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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라 이사금 12년

10월 겨울

아찬(신라 6등벼슬) 길선이

반역을 등용하다가 발각되자

처형될 것을 두려워해서 백제로 도망갔습니다


아달라 이사금이 (백제에) 글을 보내서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달라 이사금이 군사를 보내서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신라)군사는 식량이 떨어져서 돌아왔습니다


<라봉봉>두 운명의 라이벌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아달라 이사금의 전전왕인 지마 이사금때는 상당히 좋았고

전왕인 일성 이사금때는 그냥 무난무난했다가

이렇게 반역자 길선이 도망친 사건으로

아달라 이사금때는 사이가 다시 나빠졌다고 합니다


이는 신라도 예전같이 골골대거나 하며

백제의 도움을 받아도 될 정도가 아니라

자립할만큼의 힘을 키워서

소백산맥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그 힘을 뻗쳐나가려는 신라의 자신감이

더이상 백제에 굽실대거나 하지 않고

그냥 반역자를 돌려보내달라고 '요구'만 하다가

거부되자 곧바로 백제를 치게된거 같습니다


아달라 이사금 13년

정월(1월) 봄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신해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아달라 이사금 14년

7월 가을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명을 잡아갔습니다


8월

일길찬(신라 7등벼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 아달라 이사금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 漢水 로부터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해서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했습니다


<신라인들>마 ! 백성들 안내놀끼가 !


<백제인들>쩝,, 얘네 화나면 눈에 뵈는게 없더라,,

그냥 불쌍한데 놔주자,,


아달라 이사금 15년

4월 여름

이찬(신라 2등벼슬) 계원이 사망하자

흥선을 이찬에 임명했습니다


아달라 이사금 17년

2월

시조묘를 중수(건물을 손질해 고치다)했습니다


7월 가을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서리와 우박이 내려서 곡식을 해쳤습니다


10월 겨울

백제가 변경을 약탈했습니다


아달라 이사금 18년

곡식이 귀해서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아달라 이사금 19년

정월(1월) 봄

구도를 파진찬(신라 4등벼슬)에 임명하고

구수혜를 일길찬(신라 7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2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습니다


아달라 이사금 20년

5월 여름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서 예방(예의차 방문)했습니다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왜여왕비미호견사내빙)


<왜인들>우리는 여자가 왕이시므니다 데스 !


<신라인들>여자가 왕이라니 껄껄

사관들은 이 웃긴 이야기를 기록에 남기도록 하라 !


<라봉봉>비미호는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읽는것이고

일본에서는 이 인물을 '히미코'라고 불리는데

전설속 일본의 여자왕이었습니다


어떻게 여인의 몸으로 일본,당시 왜를

장악하고 왜의 왕이됬을지는 의문이나

그 카리스마나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고

기록상으로는 왜 역시 남자가 왕이 됬는데

왜국이 어지러워지자

서로 공격하고 오랫동안 서로 싸우는 내전이 일어났는데

히미코라는 여인이 등장해서 강력한 카리스마로

내전을 종식시키고 여왕이 된거 같습니다


그녀는 귀신을 섬겼다는데 즉 무당 혹은 제사장의

역활을 했을거같고 종교인의 역활이 인간 윤리를

바로잡는 일이기에

혼란스러운 일본,당시 왜는 어떠한 올바른

윤리관의 부재에 히미코라는 무녀,제사장을

왕으로 세워서 혼란을 종식시켜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남편은 없고 남동생이 있어서

남동생이 나라를 다스리는것을 도왔다고 하고

왕이 된 이후로는 그녀를 본 적이 있는자가 적었다고 하고

여자 시종 1000명이 시중들게하며 오직 한사람의 남자만이

음식을 공급하면 말을 전해서 드나들고

경비도 삼엄하게 했다하고 즉 왕이 된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거의 밀실정치로 이어졌던거 같고

이미지 소모를 극도로 최소화하며 신비주의적 모습을

왜인들에게 보였던거 같고

이러한 기묘한 모습들이었음에도

나름 카리스마가 강해서 이런 모습들로

왜인들을 통치했던 왜국 여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기록에는 위의 글같이 자세하게 써있고

한국 기록에는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의 기록에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라고 짧게 기록되있는게 전부입니다

나름 비미호,히미코는 여인의 몸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이미지 소모를 신중하게 하며 신비주의 형태,

제사장 형태의 카리스마 등으로 왜를 통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고 나름 왜국의 혼란을 종식시켰다는 것이나

외국에 사신을 보내서 교류하는 등 유능한 왜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일본에서도 히미코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더라도

그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있었던거 같고

나름 일본에서는 여인의 몸으로 일본을

휘어잡은 강력한 카리스마,신비주의적 이미지 때문인지

인기가 많은 인물이고

한국기록 삼국사기에 기록될 정도라는 면에서

여러 외국과의 외교적 행보를 보였던 인물 같습니다


또 히미코 기록은 히미코 사후 히미코의 무덤에

노비 100여명을 순장,같이 묻었다는데

이는 당대 일본에서도 악습이었던 순장이 이뤄졌다는 기록이라

할 수 있고

당대 한국사회나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지배층들이 죽을때

그를 모시던 노비등을 같이 묻는 순장이라는 악습이

만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시대가 놀라운 이야기도 많지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비과학이 과학이 됬던 시대이고

너무 환상을 가지지 않는 것도 좋습니다,,


아달라 이사금 21년

정월(1월) 봄

흙비가 내렸습니다


2월

가뭄이 들어서

우물과 샘물이 말랐습니다


아달라 이사금 31년

3월 봄

아달라 이사금이 붕어, 사망했습니다


<라봉봉>아달라 이사금은 재위 31년에 죽었는데

죽기 전 기록은

재위 21년으로 즉 죽기 전

10년동안의 기록에 공백이 있습니다


이후부터 사실상 박씨일족이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되고

(이후 신라 멸망직전 잠깐 박씨왕 3명이 나온것을 빼면

아달라 이사금은 사실상 마지막 박씨왕입니다)


아달라 이사금 바로 다음왕 신라 9대왕 벌휴이사금 석벌휴가

석씨 임금이고 10대,11대,12대도 석씨왕,

그리고 13대때 잠깐 김씨왕이 나오고

14대,15대,16대가 연속으로 석씨왕인 것을 보면

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가 죽기전 10년동안의 기록은

일어나고 있었던 석씨 일족의 권력투쟁,

국내 혼란등이 있었을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신라는 고구려,백제와는 또다른

신비한 나라이고 고구려,백제 역시

초기에는 왕위의 부자상속이 확고화 되지 않고

나름 능력위주로 왕위가 교체됬다고 하나

신라는 이에 한술 더떠서

성씨까지 뒤바뀌며 왕조가 교체되지 않았음에도

왕위가 다른성씨에 교체되는 등

오늘날 민주정과도 닮아있는 당대 기준으로는

매우 특이했던 정치체계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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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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