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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쓰기 전에>

사실 이제야 말하는거지만

루리웹 사이트에 저의 블로그가 소개된적이 있습니다

http://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37188023?cate=497&page=7

갑자기 저번달인가 루리웹 유입이 있어서

들어가봤더니 어떤 분이 캡쳐를 해서 홍보를 해주셨고

감사한 일입니다



옛날에 쓴 글인데 캡쳐를 해서 올리셨고

저의 라봉봉 역사 블로그는 언제나 열려있으니

역사에 관심있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신 분들은

언제든지 들어오셔서 댓글 남겨주셔도 됩니다


다시 이제 이야기로 가서,,

한국 백제 위덕왕 이야기를 쓰기 전에

위덕왕대의 배경이나 일본기록 '일본서기'의 위덕왕 이야기등을 하느라

이제야 한국기록 '삼국사기'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다시 위덕왕 이야기입니다,,

슬슬 백제가 찬란한 700년 역사가 끝나가는

말기로 가고있습니다


<백제 위덕왕대에 급격히 변화한 국제정세>


그렇게 위덕왕은 성왕이 재위 32년에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붕어,사망(전사)하자


성왕의 맏아들, 태자 부여창,위덕왕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위덕왕 원년(1년)

10월 겨울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해서

웅천성을 침공했다가

패하고 돌아갔습니다


백제기록은 년도가 1년 밀린거도 있다 하기에

당시가 위덕왕 1년이기에 성왕대에

쳐들어 온것일 수도 있고

당대 한강유역은 신라가 점거하고 있었는데

북방의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것은

신라에서 아직 한강유역을 얻었어도

굳히기가 완전하지 않아 빈틈으로

백제를 공격했을 수도 있고

신라가 길을 열어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위덕왕 6년

5월 여름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병진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위덕왕 8년

7월 가을

위덕왕이 군사를 보내서

신라의 변경을 침공했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했습니다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습니다


<백제 장군들>어라하(왕) !

군사를 물려야 합니다 !


<위덕왕>아아 !

선왕의 원수를 갚고자

번개같이 신라를 공격했는데도

어찌 하늘은 신라와 함께한단 말인가 !


위덕왕 원년,1년엔 고구려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음에도

막아낸 위덕왕이었지만

8년엔 신라군에게 패했고

비록 방어가 공격보다 유리하다 하더라도

그만큼 당대 신라군이 강했음을 보여주는거 같습니다,,


위덕왕 14년

9월 가을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위덕왕 17년

북제의 후주가 위덕왕을 책봉해서

사지절시중차기대장군

대방군공백제왕 으로 삼았습니다


위덕왕 18년

북제 후주가 또 위덕왕을 책봉해서

사지절시중차기대장군

대방군공백제왕 으로 삼았습니다


북제는 위나라 이후의 중국 북조였고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중국북조와

백제는 중국남조와 친했으나

위덕왕대에는 여러 다각적 외교를 시도했다고도 하며

북제는 중국 북조의 20여년만에 멸망한

단명한 왕조인데 그만큼 혼란한 나라였고

혼란의 상황속에서

북제에서도 나름 백제를 우방으로

삼으려는 노력을 했던거 같습니다


위덕왕 19년

사신을 제나라(북제,중국 북조)에 파견해서 조공했습니다


9월 가을

경자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일식이 있었습니다


위덕왕 24년

사신을 진나라(남진,중국 남조)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위덕왕은 그렇게 중국 북조와 남조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고

이는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하고

중국 남북조와 동시적 외교관계를 맺은 거는

위덕왕대가 백제역사상 최초였다고 하고

위덕왕이 다각도 외교로 위기를

없애려 한 노력이었다 합니다


10월 겨울

신라 서부 변경의 주,군을 공격했는데

신라의 이찬 세종(순 우리말 이름은 노리부)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격파시켰습니다


11월

사신을 후주 우문에게 파견해서 조공했습니다


위덕왕 25년

위덕왕이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위덕왕>현재 중국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이번 새로 들어선 수나라의 황제는

비범한 자이군,,


위덕왕 26년

10월 겨울

혜성이 하늘에 뻗었다가

20일만에 사라졌습니다


위덕왕 28년

위덕왕이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하자

수나라 고조가 앙을 상개부의동삼사대방군공

으로 삼았습니다


위덕왕 29년

정월(1월) 봄

위덕왕이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위덕왕 31년

11월 겨울

위덕왕이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위덕왕 33년

위덕왕이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위덕왕 36년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했습니다(수나라의 중국통일)


