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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이야기와 이어짐)

 

그렇게 자국 및 다양한 나라에서 경제건설 자금을 얻어낸 박정희 대통령은

동시에 이전 제 2공화국인 장면내각에서 계획됬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구상을

스틸(훔침) 해 자신의 정부대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했는데

 

이후부터 계속 이어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입니다

이전 이승만정부 시절부터 한국경제 재건을 위해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던

'원조경제' 도 점차 미국의 지원이 줄어들게 되었고

1950년대가 원조경제 시기였다면

1960년대는 차관경제(빌리는 돈) 시기로서

이때부터 외국 등에서 차관을 받는 등 돈을 끌어모은 박정희 정부는

점차 경공업 사업에 주력하게 됬는데

 

1965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교서(새해 첫 머리말) 에서

 

'증산(增産 생산량을 늘림) · 수출 · 건설'

 

을 국정 3대목표라 밝혔고

 

'수출만이 살길이다'

 

라는 캐치프라이즈도 이즈음 탄생하게 됬습니다

 

급속도로 성장한 박정희 정부시절 (1961~1979) 대한민국 수출액 , 경제 대통령 ㅇㅈ ?

 

원조경제 당시까지만 해도 한미정부의 입장은 달랐고

한국은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확충하려

생산재 중심의 물자도입을 요구했고

미국은 국민들의 현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소비재나 생산에 소요되는 원료등을

도입하려 주장했는데

 

결국 원조경제를 주도한 국가 미국의 의사가 크게 반영되

소비재와 원료 중심 (식품업 , 섬유공업 [삼백산업] ) 등이 크게 발달했고

단 비중은 낮았지만 원조경제 시기 산업간접자본 복구 및 확충에도 기여했습니다

 

이후 미국의 원조는 점차 감소했고

 

(현대 대한민국과 일본 경제는

사실상 미국이 키웠다 보면 되고 한국 경제의 젖먹이 시기라 보면 됩니다)

 

점차 역량이 확대된 대한민국은

공업화에 집중해 경제규모를 빠르게 확대시키는데

 

박정희 정부부터 시작된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2~1966) 때는

전력 · 석탄 등의 에너지원과 기간산업 확충 , 사회 간접자본 확대등에 노력해

경제개발 , 산업화의 기반을 닦았고

농업생산력 확대에도 노력해

 

(이때부터 중앙정보부는 베이비붐으로 증가한 인구를 먹여살리려 외국에서

좋은 품종 쌀종자를 밀수해 농촌진흥청에서 연구를 시키는 등 통일미 개발이 시작됨)

 

7.8% 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이시기동안 1인당 국민총생산(GNP) 는

83달러에서 126달러로 증가했습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순풍을 탄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성과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어

6대 대통령선거 (1967) 에서 또다시 나선 신민당(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51.4%(정희팍) VS 40.9%(윤보선) 표로 제압하고

 

박정희의 무난한 승리로 끝난 6대 대통령 선거 지도 , 단 한국 수도인 서울은 박정희가 유력한 지역이 단 한곳도 없다는 점과 슬슬 동서구도나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국민들 입장에서도 박정희도 옳다고만 볼 수 없지만

일단 윤보선의 구태의연[옛 모양 그대로] 한 모습에

염증을 느낀듯 합니다)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한편 이때부터 북한의 대남도발이 본격화됬는데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및 북한 공작원 31명은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했고

(김신조 사건 or 1.21 사태)

 

이당시 크고 작은 전투들로

북한 공작원들은 29명 사살 , 1명 투항(김신조) , 1명 미확인 등으로

끝나게 됬지만

북한 공작원들의 무차별 사격등으로

결혼 예정이던 아가씨나 경복중학교(경복고) 수위 등의 일반인

 

(이때 저의 아버지가 경복중고등학교 다닐때라

북악산 및 경복고로 내려온 북한 공작원으로 인해 수위가 죽은것을 기억하십니다)

 

및 참관겸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 병사도 사망할 정도로

한국측 피해도 컸고

북한은 당연 31명의 소수정예 인력이었기에

한국 측 역시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 민간인 7명) , 52명이 부상입습니다

