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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9대왕 벌휴 이사금 (벌휴왕 석벌휴)

재위기간 12년 184~196년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김부식>발휘라고도 한다


그의 성은 석씨이며

탈해왕(신라 4대왕 탈해 이사금)의 아들

구추 각간(신라 1등벼슬)의 아들입니다


(즉 벌휴 이사금은 석탈해의 손자인데

신라 1등벼슬인 구추 각간이라는 인물이 잘 안나오고

그 전부터 2등 벼슬인 이찬이 자주 기록에 나온거로 봐서

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 즉 박씨 왕족들은

석씨세력을 가장 최고위 벼슬에 앉히긴 했으나

2등 벼슬인 이찬을 사실상 재상격으로 해서

이찬과 상의하며 국정을 이끌어 왔던거 같습니다)


어머니의 성씨는 김씨입니다

그녀는 지진 내례부인입니다


(그렇게 벌휴이사금은 아버지는 석씨,

어머니는 김씨였고

석씨 일족들의 시조인 석탈해는

실제로 유능한 임금이었는데

석씨 일족들은 시조인 석탈해를 미화시키고

점점 세를 불리며 박씨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신흥세력인 김씨일족과

손을 잡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달라(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가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그,석벌휴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벌휴 이사금은 바람과 구름을 보고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그해에 풍년이 들것인가 흉년이 들것인가를

미리 알았으며(자연과 기후에 밝았던 인물 같습니다)

또한 사람이 정직한가 사악한가를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벌휴 이사금 2년

정월(1월) 봄

벌휴 이사금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벌휴 이사금>(나역시 석탈해 할아버지가 했던거를

그대로 해야지 ㅋ)나는 계림(신라)의 석씨 왕이지만

우리나라는 박씨가 건국한 나라이며

시조를 잊지 않을 것이고

그 예와 도를 따를 것이니라 ~


2월

파진찬(신라 4등벼슬)구도와

일길찬(신라 7등벼슬)구수혜가

좌우 군주 軍主 (신라 지방관 직책이며 군사권을

행사하는 지휘관이라고 하나

직역하면 군사의 주인이기에 대장군,장군격이라는

의미도 가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 되어서

소문국을 정벌했습니다

군주 軍主 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됬습니다


벌휴 이사금 3년

정월(1월) 봄

벌휴 이사금이 주와 군을 순행하여

민정을 시찰했습니다


5월 여름

그믐(달의 마지막 날) 임신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7월 가을

남신현에서 상서로운(상서롭다 =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 벼를 진상했습니다


벌휴 이사금 4년

3월 봄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서

농사철에 토목공사를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10월 겨울

북부 지방에 큰 눈이 내려서

한 장(1장 = 10척, 1척 23cm 기준 1장은 2.3m)

깊이로 쌓였습니다


벌휴 이사금 5년

2월 봄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했습니다

파진찬(신라 4등벼슬) 구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방어하게 했습니다


벌휴 이사금 6년

7월 가을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5백여명을 죽였습니다


벌휴 이사금 7년

8월 가을

백제가 서쪽 국경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해서 부곡성을 포위했습니다

구도가 정예기병 5백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 하였습니다


구도가 와산까지 추격하다가

백제에게 패배했습니다


벌휴 이사금은 구도가 잘못했다고 해서

부곡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에 임명했습니다


벌휴 이사금 8년

9월 가을

치우기 蚩尤旗 (혜성의 일종으로

꼬리가 깃발이 나부끼듯 구부러진 것)별이

각성 성좌와 항성 성좌에 나타났습니다


벌휴 이사금 9년

정월(1월) 봄

국량을 아찬(신라 6등벼슬)에 임명하고

술명을 일길찬(신라 7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4월

서울(신라 수도)에 눈이 내렸는데

깊이가 석자 (약 69cm)였습니다


5월 여름

홍수가 나서

산이 10여군데 무너졌습니다


벌휴 이사금 10년

정월(1월) 봄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갑인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3월

한기부(신라 여섯마을, 6부중 하나로

한기마을 이라 보면됩니다)여인이

한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다섯쌍둥이,,)


6월

왜인(일본인) 천여명이 큰 기근으로 인해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신라로) 왔습니다


<왜인들>하 ,, 나라가 어렵스무니다 !

식량을 구하게 해주십시오,,


<신라인 1>점마들 평소에는 우리나라를 약탈하더니만

어려울때는 도와달라고 사정하는거노 ?


<신라인 2>음,, 불쌍한 족속들이군,,

한국인들의 정은 세계 제일이지 !

조금씩 곡식을 나눠주세 !


(예로부터 경상도 일대는

왜,일본과 가까워서 왜인들의

주 공격,약탈지방이기도 했으나

또 왜와 가까웠다는 것 때문에

왜인들이 어려울때 주로 의탁하거나

이주하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벌휴 이사금 11년

6월 여름

그믐(달의 마지막 날) 을사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벌휴 이사금 13년

2월 봄

궁실를 중수 重修 (낡고 헌것을 다시 손대어 고침)했습니다


3월 가뭄이 들었습니다


4월 여름

대궐 남쪽에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쳤습니다


벌휴 이사금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벌휴 이사금대에 역시

큰 기록은 없고

신라 기록들은 별다른 농담이나 우스개소리가

들어갈 이야기보다는 진지하고 되게

조용합니다,, 한국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된 것은

아마도 이런 성향의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기에

그런 이미지가 생겨난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조용한 느낌과는 달리

벌휴 이사금 석벌휴는 즉위 과정에서

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가 죽기 10년동안의

기록이 공백으로 되있기에 이 시기동안

석씨 일족드리 권력투쟁,암투를 벌여서

왕위를 쟁탈한게 아닐까 하는 의혹들이 있고

물론 이 과정은 고구려 연개소문 같은

큰 반란,쿠데타라기보다

조용한 암투나 그런 과정이 있었을거 같습니다


벌휴 이사금은 재위기간이 12년정도로

상대적으로 신라 초기왕에 비해서는 짧은 편이고

기록 역시 적은데

그나마 볼만한게 백제와의 전쟁기록이라는데

박씨보다 더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나름 큰 사건은 이런 백제와의 충돌기록과

왜,일본에 대기근이 들자 신라로 왜인 1천여명이

식량을 구하려왔다는

기록 정도라 볼거 같고

신라에 대한 해석들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서

신라 중심의 기록들이 많이 있고 또 신라 기록들은

고구려,백제에 비해 풍부하고 별다른 무리가 없기에

학자들도 대게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 역사는 일치한 해석을 내놓는거 같습니다

근데 진짜 신라사는 삼국중에서 가장 쉽고 무리가 없는거 같고

또 그래서 가장 지루하기도 한거 같고

나름 신라인들도 삼국중에서 모범적인 모습들을 보여왔기에

약간 특이하거나 크게 무리있는 기록은 없지만

그렇기에 모범적인 모습,행실등으로

내실을 착실히 다지고 삼국을 통일한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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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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