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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봉봉>성왕이야기는 한국기록인 '삼국사기'보다

일본기록인 '일본서기'가 더 양이 많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인들이 직접쓴 역사서이자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은

'백제본기'를 충실히 참조했기에 그 신빙성이 높다 할수 있고

틈틈히 왜왕을 높이려는 허세와 조작이 섞여있으니

일본서기는 당대의 시대,사회상을 잘 생각하고 읽어야 합니다,,


<일본기록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 성왕의 관산성전투>


15년(554년)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간솔(下部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목례문차)를 보내 표를 올려


<성왕>백제왕 신(臣) (성왕이 어이없게도

왜왕에게 신하임을 자청하나 

실제로는 반대였을거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백제국왕이 왜 倭 신하에게 전한다'

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명(明)(성왕 이름은 부여명농 明襛, 혹은 명 明) 과

안라(安羅)에 있는 왜신(倭臣)들,

임나(任那)(가야)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가야 소국왕)들은 아룁니다.

사라(斯羅)(신라,경주시의 옛 이름이자 신라를 다르게 부른 말로

신라는 사라,서라벌 이라고도 했습니다)가 무도(無道)하여

덴노(왜왕)를 두려워하지 않고

코마(狛, コマ)(백제에서 고구려를 낮춰부른말)와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야케(彌移居, ミヤケ)(관가,궁궐,수도)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미야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바다 북쪽의 관가,궁궐,수도라면

백제 첫번째 수도 한성이 생각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우치노오미(有至臣, ウチノオミ)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사라(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덴노(왜왕)께서 우치노오미를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실제로는 '짐은 신라를 정벌하려 하였다

이에 왜국의 그대가 군사를 지원했기에

짐은 기뻤도다' 이런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토우호우노 아즈카리(東方 領, トウホウノ アヅカリ)

모노노베노 마가무노무라지(物部 莫奇武連, モノノベノ マガムノムラジ)를

보내 자기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관산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우치노오미가 데리고 온 백성

츠쿠시노모노노베노 마가와사카(竹斯物部 莫奇委沙奇, ツクシノモノノベノ マガワサカ)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덴노의 위령(威靈)(위엄이 있는 신령)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성왕>만약 신라 뿐이라면 우치노오미가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사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외에 당대 고구려는 북방민족 견제때문에

남쪽의 한강유역등은 그다지 신경을 못썼고

신라가 고구려 영토를 뺏는 중에도

북쪽전선에 집중하느라 신라와 화친을 맺었다 합니다,,)


츠쿠시노시마(竹斯島)(규슈)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가야)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왕>신이 따로 군사 만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毾㲪)(직물의 종류중 하나) 1영,

도끼 300부, 사로잡은 성(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


라 아뢰었다.

(실제로는 짐이 군사 만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다

아울러 이번일이 급하니

그대[왜왕]에게 한척의 배를 보내서 약소한 선물들을

보내니 긴급 지원 바란다 이런 뉘앙스였는데

이후 일본서기를 기록할때 일본왕실을 높이기 위해

조작이 들어간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창(餘昌)(부여창,성왕 다음왕 백제 27대왕 위덕왕의 이름이고

이때,성왕 당시는 태자시절입니다)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늙은 재상 耆老 (기로 耆老 는 60세이상 신하)이


<백제 늙은 재상>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부여창>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왜,,)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이 세계최고고

백제는 그나마 양반대접이나 한국 고구려,백제,신라와

당대 최강대국이자 실제 세계최고국이었던 중국도

일본 아래라는 식으로 기록되있습니다,,)


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성왕)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즉 여기까지 상황은 성왕의 아들,태자 부여창이

백제 늙은 신하의 만류에도

아니 우리가 꿀릴게 뭐있겠음 ?

여차하면 왜도 도와줄건데[이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고는 신라를 공격했고[관산성전투] 이에 성왕은 아들 부여창이

전쟁터에서 고생하는게 염려되서

위문하러 아들에게 갔고


[소규모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왕 32년

7월 가을

성왕의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서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 적의 난병,규율이 잡히지 않은 군대에

살해됬다고 나옵니다

성왕이 일국에 왕인데도 떠오르는 강국이었던

신라를 습격하러 그것도 왕이 직접

고작 50명으로 간것은

아니었을 거고 일본서기 기록대로

아들 부여창을 위문하려 소규모로

50명의 병사등을 이끌고 가다가

첩보로 성왕의 행로를 탐지한 신라군에게 발각되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거로 보이는거 같습니다]


소규모로 아들을 위문하러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현재 충청남도 보은군)의

우마카이얏코(飼馬奴, ウマカイヤッコ)

고도(苦都)【 다른 이름은 곡지(谷智)다】(삼국사기에서 성왕은 고간 도도에게 죽고

고도는 도도 같습니다)에게


<신라>고도는 천한 노비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고 하였다.