 

북한 공작원 중 유일한 생존자이자 투항한 김신조는

이튿날(다음날) 기자회견에서

 

<김신조>청와대를 중심으로 해가지구리

청와대 내부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가지따려구 하고

그리고 그 슬하에 있는 지휘하는 간부들을 총살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발음이 정확치 않아 들리는대로 옮겨봤습니다)

 

이 기자회견에서

 

'박정희의 모가지(목) 를 따러 왔다'

 

는 김신조(북한)의 발언은 크게 회자될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고

대한민국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어렸을때 아는 형이 학교 평화 포스터 [??] 에

'김일성의 목을따자' 라고 쓰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한 거 같은데 ;;

이게 여기서 나온 말인줄은 저도 처음알았습니다)

 

생포된 김신조의 모습

 

또 김신조 사건(1.21 사태) 바로 2일 후인

1968년 1월 23일에는

동해상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기 위한 미국의 푸에블로함은

북한군에 나포됩니다,,

 

이전부터 미군은 북한 해군력이 전무해

북한 해안을 제집 드나들듯이 했고

북한군의 경계태세를 지나치게 얕봤는데

 

푸에블로함이 나포되니

그 안에 타고있던

82명(83명인데 이 중 1명은 나포과정에서 총격으로 전사 , 총 82명) 은

북한의 인질이 되었고

 

미국 역시 딱히 잘한 것은 아니고

대놓고 북한을 무시하다 이를 갈던 북에게 나포된거라

미국은 결국 북한에 협상 주도권을 넘겨주며 굴욕적으로 사과하고

승조원 82명과 전사자 시신 구를 판문점을 통해 송환시킵니다

 

북한이 포로로 잡은 미군들의 단체사진을 찍을 때 손가락의미를 캐묻자 미군들은 '하와이식 인사법' 이라 뻥을 쳤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엿먹으라는 뜻)

 

이를 통해 베트남 전쟁에도 신경써야 했던 미국은

한반도까지 전쟁을 확대시키고 싶어하지 않았고

결국 대북인식을 괴뢰집단급에서 나름 국가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북한 역시 이 사건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됬습니다 ;;

 

이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불과 10달 뒤 남한내 해방구 건설을 목표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일으켰고

120명의 무장공비를 강원도에 침투시켜 민간인들을 학살했는데

결국 진압되나

이로 인해 남한의 대북관은 엄청나게 강경하고 적대적으로 변화됬습니다

 

작전 당시 사살된 북한 무장공비 시신 모습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북한 무장공비들은

강원도 평창군의 집을 지키고 있던 어린 4남매에게

 

<북한 무장공비>너는 북한이 좋으냐 , 남한이 좋으냐

 

라고 물었고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이승복 어린이는

 

<이승복>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대답했고

이에 공비들은 승복 어린이의 멱살을 잡아 입을 벌린 후

대검으로 입을 찢어 살해했고

가족들을 살해했는데

상처를 입고 겨우 도망친 형 승권은 병원으로 후송되기 전 이웃에게

 

"승복이가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하니 공비들이 입을 찢어 죽였다"

 

라고 증언했습니다

 

이승복 어린이는 이후부터 반공기류가 강해진 한국 사회에 널리 회자되었고 많은 초등학교에서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당시 한국초등학교에는 단군할아버지 동상 , 유관순 동상과 더불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박정희 정부부터

남한의 경제가 건설되자

북한의 본격적인 극심한 질투 및 견제 , 대남파괴등이 시작됬다고 볼 수도 있고

 

(남한이 잘살면 적화통일 및 무력통일이 어려워지기 때문)

 

이 사건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극도로 높아졌고

반공은 국가적인 중요 정책이 됬습니다 (반공이 국시로)

 

<라봉봉>당시부터 대한민국의 고속경제성장도 시작됬지만

북한의 도발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내부적으로

강경한 공안(공공의 안녕 , 질서라는 뜻으로

치안과도 비슷한 뜻이지만 한국에서는 반공의 다른말이기도 했습니다)

분위기를 조성시키며 국민들을 통제 , 탄압하게 됬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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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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