멸망할 때까지 거의 천년간

수도를 한번도 옮기지 않았고 오직 경주에만 있었고

이는 신라 정치의 안정성 혹은

폐쇄성을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성왕의 사비 수도이전이 과연 좋은 결과로

이어졌냐면 그것 또한 의문이나

어쨋든 사비(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는

백제 멸망시까지의

수도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됩니다

즉 한성 - 웅진 - 사비로 백제는 수도를

세번 옮겼습니다


<나제동맹의 균열>


성왕 18년

9월 가을

성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령해서

고구려의 우산성을 치게 했으나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성왕 19년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성왕이 양나라에 표문을 올려서

모시 毛詩 박사와 열반 涅槃 등의 의미를

풀이한 책과 기술자,화가(그림 그리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등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양나라에서 이를 허락했습니다


성왕 25년

정월(1월) 봄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기해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성왕 26년

정월(1월) 봄

고구려왕 평성(고구려 24대왕 양원왕 고평성)

이 예 濊 와 공모해서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왔습니다

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신라왕(신라 최전성기 왕 진흥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서

갑병 甲卒 (갑졸 = 갑병 = 갑옷입은 병사)

3천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했습니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해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서

크게 이겼습니다


<신라군사들>우리는 천하무적 天下無敵 의

대 신라국 군사들 !

덕과 정법 正法 으로서 세계를 평정시키는

대 신라국 군사들 !

고구려 군사들은 길을 비켜라 !


<백제군사들>오매 !,, 신라군들이

동맹이지만서도 너무 강한거 아니여 ?


성왕 27년

정월(1월) 봄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질렀습니다


10월 겨울

성왕이 양나라 서울(수도)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게 했습니다

(당시 양나라에서는

양나라 장군 후경이 중심이 되서

후경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인해 양나라는 사실상 끝장났다고 합니다,,)


백제 사신이 그곳(양나라)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端門 (궁궐 정전앞의 정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 行人 (길가던 사람) 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후경(반란 주동자)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서

그들을 투옥했습니다

그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했습니다


<라봉봉>성왕의 사비천도 기록과

당대의 국제상황들이 보여지고

당대 신라왕은 신라 최전성기 왕이라는

진흥왕이었고 진흥왕은 백제군에게

단순히 과거같이 나제동맹의 든든함이 아닌

옛날 천하대국 天下大國 이었던 고구려의

원조를 받던 고구려의 반 식민지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신라는

중앙집권화를 거치며 비록 삼국중에서 가장 늦었으나

가장 성공적으로 중앙집권화와 내정개혁을 이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진흥왕대에는

고구려의 원조를 받던 국가였음에도

고구려군을 압도하는 기세로 성장하게 됬고


백제와 신라의 동맹인 나제동맹이 탄탄하려면

요즘말로 '끼리끼리 어울린다' 라는 말같이

백제와 신라의 국력이 고만고만,비슷비슷 해야하는데

슬슬 백제 성왕 신라 진흥왕때는

신라에서도 백제를 도와줬음에도

신라인들은 생각보다 자신들의 힘이

강한것을 깨달았다 할 수 있고

신라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중에서 강대국으로

우뚝 나오게 되며 굳이 더이상 백제와의 나제동맹이 없이도

삼국 사회를 주도할 수 있을정도의 국력을 갖추게 됬고

이는 나제동맹의 균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결국 백제 비유왕,신라 눌지왕(눌지마립간) 떄부터 있던

나제동맹은 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왕(소지 마립간)때

혼인동맹으로 더 두터워졌으나

백제 성왕,신라 진흥왕때 관산성전투때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 목이 잘리며 120여년 만에 깨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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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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