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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팔국의 난을 진압하고

백제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내해 이사금>


내해 이사금 12년

정월(1월) 봄

내해 이사금의 아들 이음(석이음)을


<김부식>혹은 나음이라고도 한다


이벌찬(신라 1등벼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13년

2월 봄

내해 이사금이 서쪽의 군과 읍을 순찰하고

열흘만에 돌아왔습니다


4월 여름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게 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14년

7월 가을

바닷가의 여덟나라가 공모해서 가라(가야)를 침범하자


(浦上八國謀侵加羅 포상팔국모침가라)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내해 이사금이 태자 우로(석우로)와

이벌찬 이음(석이음) (즉 두아들들)에게

6부(신라 여섯마을로 건국때부터 있었기에

중앙군이라 보면 될거 같습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여덟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명을 잡아서 돌아왔습니다


<라봉봉>비록 내해 이사금은 전왕의 둘째아들의 아들로서

첫째아들의 아들, 장손을 제치고 먼저 임금이 되었으나

막상 왕위에 오르고서는 아들을

신라 최고벼슬, 재상직인 이벌찬과 태자에 임명하는 등

나름 권력승계작업도 해놓았던거 같습니다


여기서 내해 이사금의 태자,아들이었던 석우로는

왕위를 계승받지는 못하나 신라의 장군으로 활동하며

공을 세우는데 이후 외교현장에서는 무례한 실언을 해서

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그외에는 장군으로서 활약한 신라 초기의

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름 '정치는 모르는 장군'이었으나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던거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로는,,

8개 소국들이 가야를 공격했는데

이에 가야가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신라는 이에 군사를 파병해서 이를 물리친 사건으로

이를 '포상팔국의 난' 이라고 합니다

한국 남쪽 지방 소국들이 연합해서

가야를 총공격한것으로 보이며

이에 신라는 가야를 구원했고

그 결과는 신라의 승리로 끝나기에

이 사건으로 신라가 한국 동남쪽의 패자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가야는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도 아니고

안라국(안라가야, 아라가야)였다고 하나

금관가야는 방조하거나 힘을 못썼다고 할 수있고

이에 신라가 나서게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신라의 한국 동남지방 영향력 확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포상팔국의 난은

대략 가야계쪽에서 있었던 큰 사건이라 볼 수 있고

한국 동남쪽 지방의 여러 나라들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는 기록이고

또 신라가 8개 소국들과 8 vs 1 로 싸워서 이길정도로

강국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내해 이사금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신을 보내서 군읍의 죄수들을 조사해서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죄수는 모두 석방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16년

정월(1월) 봄

훤견을 이찬(신라 2등벼슬)에 임명하고

윤종을 일길찬(신라 7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17년

3월 봄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왔습니다


5월 여름

큰 비가 내려서 민가가 유실됬습니다


내해 이사금 19년

3월 봄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꺾였습니다


7월 가을

백제가 서쪽지방 요거성을 공격해서

성주 城主 설주를 죽였습니다

내해 이사금이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했습니다

그들은 사현성을 격파했습니다


12월 겨울

우레(천둥)가 있었습니다


내해 이사금 23년

7월 가을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했으므로

내해 이사금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격퇴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25년

3월 봄

이벌찬 이음이 사망하자

충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7월 가을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27년

4월 여름

우박이 내려서 콩과 보리가 상했습니다


남신현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음달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 그런데 실제로

가끔 사람이 죽었을때 제사지내기 전에

병풍뒤에 시신을 놨는데 가끔 되살아 나는 특이한

경우들도 있다고도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가사상태'에 빠져서일 수도 있는거 같고

그래서 한국에서는 장례기간을

넉넉히 잡고 그 기간동안 병풍뒤에

시신을 모신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0월 겨울

백제 군사가 우두주에 들어왔으므로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막으려 했으나

웅곡에 이르러 적(백제)에게 패하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내해 이사금>병사들은 죽고 그대는 홀로 돌아오다니 !

그대는 지금 제정신이 있는겐가 없는겐가 !


내해 이사금은 그를 진주 鎭主 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해서 병마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29년

7월 가을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전투를 했습니다

그는 봉산 아래에서 백제병을 격파하고

1천여명을 죽였습니다


8월

봉산성을 쌓았습니다


내해 이사금 31년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서 구제했습니다


10월 겨울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해서

죄질이 가벼운 자는 석방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32년

2월 봄

내해 이사금이 서남쪽 군읍을 순행하다가

3월에 돌아왔습니다

파진찬(신라 4등벼슬) 강훤을 이찬(신라 2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내해 이사금 34년

4월 여름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동안 울었습니다


9월 가을

지진이 있었습니다


10월 겨울

눈이 크게 내려서 다섯 자 (약 115cm)나 쌓였습니다


내해 이사금 35년

내해 이사금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내해 이사금은 재위 후반기에는

백제와의 잦은 충돌이 있었는데

당대 남쪽 한국지역의 강대국이었던 백제와의 전투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우세했을 정도로

신라의 국력이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남쪽으로는 가야쪽을 평정하고

서쪽으로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우세적인 모습을 보였던

내해 이사금대의 신라로

당대 신라가 이미 한국 남방 지역 맹주화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기록들입니다


나름 혈연적 정통성이 부족했음에도 왕위에 올랐던 그는

'강한 신라'를 유지하는게 그의 정책적 기본 모토였던거 같고

실제 그랬던 시기의 신라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내해 이사금 다음부터는 왕위는 다시

벌휴 이사금의 장남이자 태자였던 석골정의 계열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 석우로 역시 충직하고 용맹하기는 했으나

정치에는 밝지 못했던 인물같고

장군으로 활약한 신라의 명장이었다고 할 수 있고

대신 훗날 내해 이사금의 손자,석우로의 아들인 석흘해가

신라 석씨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하게 되고

석씨왕가 역시 족내혼,근친혼으로 몰락해서,,

이후부터는 더이상 신라에서는 석씨 왕이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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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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