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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국가적 모습을 보였던 남해 차차웅대의 신라>


남해 차차웅 원년(1년)


낙랑(중국 한나라가 한국 조선[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조선 땅에 설치한 군현, 즉 중국)군사가 쳐들어와서

신라 수도인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습니다


남해 차차웅이 측근(혹은 좌우 대신들)에게,,


<남해 차차웅>두 분의 성인(신라 1대왕,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과

혁거세 거서간의 부인,왕비 알영부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해 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측근들이,,


<측근들>적은 우리나라에 국상 國喪 (국가적인 초상이 난것,

어질고 현명한 임금이었던

혁거세 거서간과 그의 부인 알영부인의 죽음을 뜻합니다)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 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 입니다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낙랑 군사들이 물러갔습니다


<라봉봉>신라는 아직 초기 국가였기에

여러 안보적 불안한 요소들이 있었으나

외국에서 굳이 먼 경상도 일대까지 침범해봐야

이미 남해 차차웅 전 혁거세 거서간 대에

잘 다스려진 나라를 공격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아들 남해 차차웅(박남해)도

처음엔 중국 낙랑 군사의 공격에 두려워했으나

혁거세 거서간의 선정으로 신라는 풍요로워져 있었던 상태로

나름 요즘 비유로 '금수저'를 물고 시작한 인물이라

인물됨을 떠나서 신라는 이미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선대 왕이나 조상,부모가 능력치가 매우 높아서

나라,가정을 부유하게 해 놨을 경우

'부자가 망해도 3년(3대라고도 합니다)은 간다' 라는 한국 속담 같이

어지간하게 자식이 흥청망청해도

훌륭한 조상들은 여기저기 이뤄놓은게

많이 있어서 잘 안망합니다,,

물론 그럴 경우는 당연히 좋은 경우는 아니고

조상이 힘들게 천천히 이뤄놓은것 역시

후손들도 당장은 안망하듯이 펑펑 쓰다가 결국

천천히 하락세를 타게 되는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남해 차차웅의 측근,주변사람 혹은 좌우대신들 역시

두려워 할 게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미 선대왕이자 건국왕, 시조였던 혁거세 거서간이

나라 운영을 제대로 튼튼하게 잘 해놨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남해 차차웅 역시 어리석거나 못난 일들을 한

인물은 아니었고

선대왕이 물려준 훌륭한 기반으로

신하들의 조언을 들으며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해 차차웅 3년

정월(1월) 봄

시조묘(국가 시조를 모시는 묘,사당)을 건립했습니다


(옛날 한국에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절과 승려[스님] 대신에 이렇게 사당과 무당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이런 사당[신사 神社]같은게 많이 있고

일제강점기때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사당에 참배를

강요하는게 있었으나[신사참배 강요]

정작 일본의 사당은 한국의 사당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겨울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남해 차차웅 5년

정월(1월) 봄

남해 차차웅이 탈해 脫解 (석탈해 昔脫解 , 이후 신라 4대왕

탈해 이사금) 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장녀(첫째 딸)를 그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남해 차차웅 7년

7월 가을

탈해(석탈해)를 대보 大輔 (오늘날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습니다


<라봉봉>석탈해 역시 지혜롭고 어진 인물이었기에

남해 차차웅은 그를 신임하게 되고

큰 직무를 맡기게 된 것으로 보이고


혁거세 거서간이 왜(일본) 출신의 호공을 등용한 것처럼

그의 아들 남해 차차웅도 왜 출신(정확히는 왜 동북쪽 용성국)의

석탈해를 등용하며

국정에 대한 중요한 일들을 맡기며

훌륭한 아버지였던 혁거세 거서간의 행적들을

국정에서 따라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기 신라는 왜가 역시 가깝기에 여러 충돌도 있었으나

또 많은 한국인들이 가까운 왜로 건너가서

활동 영역으로 삼았기에 당대 왜는 오늘날 일본이라 보기보다는

언어도 통하고 대신 왜라는 섬 자체는 크기 때문에

한국과 이질적인 면도 양립하던 시기라 할 수 있고

한국과 충돌도 교류도 많았고

특히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서 시작했는데

바로 동해바다 건너가 왜 지역이어서

특히 왜와의 교류,충돌이 초기부터 많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석탈해는 기원전 19년 (추정) 정도에 태어나서