그렇게 중국에는 모처럼만의 통일제국이 들어서게 됬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고조,수나라 문제 양견은

비범한 자였고 사치와 부정부패를 끔찍히 싫어해

신하들에게 매우엄격했으나

자신에게도 매우 엄격했던

황제로 유명한거 같습니다

수 문제는 단순히 중국을 통일만 하고

안정시키지 못하지는 않았고

중국은 모처럼만에 분열,혼란기가 종식되고

평화기가 시작되며 경제적번영,인구증가가 컸고

수 문제는 대외정책보다는 내치에 집중했으나

결국 중국 통일제국은 이후 밖으로 눈을 돌리게됬고

수 문제의 다음 황제인 수 양제때부터는

대대적으로 한국과 중국이 충돌하게 되고

이후 신라의 삼국통일로 삼국시대가 끝나게됩니다


이로서 삼국시대의 외교정세는 급변하게됬고

당대의 고구려,백제,신라 한국 삼국인들 모두

이 상황에 긴장하게 된거 같습니다,,


다시 삼국사기 기록에는,,

(수나라의)전함(전투에 쓰는 배) 한 척이 탐모라국으로 표류해왔고

그 배가 돌아가게 되서

국경을 통과할 때

위덕왕이 물자를 풍성하게 줘서 귀국케하고

사신을 보내서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렸다고 합니다


탐모라국은 제주도라 할 수 있고

저가 예전에 다른 이야기인

담모라국 대만설이야기를 한 적이있는데

중국 기록에서는 수가 진을 평정하던 해

담모라국에 전선,전함 한척이 표류해서

담모라국에 닿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문제는 백제에서 남쪽바다로 3개월을 가면

담모라국이 나타나고 남북이 천여리,동서가 수백리라는

기록 때문에 담모라국 대만설이 이야기 되기도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대만에 표류했는데

군선이 굳이 백제를 들러서 중국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는거 같고 담모라국은 대만이라는 이야기가 있기는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제주도라고 비정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표류한 수나라의 군선이

위덕왕의 예우로

백제를 거쳐 다시 수나라에 돌아가자


수나라 고조,수나라 문제가 이를 훌륭히 여겨서

조서를 내려서 말했습니다


<수 문제>백제왕이 진나라를 평정하였다는 말을 듣자

멀리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쳤다


왕래가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니

만약 풍랑이라도 만나면

사람이 상하고 재물을 잃게 될 것이다


백제왕(위덕왕)의 마음이 순박하고 지극한 것은

내가 이미 깊이 알고 있다


(위덕왕은 태자시절 전쟁에서 선봉에서서

용맹한 모습을 보였으나 자신의 그런 호기로움으로

아버지였던 성왕의 죽음을 불러오고

이후 왕이 된 이후로는 아버지를 기려서

일본 호류사에 있는 '구세관음상'을 만드는 등

수 문제의 말같이 순박하고 지극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생각됩니다)


거리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얼굴을 대하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하필 자주 사신을 보내어

서로 대면할 필요가 있겠는가 ?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하지 말 것이며

나도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그리 알 것이다


(아무래도 수문제는 그의 성격상

외치보다는 내정에 집중한 거로 보이고

외국과의 관계를 최소화하고

내정에 집중하려 한 의도로

말한거 같습니다 비록 우리나라 고구려를

공격했던 수나라의 황제였지만

인물됨 자체는 유능한 인물이었던거 같습니다)


위덕왕 39년

7월 가을

그믐(달의 마지막 날) 임신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위덕왕 41년

11월 겨울 계미

혜성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습니다


위덕왕 45년

9월 가을

지진이 있었습니다


위덕왕은 수나라가 요동전쟁(고구려 침공)

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해서

표문을 바치고

군사의 향도(길잡이)가 되기를 요청했고

황제(수 문제)가 조서를 내려서


<수 문제>왕년(지난날)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 高元 (고구려 26대왕 영양왕의 이름)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


라고 말하고

우리(백제)사신을 후대 厚待 (아주 잘 대접하다)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고구려가 그 일을 모두 알고

군사를 보내서 우리(백제) 국경을 침략했습니다


고구려는 가뜩이나 수나라와 육로로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모처럼만의 중국 통일제국

