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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성왕을 기린 백제 위덕왕>


백제 27대왕 위덕왕

재위기간 44년 554~598년


위덕왕은

이름이 창이니

성왕의 맏아들입니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붕어,사망하자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사망)

그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했고

관산성 전투의 원인은

태자 부여창,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늙은 백제신하의 간언을 듣지 않고

호기로운 마음으로 신라를 공격하다가

성왕이 아들이 전장터에서 고생하기에

안타깝게여기고 50명의 소수의 군사로

위문하러 갔다가 신라군에 기습을 받고

사망한 것입니다


성왕이 신라군에 사망한 것은

그야말로 국가적 재난,국난이었고

호기로웠던 태자 부여창,위덕왕도 이때

신라군에 포위를 받고 죽을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포위를 뚫고 살아남아서

죽은 아버지,성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 부여창,위덕왕은 자신의 호기로움,고집때문에

아버지 성왕이 죽게됬고 그로 인해

많은 죄책감 속에서 일생을 살았고

이에 아버지 성왕을 기리며 일본 호류사 몽전에 있는

성왕의 모습을 본뜬 구세관음상을 만들었다고 하고

이외에도 백제 금동대향로도 위덕왕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이 금동대향로에는

여러 동물과 자연,노래하는 인간이 새겨져있어

태평성대를 꿈꾼 백제인들의 이상향,이상적 세계관과

위덕왕때 만들어진것이라면 부왕(父王 아버지왕)이었던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 진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일본 호류사에 있는 위덕왕이 부왕 성왕을

연모해서 만들었다는 구세관음상으로

성왕의 실제 모습을 따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동아시아 금속공예의 최대 걸작이자

백제인들의 과학기술력,문화력의 결정체

백제 금동대향로입니다 맨위에 봉황 맨 아래에는 용이 있으며

연꽃 몸통이나 코끼리 조각 등 불교적 색체와

불사와 영생의 산이라는 박산,

용과 봉황,신선 등 도교적 색체가 어우러진

백제 왕조 700년 최대의 걸작입니다,,>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완함(비파)를 연주하는 악사입니다

금동대향로에는 5명의 악사가 새겨져있고

악사들은 완함(비파),적(피리),소(관),백제금(현,거문고),고(북) 등을

맡고 있습니다>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악어입니다

금동대향로에는 원숭이도 있고 원숭이는 그렇다쳐도

코끼리나 악어같은 열대지방이나 남방지방의 동물이

새겨져있기에 이는 해상강국이었던

백제인들의 활발한 국제무역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실존동물 외에도 날개달린 물고기나

날개달린 코끼리등 상상속 동물도 그려져있는데

날개코끼리는 모르겠으나 날개달린 물고기는

그나마 날치정도가 있겠습니다,,

또 상상속의 동물 사람얼굴에 새의몸통인

인면조도 있고 도교와 유교적 사상과

여러 이국적인 백제인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향로로서 박산로라는

중국쪽의 영향을 받았으나(박산의 모양을 본떠 만든

향로로 박산은 중국전설에 나오는 산으로

바다 가운데 있는데 신선이 산다고 합니다)

중국식 향로와 다르게 한국,백제인들의 독특한 정서와

개성,문화로 재해석해 중국 향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걸작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공포스러움은

느껴지지 않고 태평성대를 바라는 백제인들의

편안하고 평화로운 느낌과 이상향들이 잘 나타나있고

화려하고 깊게 고요한 느낌이 나서

저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문화유산중 하나입니다


바닥의 향로를 받치는 용부터 가운데의 여러 조각들,

맨위의 봉황까지 어느 한부분도 빼놓을 수 없을정도로

멋진 걸작중의 걸작입니다


백제 문화유산들은 왕의 무덤인 무령왕릉부터

조각,벽화들까지 어느 한개가 발견될때마다

작은 유물이던 큰 유물이던 감탄이 계속 나올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백제 금동대향로 이야기>


백제 금동대향로의 높이는 61.8cm이며

꽤 큽니다(보통향로는 20cm 안팎) 거기다 그 높이와 크기가 크고

황금으로 도금되어있음에도 파괴되거나

도굴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은

금동대향로가 진흙속에 잠겨서 산소가

차단된 채로 있어서 가능했다고 합니다


금동대향로는 1993년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 고분군 근처 주차장 공사때

발견됬고 원래는 주차장 공사를 하려했고

부여군 같은 경우에는 땅속에 유물등이 있을 수가 있어서

공사전에 조사단을 파견해서 매장 문화재등을 조사를 하는데

유물등은 나오지 않았고

그럼에도 뭔가 아쉬웠던 조사,발굴단은


'딱 한번만 더 파보자'


라고 군청에 요청했고 군청에서도 이를

흔쾌히 허락해서 파보았더니

기와조각이 나왔고 더팠더니

어떤 뚜껑등이 나왔다고 합니다


바로 진흙속에 파붙혀있던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것으로

무령왕릉 발견에 비견될 정도의

대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고

비록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천운이라 할수도 있었으나

딱 한번만 파보자는 마음과 군청의 허락등

인위성도 있었고 말그대로 하늘이 돕는다는 말같이

기적적으로 발견된 한국사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동대향로 발굴직전 사진으로 기왓재가 켜켜히 쌓인 곳을

