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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오오,, 다시 방문자가 500을 넘겼습니다

다시 줄수도 있으나 기쁜 일이고

꾸준히 글을 쓰고있습니다

역사 궁금하신거나 저가 쓴 역사 이야기에서 의문인 것들은

블로그에 댓글달아주시면 친절히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


<위덕왕의 태자시절 백합야 전투>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은 그의 인생,성격상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 고구려 시조 주몽이나

온조왕같이 북방에서 내려왔을때의

담대함 등을 흠모해서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친거 같고

또 근초고왕같이 강력한 왕이 되고싶어했던거 같습니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 역시 근초고왕의 담대한 아들이었던

근구수왕을 닮고싶어했던거 같고

옛 백제의 영광(근초고왕,근구수왕)을 다시 찾고

싶어했던 두 인물(성왕,위덕왕) 같습니다

위덕왕은 태자시절부터

아버지 근초고왕을 도와 태자시절부터 참전해서

공을 세웠던 근구수왕 같이 역시 성왕대에

백제 태자로서 직접 전장에 나가서 신라군과 싸운다거나

하는 모습 등을 보였고 그 결과(관산성전투)로 부왕 父王 인 성왕이

죽게되나,, 근구수왕 같이 직접 전장에 나가 지휘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백제의 태자임에도 상대 장수와 일기토, 1-1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왕들이 직접 전장에 나가는 모습등은

중앙집권화 이후 국가의 규모가 커지며 줄어들었으나

삼국의 중앙집권화가 완료된 성왕대에는

불교쪽에서 강력한 왕을 의미하는 '전륜성왕' 사상이

삼국에 유행하며 다시 삼국에 왕들이 직접 전장에 나가는게

유행했던거 같습니다 당대에 고구려 왕 흥안, 안장왕도

태자시절 놀러간 백제땅에서 정을 통한 여인,한구슬(한주 韓珠)을

구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직접 백제땅으로 갔고

백제 성왕과 성왕의 아들,태자 부여창(위덕왕) 이나

신라 진흥왕은 직접 정복한 영토들을 순수,돌아다녔고

강력한 왕도사상 등이 삼국에 유행해서 삼국 왕들이 모두

직접 나서며 군대를 지휘하던 시기 같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위덕왕이 태자 부여창(=여창)시절

직접 전장에 나가서 고구려군과 1-1 전투를 한 기록이 있고

이를 일기토 (혹은 비슷한 사례로는 결투)라 부르고

보통 삼국지에서 장수들이 나가서

1-1로 무예를 겨루는 거로 유명합니다

최종 지휘관인 왕,왕족보다는

무력치가 높은 장수들이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백제국 태자가 직접 나갔다는 것은

그만큼 위덕왕이 무력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본서기' 기록의

위덕왕의 태자시절 고구려군과 일기토를 벌인

백합야(백합 들판) 전투 이야기입니다


<일본서기>

(553년) 겨울 10월 경인(庚寅) 초하루 기유(己酉)

백제(百濟)의 왕자 여창(餘昌)【명왕(明王)(성왕)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이다】

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高麗國)(고구려)을 향했는데,

백합(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태자 부여창은 이렇게 전쟁터에 직접 나가서

선봉[맨 앞]에 서서 군사들과 함께한

용맹한 태자였던거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자의 호기로움으로 인해

부왕인 성왕이 죽게됬고 이로 인해 부여창,위덕왕은 충격을 받고

정신적으로 상당히 망가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 부는 소리가 들리니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목 경 頸 갑옷 개 鎧, 목에 두르는 갑옷)를 입은 자 1기(騎) (말탈 기 騎, 기병)

징을 꼽은 자【징(鐃)인지 아닌지 자세하지 않다】 2기(騎),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기(騎)

모두 합해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 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겠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이를 '나노리'라 하며

삼국에서 일기토 전에

관등성명을 밝히는 예같은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여창이 "성(姓)은 (고구려 왕실과) 같은 성이고(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 백제 온조왕)

관직는 간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 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왕자)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여창이)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東聖山)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그렇게 태자 부여창은 위덕왕이 되기전 직접 고구려장수와

1-1로 싸워서 머리를 베었고 이에 백제군사들의 사기가 올라가서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른것으로 보여집니다

고구려 양원왕때 백합야 전투가 벌어져서

양원왕 이야기를 쓸때 백합야 전투 이야기를 쓴적이 있습니다,,



벡제인들도 북방 부여,고구려계 인물들이

남방 마한지역 세력과 결탁해 나라를 세웠지만

이렇게 태자가 직접 나서는둥 왕,태자들이 직접

전장에 나가서 선봉(맨 앞)에 서는게

미덕으로 여겨진거 같고 백제 후손들도

북방,고구려 선조들의 용맹함을 잊지 않고

백제에서도 용맹한 문화들이 있었던거 같고

성왕과 위덕왕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을

흠모,롤모델로 삼았던거 같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죽음으로서 백제사회에서는 큰 충격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라봉봉>용맹하고 호기로운 태자였으나

안타깝게도 당대의 삼국의 상황은

옛날 근초고왕대 백제때 같이

백제가 다른 삼국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선진적인 문물을 가진 상황도 아니었고

신라가 급격히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백제 최전성기였던 옛 근초고왕,근구수왕대의 영광을

다시 찾을수는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덕왕은 이렇게 태자시절 직접 선봉에서서

전투를 했고 이를 걱정한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은

아들의 전투를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위문하러 오다가

신라군의 공격에 사로잡혀 목이 베어져 사망하게 된거 같고

이에 위덕왕은 자신때문에 아버지가 죽었음에

이후 불교,도교나 내세문화 등에 심취하게 된거 같습니다,,

(백제인들의 이상향,평화적 세계관이 담겨있는

금동대향로 제작이나

일본 호류사에 있는 위덕왕이

성왕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다는 구세관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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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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