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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에 사신을 보내서 예방(예의차 방문)한 혁거세 거서간>


혁거세 거서간 32년

8월 가을

그믐(달의 마지막 날) 을묘일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혁거세 거서간 38년

2월 봄

호공 (호공 瓠公 신라 초기의 인물, 신라 초기의 재상인데

특이한 점은 왜국 즉 일본 출신의 인물이었다고 하고

신라가 경상도 지역에 위치해있어서

가까운 왜[일본]와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줍니다,

왜국 출신이라 함은

진짜 왜 출신이라기보다 한국 남부와 왜에서 활동하던

해상세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해석된다고도 합니다


또 호공은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와서

박 호 瓠 자를 써서 호공 瓠公 으로 불린다고도 합니다)


을 보내서 마한 馬韓 (백제의 원형, 이곳에

온조왕이 백제를 세우고 마한을 통합해서

마한은 이후 백제가 됬습니다)을 예방(예의차 방문)했습니다


마한왕 馬韓王 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마한왕>진한(신라의 원형)과 변한(가야의 원형)은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 ?!


(신라)호공이 대답했습니다


<호공>우리나라에 두 분의 성인(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와

그의 아내,왕비 알영부인 알영)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 天時 (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

때를 따라서 돌아가는 자연현상, 하늘의 때)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조선[고조선]의 후예들)들로부터

변한(가야),낙랑(중국),왜인(일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 心服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하다, 진심으로 복종하다,,)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마한왕이 분노해서 호공을 죽이려 했으나

측근들이 간하여 이를 말리자

그(호공)의 귀국을 허락했습니다,,


(호공은 신라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는

인물,신라 재상으로 이 때 마한에 사신으로 간

기록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이 기록에서는

신라 역시 당대에 남쪽 한국에서 대장노릇을 하고 있었던

마한에 할말은 하고 있기에

이는 신라의 국력의 신장을

나타내는 이야기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나라 秦 (혁거세 거서간 이전의

진시황의 진나라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폭정을 일삼자

중국인들 일부가 이를 피해

한국 중남부로 이주해 왔고

마한이 그들의 동쪽땅을 분할해 주었다고 합니다)


가 일으킨 난리로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한국)으로 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이 시기(혁거세 거서간 대)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해서

이와 같이 책망했던 것이었습니다


(마한은 당대 한국의 대장노릇을 하고있었고

친히 중국인들에게 땅까지 주며 살게해줬는데

혁거세 거서간이 한국 동부인들을 통합하며

번성하기 시작하자 신라에

질투와 견제를 했던 거로 보입니다

특히 신라[진한]와 백제[마한]는 같은 한국 남부지방이었기에

이렇게 초기부터 여러 충돌이 있어왔습니다)


<김부식>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 倭人 (일본의 원형)이었는데

처음에 박(호리병)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 匏公 (박,호리병 포,호 匏 고 공 公 은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이라고 불렀다


<라봉봉>즉 위에서 쓴 거같이

호공은 왜인(일본) 출신이지만 당대 일본은 마땅한 세력이 없이

한국인들이 건너가서 살았던 땅이기에

한국과 다를바 없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거 같고

실제로 한국과 일본은 정말 뗏목을 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고

그만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특히

한국 동남부,경상도 일대의 신라는 일본과 정말 매우 가깝습니다,,

또 당시 왜, 일본은 6세기 경까지 한국인들과

통역 없이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하고

이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가까운 일본에 건너갔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할 수 있고

당대의 왜,일본을 오늘날과 같은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저 생각에는 민족주의적인 우월주의 이런 이야기를 거르더라도

실제 당대 왜는 한국인들의 영역이었던 것 으로 생각되고

굳이 왜로 구분한 이유는 아무래도 왜 지역은 한국과 구분되게

배를 타고 건너가야하는 섬이었고

또 한국과 다른 면도 있기도 한 큰 섬이었기에

나름 그곳에서 한국인들이 왜의 풍토에 적응하며

한국 본토와 다른 독특한 생활방식을 만들어 내며

이후 더 한국과 크게 분화되기에 구분되고 이후 일본의 건국으로

이어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한국과 일본이 비슷하다지만

일본은 덥고 습하고 해양문화가 발달했기에

자연히 의복도 짧거나 간소하게 입었지 않았을까 싶고


(실제 옛날 일본옷들은 되게 풀어헤치거나 개방적인 모습이었고

음란하다기보다는 대게 동남아나 남쪽 적도 지방 사람들 역시

그런 모습을 보이듯이 덥고 습한 날씨에서 비롯된거 같습니다)


초기엔 한국에서 계속 문물들을 받아들여왔으나

점점 의복과 생활양식의 차이등이 나타나며

한국과 다른 길을 것게 된거 같습니다


실제 오늘날 일본인들의 유전자는 중국인들과는 별 관련이 없는데

한국인들과는 매우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먼 옛날부터 일본에 건너갔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고

호공 역시 그런 인물들의 후손이거나 했을거 같습니다


당대 기록은 신라 혁거세 거서간의 외교기록으로

진한지방이 '두 사람의 성인' 이라고 불리는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부인의 출현으로 번성하게 되고

이에 신라의 국력이 신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고

진한,신라 역시 초기엔 풍요로운 경기,충청,전라도 일대에 자리잡기도 했고

중국과 가까워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좋았던 마한,백제에 비해

부족한 것은 많았지만 현명한 정치 등으로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고

이후에도 여러 신라에 위기가 있었으나

조용히 연명하다가,, 후대에 큰 번영을 맞게되며

이후 삼국을 통일하는 나라가 됬고 신라는 별다른 화려함 등은 없어도

모범적이고 지혜로운 모습 등으로 위기를 타개해나간 모습들이 많습니다


당대 한국 남부에서 대장노릇을 하던

마한왕도 신라의 번성함에 위기의식을 느꼈으나

딱히 뭐라 트집잡을 구석도 없어서

호공을 그냥 돌려보내게 된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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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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