등장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밑에서 백제가 수나라를 돕겠다 하니

괘씸해서 백제를 공격한거 같고

결국 위덕왕은 얻는것도 없이 손해만 본 셈이

됬다고 합니다


외교에서 적극적으로 실리를 얻어냈던

신라와 다르게 괜히 미운털만 박히고

다녔던 위덕왕대의 백제 외교 같습니다,,


12월 겨울

위덕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군신들이 의논해서

시호를 위덕 威德 이라 했습니다


<라봉봉>원래 삼국역사는 후기로 갈수록

글들이 많아지고 길어지기에 요즘

글들이 많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굳이 삼국만이 아니라 후대로 갈수록 기록방법의 발달등으로

기록이 늘어나는거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위덕왕 이야기에 대한 생각들은

이야기 도중에 틈틈히 썼고


위덕왕은 아버지가 관산성전투에서 사망하고

급하게 왕위를 이어받았음에도

45년간 재위한 것을 보면

나름 안정적으로 조용히 백제 국정을 운영한거같고

당대의 가장 큰 변수는 중국에 통일왕조 수나라가

등장했다는 것으로 이때 한국 고구려,백제,신라 삼국모두

긴장하며 지켜본 것으로 보입니다


잘 말하면 용맹하고 순박한 대장부타입의

왕이었던거로 보이고

외교관계에서 괜히 수나라에 잘보이려다

고구려에 미운털이 박히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점 빼면

그래도 좋지만은 않았던 상황에 즉위해서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던 왕 같습니다


이외에 빼먹고 쓰지 못한 이야기인데

일본서기에서는 그가 즉위할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서기>(555년) 8월 백제 여창(餘昌)(위덕왕의 이름, 부여창)이

여러 신하들에게

“소자(少子)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父王)(성왕)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修道) 한다”

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하십니까.

무릇 도리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늙은 노인(耆老)


(60세 이상의 노인, 

60세이상의 늙은 백제신하가 위덕왕의 태자시절

신라를 공격하려는 거를 말리다가 위덕왕이 겁낼게 뭐있겠냐며

공격하다가 결국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죽게됩니다,,)


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으시다면

나라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였다. 여창이 “좋다”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운운하였다.


-일본서기-


즉 태자 부여창,위덕왕은 자신의 호기로움,고집때문에

신라군에 아버지(성왕)와 백제 좌평 4명(고위직),

많은 군사들(2만 9천 600명,,)이 죽었다는

(즉 왕,귀족,일반 병사 할거없이 몰살당한

백제군의 참혹한 대패였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고 승려가 되려했으나

결국 신하들의 만류로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키고

왕위를 잇게됬습니다


사실상 위덕왕도 자신때문에

왕,귀족,백성들 모두 몰살당했다 할 수 있기에

백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별 면목이 없었고

정통성은 있었다 하더라도

위덕왕으로 일어난 관산성 전투는

워낙 백제사회에 큰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기에

스스로도 죄책감과 왕위를 이을 면목이 없었던 거로 보이고

이에 신하들에게 출가해서 승려가 되겠다 하자

그래도 신하들이 만류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그런거까지는 하지 말라해서 그 말을 듣고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됬고

모처럼만에 동성왕 - 무령왕 - 성왕의 치세에

높아진 백제 왕권이 무너지고 다시 귀족들의 권한이

강해지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오랫동안 이어온 왕권이나

신용같은거는 하루아침에

무너지는거는 아닌거 같고

나름 백제도 그간에 중흥기를 거치며 왕권이 안정됬기에

신하들도 위덕왕에게 그러게 늙은 노인(늙은 백제 신하)에 말을

들었다면 여기까지 왔겠냐며 말하면서도

위덕왕이 떠나는 것을 말리는 모습을 보였던거 같습니다,,


또 위덕왕이 죽을때 다른 백제왕들과 다르게


'군신들이 의논하여 시호를 위덕이라 하였다'


라고 나오는데 그냥 시호를 위덕이라 하였다도 아니고

굳이 군신들의 의논하여라는 말이 쓰인 삼국시대왕은

위덕왕이 유일하다 하고

그만큼 왕권이 불안정하거나 혼란한 백제정국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외에 백제시대 왕중에서는 드물게

위덕왕의 유물이 한국에 다수 존재한다 하고

유물에 쓰여진 글들에는 위덕왕이라기보다

그의 이름같이 창왕이라 써있습니다


그의 일생들을 보면

용맹함,호기로움과

순수함,순박함이 섞여있어서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느낌도 나고

묘한 느낌을 받게되는거 같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왕위를 잇지 않겠다는 모습과

백제 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온 태자임에도

결국 백제 귀족들도 그런 그를 말리고

왕위에 옹립하기는 했다는 점 등

위덕왕 威德王 의 시호

위엄 위 威 덕 덕 德 같이

인덕 자체는 있었던 인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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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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