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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7대왕 일성 이사금 (일성왕 박일성)

재위기간 20년 134~154년


일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신라 3대왕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입니다


<김부식>혹은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박씨인데

그녀는 지소례왕의 딸이었습니다


<라봉봉>신라는 국왕 말고도

여러 왕들이 있었다고 하고

이는 마을의 촌장격이나

제후 성격의 명예직 왕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갈문왕은 왕실과 관련된 인물의 명예직 칭호라고

할 수 있고 앞으로 이야기에도 나올것입니다


유리 이사금 박유리는 자식들이 재능이 부족하다 하여

박씨가 아닌 석씨인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했고

신라 4대왕은 탈해 이사금이 됬는데

탈해 이사금 이후 5대왕은 또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박파사가 첫째아들 박일성보다

사람됨과 총명함이 있다고 해서

형을 제치고 신라 5대왕 파사 이사금이 됬고

6대왕은 파사 이사금의 장남 박지마가 신라 6대왕

지마 이사금이 됬는데

특이하게 7대왕은 다시 유리 이사금의 장남,첫째 아들이자

파사 이사금의 형이었던 박일성이 다시

왕위에 올랐고

이는 혈연,적장자보다는 능력,인물 위주로 왕이 되었던

오늘날 민주주의와도 닮아있는

신라 초기의 열린 정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박일성은 태자였음에도 인물됨 등이 부족하다고 하여

왕위를 계승받지 못하고 조용히 지냈을 것이며

여러 왕들이 바뀌는 와중에도 애초에 왕위를

계승받지 못할거라 여기고 조용히 살거나 했던 모습으로

지냈던거 같기도 하고 다른 신하들도 자신을 제치고

다른 인물들을 왕위에 올리는 모습에

기록들과 같이

가뜩이나 속이 넓거나

하는 인물도 아니었을거 같은데,,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름 오랜 기간동안

왕위가 바뀜에도 살아남았던 것을 보면

나름 부족한것을 인정하고 현명한 처신을 하다가

지마 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성 이사금 원년(1년)

9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일성 이사금 2년

정월(1월) 봄

일성 이사금이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일성 이사금 3년

정월 봄

웅선을 이찬(신라 2등벼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근종이 일길찬(신라 7등벼슬)이 됬습니다


일성 이사금 4년

2월 봄

말갈이 국경을 침범해서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나무 울타리,목책)을 불태웠습니다


일성 이사금 5년

2월 봄

금성(신라 수도)에 정사당 政事堂 (신라시대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국정을 의논하던 곳)을 설치했습니다


7월 가을

알천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했습니다


10월 겨울

일성 이사금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습니다


일성 이사금 6년

7월 가을

서리가 내려서 콩이 죽었습니다


8월

말갈이 장령을 습격해서

약탈하고 주민들을 잡아갔습니다


10월 겨울

말갈이 다시 습격해왔으나

우레(천둥)가 심하게 울리자 물러갔습니다


일성 이사금 7년

장령에 목책을 세워서 말갈을 바어했습니다


일성 이사금 8년

9월 가을

그믐(달의 마지막 날) 신해일에

일시기 있었습니다


일성 이사금 9년

7월 가을

일성 이사금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말갈을 공격할 것을 논의했으나

이찬(신라 2등벼슬) 웅선이


<웅선>불가능 합니다 !


고 일성 이사금에게 말하자

일성 이사금이 이를 중지했습니다


일성 이사금 10년

2월 봄

궁실을 수리했습니다


6월 여름 을축에

화성이 토성을 범했습니다


11월 겨울

우레(천둥)가 있었습니다


일성 이사금 11년

2월 봄

일성 이사금이


<일성 이사금>농사는 정치의 근본이고

먹는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처럼 귀중한 것이제


모든 주와 군에서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개간하여 넓히라카이 !


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일성 이사금>민간에서는 금과 은, 주옥(구슬과 옥)의

사용을 금하라케라 !


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성 이사금 12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남쪽 지방이 가장 심해서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식량을 운반해서 그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일성 이사금 13년

10월 겨울

압독(옛 압독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풀어서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을 남쪽 지방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일성 이사금 14년

7월 가을

신하들에게 명해서

장수가 될만한 지혜와 용맹을 갖춘 자를 각각

천거(사람을 추천)하게 했습니다


일성 이사금 15년

박아도(사람 이름 박 아도)를 갈문왕에 봉했습니다


<김부식>신라에서는 추봉 追封 (죽은 뒤에 봉함)한 왕들을

모두 갈문왕 葛文王 이라 부르는데

그 의미는 확실하지 않다


(왕실과 관련있는 인물들만이

갈문왕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성 이사금 16년

정월(1월) 봄

득훈을 사찬(신라 8등벼슬)

선충을 내마(=나마, 신라 11등벼슬)로 삼았습니다


8월 가을

혜성이 천시 성좌에 나타났습니다


11월 겨울

우레(천둥)가 있었고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습니다


일성 이사금 17년

여름 4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습니다


일성 이사금 18년

2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웅선이 사망하자

대선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3월

우박이 내렸습니다


일성 이사금 20년

10월 겨울

궁궐 대문에 불이 났습니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동북쪽에 나타났습니다


일성 이사금 21년

2월 봄

일성 이사금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일성 이사금은

유리 이사금의 첫째 아들이라고도 하나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동생이 왕위에 오른지 54년 뒤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기에

그의 가족관계, 혈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들이 있습니다


비록 재위 전에는 여러 정치적인 문제 때문인지

개인의 소양이 부족해서 인지

태자였음에도 뒤늦게 왕위를 잇게 되었으나

나름 정치적 행보로는 신하들의 말을 들으며

무리한 원정을 자제하기도 하고

농업에 힘쓰기도 하며

무난한 행보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고


일성 이사금도 오랜 기간동안 태자였던 본인이 아닌

다른 인물들이 왕위를 이었던 것을 지켜봤을것인데

그런 기간동안 생존해있었던 것을 보면

나름 여러 현명한 처신들도 했던거 같고

일성 이사금이 부족했다는 것은

그가 어리석고 못나서 왕위를 잇지 못했다기 보다는

일성 이사금은 나름 평범한 인물이었는데

다른 인물들(석탈해,박파사)이 그보다 더 뛰어나서

그를 제치고 왕위를 잇게되다가

박파사의 아들이었던 박지마, 지마 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거 같고

나름 일성 이사금도 왕위에 오르고도

무난하고 평범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보이고


큰 피해나 무리가 있는 기록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서

하여튼 무능한 인물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운거 같은데

그만큼 신라 초기의 인재풀이 좋고

나름 혈연적 계승이나 적장자 계승보다는

능력,실력 위주로 왕위가 바뀌었던 초기 신라같고

이는 민주정과도 닮아있기에

초기 신라가 발전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계승자의 혈연보다 능력을 중요시 하는 풍조들은

의외로 북방 기마민족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데

신라 역시 북방 기마민족이

경상도 지역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설들이 있고

한국 기마민족인 부여의 후예였던 고구려나 백제 역시

신라같이 아예 다른 성이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초기에는 적장자 계승보다는 능력 위주의

계승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고

오히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이후 왕권의 부자상속이 고착화 되면서

정치적으로는 더 후퇴한 모습을 보인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일성 이사금 이야기로는,,

일성 이사금대의 기록은

크거나 화려한 기록도 없고

일성 이사금은 비록 능력이 부족하다 하여

오랜 기간동안 태자였던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기도 했고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즉위했어도

그랬기에 나름 경륜과 연륜이 있었던

무난했던 국정운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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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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