서기 8년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 대보,국무총리격이 되었는데

이는 고작 나이 30살도 안되서 신라의 재상,총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초고속 승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유례가 많이 없는것 같아도

의외로 오늘날에도 많이 보이는데


이런 초고속 승진이 가능하려면

2가지 정도의 조건이 갖추어 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1)나라,기업,조직 등이 막 시작하는 단계,

초기 일 것(요즘말로 스타트업)


2)고위,중요직에 사람이 없을 것


물론 입체적이고 다변화된 세상을

이렇게 단순히 2가지로만 볼 수 없고

개인의 능력치가 매우 출중하거나

하는 여러 변수가 있으나 보통 이런 경우들에

초고속 승진등이 있어왔고

석탈해가 30살도 안되서 나라에 정사를 맡게 된 이유는

신라가 당대에는 비록 시조,첫번째 왕 혁거세 거서간이

여러 올바른 정치를 하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으나

아직도 외국의 침략에 두려워하는 초기,신생국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또 초기 국가였기에 고위직이나 거대한 규모였다기 보다는

마을 부족장 몇명과 추장(왕)같은 식으로 운영되다가

점점 규모가 커지며 국가의 형색을 갖춘 것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옛날 초기의 왕들은 대부분 이렇게 멀고 높고 다른세계에 있는

그런 느낌보다는 평민들과 같은 지역에서 거주하며

했던거 같고 그렇기에 석탈해 같은 젊은 인물들이

빠른 속도로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었을 것이며

물론 이런 젊은 인물들도

자리를 점차 잡아가고 사회가 안정되면

나이가 들어가고 노인이 되는 것이며

이때부터는 초고속 승진같은게 매우 어려워 진다고 할 수 있고

조선시대 역시 초기에는

조선 6대왕 세조시대에

27세에 최연소 병조판서(오늘날 국방부 장관)가 된

남이 장군같은 같은 젊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점점 귀족,관료화된 신라,조선의 중대,후대에서는

물론 예외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례가 있기 어려운 경우들이었습니다


두번째 경우는 고위,중요직에 사람이 없을 것인데

전쟁때 장군들이 많이 죽어서

젊은 장군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삼국통일기 당시에 잦은 전쟁으로

여러 인물들이 나오긴 했으나 대부분 젊었을때 죽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대한민국은 초기 국가였기도 했고

전쟁으로 고위선들이 많이 죽었어서

장군,장교들의 연령이 오늘날보다 젊었습니다,,


물론 두번째 경우는 좋은 사례는 아니나


이렇게 초고속 승진의 경우는

오늘날에도 작은 기업체나 신생 기업,

소규모 집단등에서 충분히 계속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이미 규모가 커진 대기업이나 국가 규모가 큰 나라등에서는

이미 자리잡은 세대들이 있기에

이런게 불가능하거나 어렵다고 할 수 있기에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눈을 낮추고 도전하라' 라고 하는 말이

속된 말로 훈수질,꼰대질이라고만 생각되기 보다는

실제 좋은 기회를 잡으려면 이미 발전된 곳(레드오션)보다는

새로운 곳(블루오션)을 개척해야 할 필요도 있기에


솔직히 이런 꼰대질이라고 조롱받는 말들이

여러 논란이 있음에도

또 정작 성공한 인물들은

이런 말은 잘 안하더라도

이런 것을 실천하며

온갖 고생과 고생들은 많이 한 인물들이 많은거 같습니다


실제로 독재자나 악평을 받는 인물들도

여러 좋은 명언들을 남기는 경우가 있으나

정작 본인들은 실천을 안했고,,

말 자체가 틀린것만은 아닌거 같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초기 신라나 신라 뿐만이 아닌

한국 삼국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초기 국가단계에서는 부족적인 성격도 많았고

불안 요소도 많았기에 이런 초고속 승진들의 사례가

여럿 있어온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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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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