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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임금 혁거세 거서간>


혁거세 거서간 39년

마한왕(마한의 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혁거세 거서간에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서한왕 西韓王 (서쪽 한국 왕으로

여기서 서한왕은 마한왕을 말할 것이고

그러면 신라는 동한왕 東韓王 일 것입니다)이

이전에 우리 사신(호공)을 모욕했습니다


이제 그 국왕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그 나라를 충분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혁거세 거서간이 말했습니다


<혁거세 거서간>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혁거세 거서간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서 조문했습니다


<라봉봉>당대 상황을

혁거세 거서간의 성인적 모습만 보는게 아닌

인간적,현실적으로 해석한다면

혁거세 거서간이 정말 어질고 덕이 있기만 해서

(근데 너무 어진 모습들을 보여오기는 했습니다,,)

마한왕이 죽자 마한을 공격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마한은 당대 경상도 일대의 신라가

공격하기에는 너무 컸고 당대까지는 정말 강한 나라였기에

단순히 혁거세 거서간이 어질고 덕이 있어서

공격하지 못한거는 아니고

작정하고 공격했더라도 마한을 충분히 평정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신라 사신을 면박준 마한왕이 죽자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감정적으로만 행동하지 않고

침착하게 사신을 보내서 현명한 처세를 했다는 것은

어찌됬건 건국 초기의 나라들은 그 규모가 작았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아야 했는데

혁거세 거서간 역시 현명하고 올바른 처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승하하신 혁거세 거서간>


(*승하 升遐 [높이는 뜻으로]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

먼 곳에 오른다는 뜻으로 천자 天子 만이 사용 가능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혁거세 거서간 40년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온조왕, 부여온조의 백제는

마한의 영역에 자리잡았고

백제는 이후 마한을 계승해서

신라와 계속 싸우게 되고

도중에 고구려에 남진정책에 대응해서

120년 정도를 나제동맹을 맺기도 하나[나제동맹]

멸망 직전까지 끊임없이 신라와 견원지간,

앙숙의 관계로 처절하게 다투게 됩니다,,

이에 비해 고구려는 북방에서 중국,유목민족,

북방 한국 세력들과 다투다가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점점 팽창하며

서로 영역이 맞붙게 되고 본격적인 삼국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혁거세 거서간 43년

2월 봄 그믐(달의 마지막 날) 을유일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혁거세 거서간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동옥저 사신>우리 임금이

남한 南韓 (신라는 옥저의 남쪽이기에

남한은 신라를 의미합니다)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혁거세 거서간 54년

2월 봄 기유에

혜성이 하고 성좌에 나타났습니다


혁거세 거서간 56년

정월(1월) 봄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혁거세 거서간 59년

9월 가을 그믐(달의 마지막 날) 무신일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혁거세 거서간 60년

9월 가을

두마리의 용이 금성(신라 수도) 우물에 나타났습니다

우레(천둥)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습니다


혁거세 거서간 61년

3월 봄

거서간이 붕어했습니다

(居西干升遐 거서간승하)


사릉에 장사지냈습니다


<김부식>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라봉봉>혁거세 거서간이 승하하기 전에

두마리의 용이 나타났는데

용은 신성한 동물이면서도 또한

삼국사기 기록들에서는 왕들의 사망 전에 나타기도 해서

임금,왕의 죽음을 알리는 동물이기도 했던거 같습니다


어질고 덕이 있었고 지혜로운 임금이었던

알에서 태어난 신라 임금 박혁거세, 혁거세 거서간은

그렇게 승하했는데

승하는 위의 설명과 같이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성왕,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죽음에도

王升遐 왕승하 라고 썼고

혁거세 거서간,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죽음에도

居西干升遐 거서간승하 라고 높여 기록했는데

이상하게 백제 시조 온조왕, 부여온조의 죽음에만

王薨 왕훙 (훙 薨 역시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나 일반적 표현이고

승하같이 높이지는 않은거 같습니다)

이라 썼고

이는 삼국사기를 쓴 당대 고려인이었던 김부식님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기에 고구려를 자세히 쓰고

또 삼국을 통일하고 한국의 원형이 되고

조상들인 신라를 높여야 했고 아무래도 삼국을 통일했기에

그 기록 역시 가장 자세하고 많았던 신라는 자세히 또

높여 썼으나 백제는 고구려,신라와 격렬하게 싸우다가

양쪽으로 미움받는 입장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덜 자세히 쓴거 같고

또 백제인들 역시 충청도,전라도 지역에 많이 남기도 했지만

왜,일본으로도 많이 건너갔기에

이에 백제 기록은 의외로 일본측 기록이 자세하고 정확합니다


그렇게 혁거세 거서간은

기원전 57년 4월 15일 부터

기원후(서기) 4년 3월까지

60년 11개월간 신라의 거서간(임금)으로서

어질고 덕있는 정치를 하며

신라 시조,건국왕으로서

신라 초기의 기틀을 잡았고


그렇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


라는 한국 속담같이

신라는 정말 떡잎부터 아니

뿌리부터 좋은 자질을 보이는 나라였음을 보여주고

건국 초부터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됬습니다


신라인들의 강함은

고구려인들의 무예와 용맹한 기상도 아니었고

백제인들의 풍요로움과 세련된 문화도 아니었으나

신라인들은 도덕적이고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면에서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여줬고

실제로 세계를 살아간 수많은 사상가나

정치인들이 수많은 영향을 끼쳤듯이

신라 역시 그런 방식에 상당히 강점을 보이며

삼국에서 가장 약소국으로 시작했지만

끝내 삼국을 통일하는 대업 大業 을 이루게 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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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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