(고도,도도가 신라장군이고

그래도 백제의 왕인 성왕,명왕에 비해

신분이 낮기에 노비라

겸양을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실제로 성왕을 모욕하기 위해서

신라에서 노비출신 인물로

성왕을 죽이게 한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고도>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명왕이


<성왕>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


고 하니,

고도가


<고도>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라 하였다


【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접이식 의자)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성왕>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 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개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궁궐)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 ツクシノクニノミヤツコ)(관직이름)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 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당시의 치열했고 절박했던 상황과

성왕이 죽었음에도 신라군의 포위를

뚫었을 정도로 백제군 역시

만만한 군대는 아니었던거로 보입니다

위 글에서도 신라에서도 백제 명왕,성왕이 뛰어난 군주임을 말하고있고

성왕이 죽었음에도 백제군 역시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신라군의 포위를 뚫었던거 같습니다,,)


여창이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쿠라지노키미(鞍橋君, クラジノキミ)라는 이름을 주었다.

【鞍橋는 우리 말(일본어)로 쿠라지(矩羅膩, クラジ)라 한다】(쿠라지는 이득을 얻다,키미는 존칭어)

이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모두 멸하려 했으나 (신라의) 한 장수가


<신라의 어떤 장수>안된다. 일본 덴노가 임라의 일 때문에

여러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실제로는 '왜에서 기습을 할지도 모르고

성왕도 죽었으니 이쯤하는게 무리가 아니겠다'라 말한거를

이런식으로 일본서기에서 당대의 왜를 높이려 조작한거 같습니다)


16년(555) 봄 2월. 백제 왕자 여창이 왕자

혜(惠)【왕자 혜(惠)는 위덕왕(威德王)의 아우다】를(부여창,위덕왕 다음왕인 백제 28대왕 혜왕)

보내어


<부여계(왕자 혜)>성명왕(성왕)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15년에 신라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덴노가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554년 기사]


<라봉봉>당대의 처절했던 전황들이 나타나고

성왕은 그렇게 아들,태자 부여창이 신라군과 싸우고 있음에

50명의 소수 병력을 이끌고 위문하러 갔다가 신라군의 기습을 받고

사망한거로 보입니다,,

신라인들도 성왕이 왔음을 듣고 나라안의 모든 군사 내어서

길을 끊고 격파했다는데 이를 전쟁에서는

모든 힘을 기울인다는 '총력전'이라 합니다


신라는 후기로 갈수록 백제와의 전쟁에서 기본적으로

나라안의 있는 병사,없는 병사까지 탈탈 털어서 모아서

싸우는 '총력전'의 형식이었고 이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도 마찬가지로

신라는 백제에 비해서 기본적으로 인구가 적었기에

귀족,일반 백성 할거없이 건장한 청년이라면

모두 나가서 동원되서 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강유역 상실 이후에도 백제땅이었던

충청도,전라도는 풍요로운 곡창지대였고

백제는 그런 좋은 지역들을 기반으로 인구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에서 가장 많았고


(영토는 고구려가 가장 넓었음에도

고구려는 산지와 북방의 거친 땅이었기에

인구는 풍요로운 평지와 곡창지대에 자리잡은

백제가 가장 많았습니다)


귀족들의 권한이 강한 나라였기에

함부로 군대를 징집하기도 어려웠던거 같고

대신 신라같이 있는병사,없는병사까지 탈탈 털어모으진 않더라도

왠만큼 모여도 많은 병사들을 모일 수 있는 여력은 됬다고 합니다


신라군은

이미 정보망이 상당히 넓어져있었던거 같고

이에 성왕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온다는 첩보를 듣고

성왕을 공격해서 사로잡아서 목을 친거 같습니다,,


일본서기는 일본을 높이려는 선전,프로파간다적 목적이

강한 역사책이라 또 백제의 영향을 벋어나고 싶었는 지

백제가 신하로 나오나 실제로는 사회적 여건이나

당대의 시대적 상황상 정 반대였던거로 보이고

이에 일본서기 기록때는 이를 반대로 조작해버린거 같습니다

은근 어투갔은거도 왜에 굴종하는 식으로 바뀌어 버리게 된거 같습니다,,


여기서는 성왕의 죽을때 유언 '구차히 살 수는 없다' 가 나오나

부여창이 '우리는 대국(일본,,)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

라는 막장스러운 명대사 ?? 가 나오는거로도 유명한거 같습니다,,


백제인들도 바보도 아니고 엄연히

중국과 왜의 기술,문화,경제,과학

다방면의 수준차이를 알고있었을 것인데

이런 식으로 썼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

일본서기 기록당시의 창작이라 할 수 있고

워낙 과장이 심해서 어이없은 대사로 유명한 거 같습니다,,


대신 백제인들도 왜,일본지역을 뒷마당 정도로 인식하고

대규모 이주를 하고 백제 본국이 멸망하더라도

건너가서 살 수 있는 안전장치로 여겼음은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또 이미 왜지역에는 백제인들이 거점을 만들고

여러 자손들을 낳았기에 실제로 백제가 위기때마다

다른나라라 여겨지지 않고 자국을 구하러 오듯이

지원군을 보냈고 실제로 백제와 왜는

사실상 하나였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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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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