주목한 연구원이 파들어가다 발견됬다고 합니다

만약 그냥 관광지 주차장 공사를 진행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금동대향로가 이 진흙속에서 천년의 세월이

넘게 묻혀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왓재가 있었고 주변에서는 섬유조각이 발견됬는데

금동대향로를 감싼 천이라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후 발굴결과는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원래 사찰,절내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였다고 하고

그럼에도 이런 국보급 유물이 땅속에 묻혀있단거는

미스터리이고 혼란의 백제 상황에서

전쟁등으로 급하게 천으로 감싸 숨기고 땅에 묻었고

그다음에 불이 나서 깨지고 불탄 기와들이

그 자리를 덮은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이외에 금동대향로는

백제 문화이외에도 금속,과학기술의 정교함,

우수성을 보여주는 유물로

이런 오늘날 보기에도 정교한 조각을 했던

1000여년전 삼국시대 인들이고

이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주조기술과

동위에 금도금을 했기에 도금기술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 구리와 수은을 이용한 금-구리 아말감도금법으로 제작됬다고 하고

금이 수은에 잘 녹으며 수은이 100℃ 정도에서 모두 날아가 버리는

성질을 적용한 도금법으로

이러한 도금기술은 현재 아말감도금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물론 현대인들도 기술이 기술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겠으나

그만큼 정교하고 까다로웠고 섬세한 백제기술의 위엄을

보여주는 공예품이고

과거인들이 해냈는데도 기술들이 잊혀지거나

난해해서 시기상으로 설명하기 어렵거나

당시 기술력으로 만들어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물건,

시대를 초월한 역작들을

'오파츠 Out-Of-Place ARTifactS , OOPArt'라고 합니다

요즘말로 '사기캐릭터',

'사기캐', '먼치킨' 이런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금동대향로의 조각솜씨나 도금기술 등

여러 면에서 이런 오파츠급 유물이라 하고

백제 유물들은 의자왕이 일본에게 선물한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 디자인도

그렇고 하나같이 오파츠급 디자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 예술은 백제 이전에도 정교하고 섬세한게 많아서

백제 지역인 마한의 영역(충청도,전라도)에서 나왔다 할 수 있는

청동기 시대 만들어진 잔무늬 거울,청동거울인

'다뉴세문경' (중국보다 먼저입니다,,

현대 기술로 복원에 도전한 장인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라며 한국 청동기시대

청동거울 제작기술에 존경심을 드러냈다 합니다,,)등

오늘날 현대인들도 구현하기 어려운

오파츠,역작들이 많고 마한지역 한국인,백제인들은

예술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거 같습니다


마한쪽의 한국 청동기인,백제인들은

여러 기록이나 유물,흔적등에서

예술에 깊게 심취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신라인들같이 척박한 환경속에서

현세와 현실을 중요하는 풍토보다는

백제인들은 풍요로운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의

곡창지대속에서

예술과 내세문화등에 집중했던거 같습니다


한국 예술은 이렇게 청동기시대 다뉴세문경은

중국보다 먼저 만들었다 하고

한국인들이 상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바로 옆 중국에게

흡수당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우뚝 서서

그 역사와 문화와

나라,후손들이 이어져왔다는게

다른 이야기들과

이런 예술작품들을 보니 이해가 됩니다,,


중국에 영향을 받은것만이 아니라

중국보다 앞선 문화들도 분명 여러번 나왔고

중국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키거나

더 나은 방법으로 만든 한국 조상들의 지혜등을 엿볼수 있습니다


<라봉봉>옛날에는 단순히 우리나라,한국,대한민국은

위대하고 무궁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식으로

주입식으로 배웠던거 같은데

한국사를 더 자세히 알아보니 그런거 이외에도

실제로 그랬다는게 느껴집니다


세계초강대국이었던 중국 바로옆에서

중국과 전혀 다른 문화,중국보다 앞선 문화와

기술들이 나타나기도 했고

요즘에는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근거없는 이야기들이 나도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고

중국의 지배기간은 '조선(고조선) 멸망후 한사군'이나

'고려 원간섭기' 두 가지 정도밖에 안됬고(원간섭기는 중국이라기보다

몽골이고 게다가 초강대국이었던

중국인들은 몽골에 지배됬음에도 한국 고려는 끝까지 싸우고

현명한 외교로 몽골제국,원나라 바로 옆에서도

자치권을 인정받아서 간접지배 형태로 바뀌게 됬습니다

결국 순수 중국인인 한인 漢人 의 지배는

한사군이 처음이자 끝이고 이마저도 한국 韓國 고구려인들이

오직 자신들의 힘으로 축출[쫒아냄]해냈습니다)

그 이외에는 서로 영향도 받고

한국이 중국보다 더 강했을 때도 있고

맞서기도 했었음에도,

한국은 엄연히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발전해나갔음에도

한국은 대부분 중국 속국이었고

잠시 일본 속국이었다 현재는 미국 속국이다라는

근거없는 식민사관들이 나돌아다니는게 보여서 안타깝습니다


다시 금동대향로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백제 금동대향로는 백제,한국인들의 문화,기술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전설적인 문화재라 할 수 있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화려함의 경탄과

고요한 평화로움에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대한민국,한국,백제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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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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